# ON AIR 꿀FM
“그럼 옛날에 거기서 일한 거야? 대단하네”
“별로 그렇지도 않아 막상 들어가면 진짜 삭막해”
“진짜? 그 방송 웃기기로 유명하잖아”
“일밖에 안 하더라 친목 이런 거 한 개도 없어!”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다 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처음 봤을 땐 서로 별로 말도 안하고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 같았는데
나이도 같고 라디오 작가를 짧게나마 먼저 해봤다는 공통점 덕분에 급 친해졌다. 이제 스튜디오로 슬슬 가봐야 하나 마시던 커피를 정리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셨네요. 시끄러운 분들
“탄소야!! 내가 없어서 외로웠지?”
“탄소씨 오랜만이에요 나 잊어버린 건 아니죠?”
“오셨어요 지민씨 오랜만이네요! 태형아 너 그렇게 뛰어다니면 다친다”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아 작가님이시죠? 태형이한테 들었어요 잘 지내 봅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녹음 시간 좀 남았는데 일찍 왔네?”
“너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막내 작가 둘만 있던 휴게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단지 두 명이 더 왔을 뿐인데. 확실히 연예계에서 활기차기로 소문난 두 사람답다.
나도 축축 처질 때마다 태형이를 만나고 나면 다시 활력을 얻곤 했다. 이젠 더 자주 만나겠네 태형이랑 지민씨랑 좋다
“이제 스튜디오로 가자”
복도가 절대 좁은 게 아닌데 4명이서 나란히 걷다보니 참 좁다. 어깨가 부딪쳐도 기분이 좋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첫 방송 시작이다.
스튜디오엔 피디님과 남자분 한 분이 더 계셨다. 워낙 스탭들이 많이 있으니까 근데 피디님과 엄청 친해보인다. 얼마나 친한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둘이서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뭔가 귀여웠다.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자 나를 보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피디님 저희 왔어요”
“어 왔어요? 미안미안 못 봤어요”
피디님이 인사하자 그제야 우릴 발견한 건지 남자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세요 정호석 엔지니어입니다. 작가분들이 확실히 어리시네
민피디랑 동갑이고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안녕하세요 김탄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호석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미소가 너무 이뻐서 나도 모르게 같이 웃어버렸다. 기분 좋은 느낌이 가득한 사람이다. 방송을 준비하는 내내 우리 작가들을 다정하게 도와주고 챙겨줘서 피디님은 친구를 잘 두셨네라는 생각을 했다. 뭐 피디님도 사람이 워낙 좋으니까. 옆에선 태형이랑 지민씨가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잘 띄워주었다. 확실히 방송을 오래해서 그런지 사교성도 최고다. 벌써 정엔지니어와 친해진 둘이었다. 부럽다.
“이제 방송 준비 해주세요. cm 들어갑니다”
방금 전까지 장난치던 태형과 지민은 헤드폰을 끼고 대본을 훑어보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개편 후 첫 방송이니까. 더군다나 정국이랑 나는 생방은 오랜만이라 더 긴장되었다. 대본은 잘 전달했겠지? 아직 토크백에 불 들어왔으니까.. 확인 해봐야 하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민피디님도 약간은 긴장했는지 말이 없었다. 이제 50초 후엔 방송 시작이다.
곧 토크백에 손을 떼고 온에어(on air)에 불이 들어오고 노래가 깔렸다. 오늘 BGM은 특히 더 신경 썼다. 피디님과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 같이 고민할 정도로.
[ON AIR]
“2015년 6월 18일 누군가에겐 긴 일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목요일, 또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연인과의 첫 데이트, 그리고 우리 꿀FM 식구들에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인생에 한 번뿐인 특별한 목요일. 꿈꾸는 꿀FM NEW BORN DAY 새로운 디제이와 함께 시작합니다.”
드디어 전파를 탔다. 이젠 내 손에서 떠나간 대본이다. 오프닝 멘트 너무 진부한가? 심심하다고 느끼시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는 순간이다. BGM이 짧게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모니터에 올라오는 청취자분들의 문자를 보며 실시간으로 반응을 확인하는 중이다. 다행히 태형이와 지민이의 이미지가 좋은 덕에 기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문자들이 쭉쭉 올라오고 있다.
“2015년 6월 18일 꿀FM이 다시 태어나는 날,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디제이를 시작한 태형, 지민입니다. 전과는 다른 목소리에 많이 놀라셨나요?
워낙 시끄럽다고 소문난 저희가 디제이를 하게 되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아요 그쵸 지민씨?”
“그러게요 게스트로는 수없이 출현해봤지만 이렇게 정식 디제이라니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막 간질간질 하네요!”
오프닝이 끝나고 태형과 지민의 본격적인 라디오가 시작되었다. 방송이 시작된 덕분에 스텝들은 모두 초긴장 상태다. 아닌가.. 정국이랑 나만 긴장하고 있는 건가? 암튼 둘은 너스레를 떨며 진행을 잘 해주고 있다. 대본도 척척 잘 읽고 리딩을 미리 잘 해왔나 보네 고맙게도. 정국이는 한참 말이 없다가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지 한결 느긋하게 시계를 쳐다보며 틈틈이 대본을 체크했다. 피디님은 턱을 괴고 조용히 그들의 진행을 듣고 있고 호석씨는 기기들을 틈틈이 체크하고 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중. 청취자분들의 재밌는 사연을 들으며 살짝 웃기도 하고.
“오늘 청취자분들 입담이 빵빵 터지네요 감당이 안될 정도로”
“그러게요 하여튼 우리 꿀FM 청취자 식구분들 웃긴 건 알아줘야해”
“자 그럼 잠깐 광고 듣고 2부에서 만나요”
CM이 깔리고 토크백을 열고 태형이와 지민이에게 한껏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도 고맙잖아 잘 해주니까. 덕분에 스텝들도 1부가 끝나갈 즈음엔 사연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한결 편안해졌다.
“태형아 잘 한다 역시 내 친구”
“나 잘 했어? 다행이다”
“지민씨도 최고 둘이 쿵짝이 너무 잘 맞아요 분위기 완전 좋아요”
“고마워요 작가님들 대본 잘 썼더라 재밌게”
“수고했어요 2부도 잘 해봅시다”
피디님도 일어나서 기지개를 크게 키고 격려의 말을 하며 사기를 올려주었다. 태형이는 목이 많이 탔는지 연신 물을 마시며 대본을 읽고 있고 지민씨도 그런 태형이에게 물을 챙겨주며 대본을 연습하고 있다. 막내인 정국이랑 난 음료를 사서 중간중간 스텝분들께 나눠주며 자꾸 집 나가려 하는 정신을 챙겼다. 곧 이어 2부가 시작되고 다시 온에어에 불이 들어오자 내 머릿속에서도 불이 반짝 들어왔다. 다시 청취자분들의 사연도 소개하고 노래도 추천하고 수다도 떨면서 지민과 태형은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저렇게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유독 라디오 방송국에 많은 것 같다. 확실히 청취자분들과 교감을 바로바로 하는 직업이라 그런가. 그래서 그들을 볼 때마다 늘 기분이 좋다.
정신없이 50분이 흐르고 어느 새 엔딩멘트만을 남겨 두고 있다. 나도 스튜디오 정리를 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 정국이와 웃으며 나름 자축을 즐기고 있었다.
호석씨는 그 광경이 귀여웠는지 등을 토닥여주었다. 피디님도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늘 꿈꾸는 꿀FM NEW BORN DAY 어떠셨나요? 여러분들의 아쉬운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저희도 슬퍼요”
“아쉽네요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다니! 첫 디제이를 맡은 만큼 부족한 점도 많았는데 너무 즐거웠습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6월 18일의 끝자락에서 19일의 시작을 함께 해주신 많은 청취자분들 저희가 많이 사랑합니다”
“그럼 금요일 10시에 또 봬요 사랑합니다! 근데 엔딩 멘트가 이건가요? 아 오글거리는데~”
“그럼 지민씨는 하지마요 나 혼자 해야지 그대곁ㅇ...”
“늦은 밤 그대 곁의 꿈꾸는 꿀FM 금요일에 봐요~”
드디어 방송이 끝나고 태형과 지민이 박수를 치며 스텝들에게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모두들 고생했어요 늦은 밤이지만 다들 긴장한 탓인지 아무도 졸지 않고 끝까지 방송을 들었다.
수고했다며 스텝과 디제이들을 격려해주던 피디님은 어느 새 내 옆에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뭐지?
“자 다들 아직 퇴근 안 됩니다”
“네?”
“첫방 성공기념 회식이 있겠습니다”
“우와!!”
피곤하지만 마냥 신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첫방이 나름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실 그렇게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웠는데 아싸 회식이다! 그나저나 고기 먹고 싶다.. 태형이도 내 옆에 와서 같이 즐거워했다.
귀여운 것. 피디님은 금새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는 날 보더니 졌다는 듯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요 피디님.
“다들 피곤하지 않아요? 확실히 나보다 젊어서 그런가”
정엔지니어님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미 피디님에게 졌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국이랑 나, 태형이, 지민은 마냥 다 좋아 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노는 거 좋지요
“회식 장소는 방송국 맞은 편 슈가포차입니다. 다들 짐 챙겨요”
“네!”
그렇게 6명이서 우르르 스튜디오를 빠져 나가는데 조용하던 7층 복도가 시끌벅적한게 늦은 밤 같지가 않다. 다들 서로 잘 했다며 격려하는 데 내가 봐도 다 큰 어른들인데 참 귀엽다.
“민피디, 정엔지 어디가?”
피디님과 엔지니어님을 부르는 목소리에 6명 모두가 일제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고갤 돌리니 키 큰 남정네 2명이 보였다. 그런데 유난히 한명이.. 익숙하다
헝클어진 기억의 실타래가 한꺼번에 확 풀려버리는 느낌에 현기증이 났다. 설마설마..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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