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응. 말해봐, 말해봐."
"아니, 쌤..이번에 우리 병동에 새로 들어온 환자 알아요?"
"언제 들어 온 환자?"
"3일 전에요..이소정 환자요.."
"이소정..아, 기억난다. 그 환자 왜?"
내 말에 보미는 아무 말도 안하고 앞에 있는 술잔을 자기 입에 털어넣었어. 약속대로 보미와 나는 퇴근 후 병원 앞 곱창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
"보미야,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너 그러다 내일 속 뒤집힌다. 내 말에 보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젓가락으로 곱창 몇 점을 집어먹었어. 물도 좀 챙겨먹고, 하는 내 말에 물도 꼴깍꼴깍 먹고.
"그 환자요...하.."
"왜, 까칠한 환자야?"
"아니요오..완전, 천사에요. 천사."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보미는 다시 한 번 자기 입에 술을 털어넣고 주먹으로 입을 스윽 닦아.
"김종대..."
갑자기 튀어나온 김종대의 이름에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어.
"김종대, 여자친군가봐요.."
켁, 하고 마시던 물을 겨우 삼킨 내가 기침을 몇 번 했어. 김종대, 여자친구? 나도 아직 못들은 김종대 여자친구를 왜 보미가 알고 있어?
그리고 김종대 이 새끼 보미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어?
"여, 여자친구?"
"쌤이..김종대 여자친구 없다면서요.."
"으응, 없어. 없었..는데."
김종대가 자주 먹을 걸 사들고 우리 스테이션에 두고 갔었고, 나는 그게 보미 때문일거라 확신에 확신을 거듭했었어. 그래서 항상 김종대가 먹을 것이 한가득인 봉투를 들고 나타날 때면 쟤는 언제쯤 연애하냐며 혀를 끌끌 차곤 했었거든. 백현이도 내가 입원했을 당시 퇴근하자마자 나에게 달려오는 김종대를 보고 쟤는 연애를 안해서 한가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거든. 보미도 그 소리를 들었을 거고..정말 사실이었단 말이야.
"나한테 그럴 땐 언제구.."
급기야 보미가 눈에 눈물을 다시금 그렁그렁하게 달았어. 나는 조용히 휴지를 건네주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지. 김종대 이 새끼.
"그 소정인지 뭔지 그 사람이랑, 아주 막..좋아서 난리치고.."
"뭐, 김종대가?"
"그 환자 혈관은 안 보여서 죽겠는데.."
"응, 그랬는데?"
"도와주지도 않고..모른 척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그랬어? 김종대가?"
"간호사라면서.."
보미는 아까 일이 생각났는지 서럽게 엉엉 울었어. 그 와중에도 속상한지 술잔은 계속해서 비우고 있었지. 아무래도 너, 내일 죽어나겠는데..
"나한테만 다정한 줄 알았지.."
보미가 급기야 머리를 테이블에 쾅, 하고 박았어. 얘 술 많이 먹었나봐..
"나한테만 다정하란 말이야.."
보미의 저 말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인데. 내가 중학생 때부터 김종대의 여자친구를 몇명 보아오면서 들었던 말이었지. 하필이면 김종대 여자친구는 죄다 내 친구였고 내 친구들은 한 번씩 꼭 김종대 품에 안겨 울면서 저 말을 했었어. 나한테만 다정하란말이야. 애 성격이 원체 다정하고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성격이라 오만 여자들 앞에서 웃고 챙겨주고 하다보니 정작 김종대의 여자친구 자리에 있는 애들은 맘고생하기 십상이었거든.
"보미야, 보미야?"
보미는 저 말을 끝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어. 망했다..망했다.
이인분을 시켰지만 거의 양이 줄지 않은 곱창과 보미혼자 비운 소주 두병을 계산하고 보미의 팔을 내 어깨에 올린 뒤 일어서려했는데,
"아, 아파.."
그 때 사고 이후로 어깨에 조금만 무리가 가면 심하게 아려오는 탓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다시 보미를 내려놓아야했어. 이건 진짜 내 힘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겠다 싶어서 휴대폰으로 백현이에게 전화를 했지.
"어, 백현아.."
-응, 집 들어갔어?
"아니.."
-왜, 자기 후배 뻗었어?
"응.."
-어딘데?
내가 위치를 말해주니 알았다며 전화가 끊겼어. 얼마지나지 않아 백현이가 들어왔고 보미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어.
"원래 신규때는 이러는거야?"
나를 보며 백현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어. 나 신규 때 힘들다고 여러번 소주 병나발을 불었을 때 백현이가 데리러 오고, 토 받아주고..숙취 해소까지 시켜주고. 고생했었지.
그러는 백현이는 병원 입사하고 나서 나보다 더 힘들어했지만 백현이는 정말 소주 한 잔 할 시간도 없었기에 나처럼 뻗은 경우도 없었어.
"어, 김종대 지금 병원 앞에 있는데."
백현이가 재미있겠다는 듯 웃었어. 그러더니 휴대폰을 들고..
"야, 야. 하지마."
"왜?"
"얘네 그런 사이 아닌가봐."
그, 김종대가 하도 성격이 그렇다 보니까..보미가 오해한 건 가봐. 혹여나 보미가 들을까 싶어 내가 조용히 이야기하자 백현이가 무슨소리나며 웃었어.
"그런 사이 아니긴."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대한테 전화를 건 백현이가 여기 위치를 알려주면서 전화를 끊었어.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거야 지금..
"백현아, 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보미랑 종대,"
내가 백현이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입을 뗐는데, 그 때 가게 문을 박차고 김종대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어. 얼마나 뛴 건지 머리는 산발이고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못해.
"야, 김종대.."
"하.."
"너 확실히 해. 보미 정 많단 말이야."
"누가 먹였어,"
"뭘 누가 먹여. 니가 먹인 거지, 이 자식아."
술 먹는 내내 네 욕하면서 먹던데. 김종대가 보미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고 변백현이 보미 팔을 들어서 김종대 목에 감아줬어. 읏차, 하고 일어선 김종대가 가게를 빠져나갔고 나랑 백현이가 그 뒤를 쫓았어.
"보미 우리 집으로 데려가야겠는데?"
"뭘 너네 집으로 가. 자기 집 가서 자야지."
"너 보미 집 어딘지 알아?"
내 말에 김종대는 아무말이 없었고 나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뒤 입을 쩍 벌렸어. 너, 보미 집까지 아는 사이야?
내가 백현이 팔을 붙잡고 입모양으로 난리를 쳤더니 백현이도 입모양으로 거봐, 하며 내 앞머리를 흩트리며 웃었어. 뭐야, 왜 나만 몰랐던 거야?
충격에 휩싸인 나는 보미를 업은 김종대를 따라 병원 옆 오피스텔까지 왔어. 익숙하게 3층까지 올라간 김종대는 조용히 문을 똑똑 두드렸지.
"룸메 없는 것 같은데.."
"보미 룸메랑 같이 살아?"
"응, 소아병동 간호사래."
"그럼 근무나갔나보다. 비밀번호는 몰라?"
내 말에 김종대가 나를 쳐다보며 바람빠지게 웃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여자야."
그래..니가 알고 있었으면 나 니 머리채 잡고 나갔을지도 몰라.
결국 보미를 우리집으로 데려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뒤에. 김종대 집으로 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김종대는 다시 우리집으로 걸음을 내딛었어. 백현이가 업겠다는 말에 미쳤냐며 격하게 거절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걸어.
"야, 종대야."
"다정하게 부르지마, 애 듣는다."
"그래, 야. 김종대."
"엉."
"너 보미랑 무슨 사이야?"
좀 확실하게 해보자. 너 누구 헷갈리게 하는 애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보미는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몰라, 나도."
기대와 다르게 김종대 입에서는 애매한 답변이 나왔고 나는 김빠진다며 입을 삐죽였어. 그 말을 끝으로 김종대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괜히 백현이 팔만 앞뒤로 흔들면서 우리집으로 향했어.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보미를 눕힌 김종대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나는 보미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준 채 문을 닫고 나왔어.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는 김종대를 보며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지. 뭐야, 무슨 사이야..
"쟤 내일 근무 뭐야?"
"데이.."
"데이?"
"응.."
"니가 하루만 대신,"
김종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변백현이 탁 소리나게 물컵을 내려놨고 나는 빠르게 변백현의 손목을 잡았어. 우리 식탁 깨지겠다.
"나도 내일 데이야."
"이게 어디서 남의 집 애를 부려먹으려고."
변백현이 맘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김종대를 쳐다봤어. 그 말에 김종대는 슬쩍 웃으면서 매정하다는 듯 변백현을 장난스레 노려봐.
"일단 우리 집에서 재우고..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보미 상태 보고."
"좀 쉬게 해줘."
"내가 쉬라고 해도 쟤가 안 쉴걸."
그런가, 김종대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툭툭 두들겼어. 아까 보미를 업고 오더니 힘들긴 했나봐. 짧은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삐리리-
그 때, 변백현의 콜로 추정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고 변백현은 미간을 부여잡았어. 이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가방 주머니를 뒤적거려.
"자기야아.."
"받아."
"나 퇴근한 지 3시간됐어.."
"김종대, 저녁 빵? 난 인턴이 사고쳤다에 건다."
내 말에 김종대는 픽 웃으면서 말했어.
"나도 인턴한테 건다."
뭐야아, 의미 없잖아. 징징대는 내 뒤로 변백현은 이미 신발을 구겨신고 현관을 나간 뒤였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리는 내 전화기에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어.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입 안 다물어?"
"야, 너네 병동 다 콜도는 거 아냐?"
"그런가.."
"쟤 휴대폰 꺼."
김종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미의 휴대폰이 울려댔고 김종대는 총알처럼 보미의 가방에 돌진해 벨소리를 죽여버렸어. 그리곤 무음으로 바꿔놓는 철저함까지.
"야. 김종대."
"응급이면 불러. 내가 대신 갈게. 저 몸으로 어딜 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쪽 전화나 얼른 받으세요."
아. 그제야 내가 울리고 있는 전화를 느릿한 손길로 눌러 받았고,
"여보세..뭐?"
울먹거리는 초롱이의 목소리에 나는 전화기를 떨어뜨려버리고 말았어.
"야, 야. 왜 그래?"
떨어진 휴대폰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현관으로 내닫는 내 팔을 김종대가 붙잡았고 나는 급한 마음에 손을 세게 뿌리쳤어.
"야, 왜? 응급이야? 윤보미 깨워?"
"..아니, 아니. 백현이 차 키..들고 나갔어?"
"차 키? 너네 차 키 어디다 놓는데?"
"차 키..차..아,"
내가 손을 달달 떨면서 차 키가 들어있는 서랍을 열었고 그 안에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는 차 키를 보고 나서야 나는 김종대의 손을 잡아 이끌었어. 너 운전 할 수 있지,
"빨리, 빨리.."
내 목소리에서 긴박함을 느낀 건지 김종대가 빠르게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고 나는 열쇠를 집어든 채로 김종대 뒤를 따라 내려갔어.
"백현이,"
차에 올라타서야 조금 진정한 내가 입을 뗐어.
"백현이 환자 익스파이어(사망)났대."
"뭐?"
"걔 저번에 자기 환자 어레스트났다고 정신나간 채로 운전했었단 말이야.."
그 때 기억이 나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어. 차 안 끌고 가서 다행이긴 한데,
"걔 병원까지 제정신으로 못가, 사거리 횡단보도까지 밖에 못갔을거야. 빨리.."
초롱이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어. 선배님, 변백현선생님 환자 코드블루 떴는데 CPR치다가 익스파이어 났어요. 인턴쌤은 쓰러질 것 같아요. 어떡해요.. 애써 고개를 휙휙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어.
"저기 변백현 아니야?"
"어디?"
"야, 야. 저 미친놈!!"
김종대의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 끼익-하며 세게 흔들렸어. 창문에 머리를 쾅 박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변백현이 창 밖으로 보였지. 백현이다.
"야, 타라그래. 미친 거 아니야? 차 쌩쌩 달리는데 어딜 뛰어들어!?"
백현이가 횡단보도를 그냥 건너려 했던 걸 김종대가 차로 백현이를 막은 거였어. 뒤에서는 우리 때문에 막힌 차들이 빵빵거리고 내가 내려서 뒷자석에 백현이를 구기듯 집어넣었어. 백현이는 정신이 반쯤 나가서 멍하니 내가 하는 대로 힘 없이 움직였어.
김종대가 대충 분위기를 눈치채고 엑셀을 쎄게 밟았고 금방 병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어. 백현이는 병원 앞에 도착하자마자 튕겨나가듯 차에서 내렸고 나도 백현이 뒤를 쫓아 숨이 차오르게 뛰었어.
"선배님.."
나랑 백현이가 도착한 병실에는 종인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CPR을 치고 있었어. 익스파이어라며..초롱이가 선배님, 하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말해.
"안 내려와요.. 내려오라고 해주세요.."
백현이가 터벅터벅 종인이한테 다가갔어. 초롱이가 다시 한 번 내 소매를 잡아끌어. 백현이한테라도 말해서 말려달라는 것 같았어.
"저러다 죽어요, 인턴쌤.."
초롱이가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엉엉 울었어. 백현이가 조용히 환자 몸에 수 없이 달린 기계를 하나 떼어냈어.
"김종인, 서."
그 와중에도 땀을 뚝뚝 흘리며 하나, 둘, 하고 있던 종인이가 백현이의 말 한마디에 환자 위로 푹 쓰려졌어.
"뭐해? 똑바로 일어서."
백현이의 냉랭한 말투에 초롱이가 들썩거리던 어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어. 백현이는 여전히 느릿한 손길로 기계를 하나씩 떼고 있었지.
"정신 안차리지."
그제야 종인이의 숙였던 고개가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나는 종인이의 초췌한 모습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어. 아까 초롱이가 한 말이 생각났어. 인턴 쌤은 쓰러질 것 같아요..
종인이가 백현이의 말대로 침대를 잡은 채 바로 섰어. 한 쪽 손으로 침대에 지탱한 모습이 정말 위태로워보였어. 백현이는 그런 종인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어.
"선고 내려."
그 말에 종인이가 떨리는 손으로 청진기를 집어 들었어.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꼬옥 감았어. 어쩌면 저렇게 백현이 인턴 때랑 똑같을까. 백현이도 인턴 시절, 처음으로 자기가 CPR치던 환자가 사망하던 날 레지던트 쌤이 그만 하고 사망 선고 내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진기를 집어들었었어. 기계는 이미 제거되어서 환자 심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거야. 백현이는 그렇게 청진기를 귀에 꽂고 환자 심장 부근에 청진기를 가져다대었었어.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에 가져다대고, 명치부근도 가져다 대보고. 그랬던 애처러운 백현이 모습이 생각나서 나는 종인이를 더 쳐다보지 못했어.
청진기를 집어드는 종인이를 백현이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어. 그렇게 몇 분 동안 청진기를 여기저기 필사적으로 대어보던 종인이는 추욱 늘어져버렸어. 침대에 간신히 두 손을 올리고 있는 상태였지. 초롱이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려버렸어.
"..정용철환자 7월 5일 오전 12시 16분 사망하셨습니다."
ㅡ
나 이제 착한 백현이한테 질려버린 것 같아...*_*..
사실 엄청 못된 의사 백현이가 메모장에 박혀있어요..
매일같이 소리지르고 달달 볶는 깐깐한 교수 백현이..
나 진짜..변탠가봐...
막 자기 밑에 있는 레지던트들 좀만 실수하면 불같이 화내고..근데 뒤에서는 감싸주고..
아무도 모르게 감싸주기..공과 사 확실한 병원 연애 백현이..병원 밖이랑 안이랑 다른 백현이..
흥앙..망상병만 늘어가는..
백켠...인스타에 왜 그런사진 올린거야...심장아파...
이제 완결을 내야죠. 암 그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