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7
전정국으로부터 연락이 온 뒤로 잠이 오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애써 잠을 청해보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정적 고백이다. 첫눈에 반했다며 번호를 요청했다. 앞으로 수 없이 많은 연락이 올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전제하에 연락을 다 받아쳐야 할지, 끊어야 할지. 이렇다 할 생각이 들지 않아 무작정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정수정에게 연락을 하려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마음이 급해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가장 맨 위에 있는 방에 무작정 들어갔다. 누나, 불편하세요, 번호 등등의 단어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고, 설마, 하며 상대방의 이름을 재차 확인해 보았다. 이미 읽어버린 카톡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답장을 하기엔 애매한 감정선,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어 다시금 카톡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 누나, 제가 불편하세요? 번호도 따고 그랬는데
- 연락하고 싶어서 그래요 누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저돌적으로 연락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일단 읽어버린 카톡을 1차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 몇 살인데 계속 누나라고 하세요?
- 누나 아니에요?
- 몇 살 이세요
- 아니 누나 몇 살 이세요
- 너 몇 살 이냐고요
- 저 18살이요
- ㅋㅋ
- 왜 그러세요
괜히 답장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누나가 아닌 동갑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 또 한 번 연락을 해야 한다. 별 볼일 없는 내용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친구 이상의 단계로 나아갈 확률이 어림잡아 80이다, 생각만 해도 지끈거려 오는 머리에 단단히 꼬여버린 감정들을 잠재우며, 눈을 감아 애써 잠을 청해야만 했다.
- 저 누나 아니에요.
/
시끄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오늘은 단축수업을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전해졌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수업을 억지로 듣다가, 어제 잠을 설친 탓에 계속해서 감겨오는 눈꺼풀에 결국 머리를 책상에 맞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난 건지 누군가 등을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을 찡그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정신이 들었다.
" 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이게 뭐야. "
" ...아, 미안. 나 얼마나 잤어? "
" 3교시 이후로 계속 잤어. 4교시에 쌤 안 들어와서 다행이지. "
" ...아. "
" 야, 오늘 밤에 비 온대. 너 우산 있냐? "
" ...나 우산 없는데.
비가 오려는 걸 재차 알리려는 듯, 찌뿌둥한 허리를 간신히 펴고 교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 고데기 등 외모를 가꾸는 데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손에 물을 묻혔다. 화장실에서 나와 손에 묻어있는 물기들을 탁탁, 털고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뭘 쳐다보는 건지 창문을 열고 멍을 때리고 있는 정수정이 의아해 어깨를 툭툭, 건들며 말을 건넸다.
" 뭘 그렇게 봐? "
" 우리 원우 오빠. "
" 뭔데? "
" 지금, 축구하잖아. 저기, 노란색 신발 신고 있는 사람, 원우 오빠. 저기. "
" ...아, 저 오빠구나. "
" 어떡해, 진짜 더울 텐데, 야. 매점 가서 음료수 하나만 사 와. "
" ...내가? "
" 아 빨리, 아 갔다와, 좀. "
아직 남아있는 물기를 손에서 털어내며 매점으로 향했다. 입을 삐죽 내민 채로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점심시간의 매점은 쉬는 시간과는 달리 고요했다. 여유 있게 매점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보이는 음료수를 하나 꺼내 들어 계산대로 향했다.
" 이거 얼마에요? "
" 이게... 어, 1800원. "
" 여기요. 아, 이것도요. "
부스럭 거리는 봉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계단을 올라 반으로 향했다. 역시나 멍을 때리고 가만히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정수정에 웃음이 픽, 하고 터져 나왔다. 정수정의 머리 위에 차가운 음료수를 올려놓자, 어깨를 들썩 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정수정을 향해 음료수를 던지듯 책상에 놓았다. 고마워, 하고 다시 축구에 집중하는 정수정을 가만히 쳐다보다, 나도 창문을 열어 밖을 쳐다보았다. 누가 누군지 분간도 잘 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정수정은 귀신같이 선배 만을 찾아내는 것 같았다. 눈에 망원경이라도 달린 건지, 선배가 오른쪽으로 뛰어가면 고개도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고개도 왼쪽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선배가 다른 선배의 발에 걸려 넘어졌고, 정수정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얘도 영락없는 여고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졌다.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정수정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 뭘 웃어, 넌 지금 오빠가 넘어진 게 웃겨? "
" 아니, 너 지금 완전 귀여워. "
" ...뭐야. "
" 근데 너 음료수는 언제 전해 주려고? "
" 헐, 내려가자. "
" 어? "
냅다 손목을 잡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 복도를 가로질러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는 정수정에 의해 넘어질 듯 말 듯 계단을 뛰어갔다. 야, 좀 천천히 가. 내 말은 무시한 채 운동장을 향해달려가는 정수정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포기한 채로 운동장을 향해 달려갔다. 스탠드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정수정을 노려봤다. 왜, 뭐. 또다시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스탠드 중앙으로 향하는 정수정의 행동이 기가 차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탠드에 흩뿌려져 있는 흙을 손으로 가볍게 털어낸 후 스탠드에 앉아 축구를 구경했다.
운동에 대해선 무지했던 탓에, 금세 질려 정수정을 툭툭, 건드렸다. 건드리지 말라는 듯 손을 쳐내고 다시금 축구에 집중하는 모습이 괘씸했다. 축구가 끝난 뒤 선배들이 우리 쪽을 향해 몰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정수정이 벌떡 일어나 음료수를 들고 스탠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손짓에 내키지 않는 몸을 일으켜 정수정에게로 향했다. 느리게 걸어가는 선배의 뒤를 쫓아 숨을 죽이고 걸어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정수정의 등을 떠밀곤 얼른 조회대 옆으로 몸을 숨겼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 건지 정수정에게 말을 건네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너 2학년 맞지? "
" ...네. "
" 이름이, 수정인가? "
" ...어, 이거 드세요. "
" 어? 아, 고마워. "
" ...안녕히 가세요. "
" 저기. "
" ...네? "
" 고마워, 잘 마실게. "
/
* Ep 8
수업이 끝난 후 핸드폰을 돌려받아 알림을 확인했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그간 있었던 가십거리를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정수정의 목소리가 들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밖으로 향했다. 너 그 전정국이라는 남자애랑은 어떻게 됐어, 몰라, 걔 싫어. 왜, 잘생겼다며. 그냥, 남자랑 말하는 거 어색해. 정수정과 전정국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간 외로운 감정이 자주 들긴 했지만, 남자와 연락을 하는 게 익숙지 않았던 탓에 전정국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무작정 내뱉었던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올려보며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 순간 화면이 검게 변하며 뜨는 낯선 번호에 심장이 철렁했다. 단순한 광고 전화로 단정 지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짜증이 났다. 다시한 번 전화를 끊자 또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오기가 생겼다. 다시 한 번 끊으려고 하는데, 뭐 하냐는 정수정의 물음과 함께 어깨가 밀렸고, 손가락이 미끄러져 그만 전화를 받아 버렸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짙은 한숨 소리에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었다.
" ...여보세요? "
" ... "
" 전화를 거셨으면 말ㅇ... "
" ㅇㅇㅇ. "
예상치 못한 전정국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얼른 주워 혹여나 전화가 끊어졌을까 걱정하며 다시 스피커에 귀를 갖다 댔다. 왜 그러냐는 정수정의 말도 무시한 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스피커 속 음성에 집중했다.
" ...그. "
" ... "
" 시간 있어? "
" ...응. "
" ...어, 지금 만날 수 있어? "
전화를 끊자마자 손에 힘이 풀려 또 한번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곧장 핸드폰을 주워 흙을 털며 재차 이유를 묻는 정수정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 ... "
" 아니, 너 왜 그래? "
" ...전정국이 나보고 시간 있녜, 만나자는데. "
" 그래서? "
" ...어떡해? "
" 뭘 어떡해, 만나야지. "
" ... "
"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몇 시에? "
" ...ㅇㅇ카페 앞에서, 지금. "
" 바로 앞이네. "
" ...어떡해? "
" 뭘 어떡해, 나 간다. "
" 가지 마, 수정아. 가지 마. 야, 아 나 어떡해... "
/
정수정이 떠난 후, 그러니까 전정국과 전화를 끊은 후 약 10여 분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냥 갈까, 말까. 수 없이 고민을 반복한 끝에, 약속을 해 놓고 얘기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불안한 마음으로 커피숍 앞을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들을 툭툭 차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수정은 나를 왜 밀쳐 가지고, 이게 다 정수정 때문이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핸드폰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손에 잡혀 꺼내려 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 ...안녕. "
" ... "
" ... "
" ...응. "
/
공기의 흐름마저 어색하다, 괜히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해보니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지금까지 나눈 얘기라곤, 우리 아빠의 치부를 밝힌다거나, 피시방 알바가 많이 힘들지 않냐거나, 누나라고 오해해서 미안하다거나,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들뿐이었다. 급식도 먹지 않았던 탓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싶어 얘기를 꺼내려는데,
" ㅇㅇㅇ. "
" ... "
" 밥 먹으러갈래? "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말이라도 꺼낼 듯 진지하게 이름을 불러놓곤 고작 하는 얘기는 밥 먹으러 가자는 시답잖은 얘기. 마침 배가 고팠던 터에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했다. 분식집으로 향햐는 동안에도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괜히 재채기를 한다거나, 연락할 사람도 없으면서 카톡 하는 척,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
분식집에 도착하자마자 얼굴을 타고 오르는 열기에 저절로 눈이 감아졌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주방의 열기에, 여기가 고깃집도 아니고,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 얘기를 나누시는 어르신들 하며, 에어컨에 큰 글씨로 써져있는 ' 고장 '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아 김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도 아무 얘기도 주고받지 않았다. 곧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김밥이 나왔고, 배가 고팠던 탓에 나도 모르게 개처럼 먹다가, 문득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어 TV를 보는 척 전정국을 쳐다보았다.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 채 가만히 있는 전정국의 시선이 신경 쓰여 남은 한 줄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혹여나 입에 음식물이 묻은 건 아닐지 휴지를 잔뜩 뽑아 입술을 닦아 내었다. 내가 먹지 않는 동안에도 김밥에 젓가락을 댈 생각도 하지 않는 전정국이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정이 떨어진 게 아닐지, 그럼 다행인데.
밖으로 나와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비가 오려는 건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아직 밤이라고 칭하기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 말없이 걷는 와중에,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 ...날씨가 많이 덥다. "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전정국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더운 날씨는 전혀 아닌데,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얼른 고개를 피했다.
생각의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 ...저기. "
" 어? "
" 너 내가 진짜 좋아?
내가 내뱉은 말이었지만, 퍼뜩 정신이 들어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으로만 의문 짓던 말들을, 무심결에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 응. "
" ...왜? "
" 그냥, 처음에 피시방에서 너 보고, 일부러 표 뽑는 것도 아는데, 모르는 척하고, 일부러 피시방도 몇 번 더 가고, 화장실 안 가도 되는데 일부러 너 얼굴 보려고 키 받으러 가고, 형들이랑 피시방 갔을 때도 일부러 컵라면 시키고, 되도않는 연기하면서 관심 끌고. "
" ... "
" 그냥 너 보고 싶어서 피시방 문 앞에서 기웃거린 적도 있고, 너희 아버지가 계실 때는 그냥 가고, 너 찾기도 하고, 번호도 따고 먼저 연락도 하고···. "
" ... "
"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근데 너는 나 싫어하잖아. "
" ...왜? "
" 카톡 답장도 안 해주고, 말투도 차갑고, 그냥 나 싫어해요. 관심 없어요, 티 내잖아, 너. "
" ... "
"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밖에서 만나보고 싶어서 부른 거야. "
갑자기 내비쳐지는 진지한 모습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잠깐 스쳐가는 인연 정도로 생각할 줄 알았다. 사뭇 진지한 모습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아, 분위기 이상하다. 못 데려다 줄 것 같아. "
" ...어? "
" 여기서 집 가깝지, 혼자 가. 미안, 내가 괜히 불러내서. 잘가. "
" ...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전정국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뒤편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런 단어도, 말도 떠오르지 않아 입만 달싹거리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내리는 서늘한 빗줄기에 당황해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우산을 살까 싶어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언제 사두었던 건지 주머니에는 초콜릿과 핸드폰,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뿐이었다. 버스를 탈 돈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집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점점 억세지는 빗줄기에 신발은 이미 흠뻑 젖어 양말 속을 파고 들어와 찝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할까 싶어 화면을 켜 보았지만, 배터리가 나간 건지, 갑자기 먹통이 돼 켜지지 않는 핸드폰에 절망감만 늘어났다. 상가 속 문에 작게 비치는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이미 많이 젖어버린 머리에, 교복은 흠뻑 젖어 속이 비치고 있었고, 가방도 흠뻑 젖어버려 훨씬 더 무거워진 어깨에 허리가 아파왔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그치면 나가야지, 싶어 몇 분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지만, 그치긴 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는 빗줄기에 한숨만 푹푹 내쉬다,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들어 다시 걸어갈 채비를 했다. 속으로 셋을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가 무작정 뛰는데, 거세게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추위에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더 이상 몸을 적셔오지 않는 빗줄기에 천천히 고갤 들어 앞을 쳐다보는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 ... "
" 아, 존나 힘들어. "
" ... "
" 넌 겁도 없이 거길 왜 뛰어 들어가냐, 너 무슨 건물인지는 알고 저기 들어갔냐. "
그 말에 뻣뻣하게 굳어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건지, 처음 보는 술집들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번쩍거리는 간판 속 휴게텔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고, 다시금 이어지는 전정국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 내가 너 이름을,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ㅇㅇㅇ, 존나 빠르네. "
" ... "
" 저기, 저기서 신호도 안 바뀌었는데, 너 쫓아가느라, 나 차에 치일 뻔했어. "
" ... "
" 옆으로 붙어, 우산 하나밖에 없어. "
" ... "
" 칠칠맞게 뭐냐 이게, 다 젖었네. 안 춥냐? 너네 집 어디야? "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걸어갔다. 묵묵히 걷는 전정국의 옆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창문에 비친 전정국과 나의 형상은 가히 처참했다. 둘 다 흠뻑 젖어 걷는 중간중간 기침을 내뱉는가 하면, 걸을 때 마다 아래쪽에서 나는 질퍽거리는 소리와 촉감에, 찝찝했다. 우산이 하나 뿐 이었기에, 의도치 않게 붙어 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살짝살짝 스치는 팔이 간지러웠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았다. 얘기를 나누지 않은 채로 묵묵히 걷기만 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손톱만 물어뜯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쉴 새 없이 움직였던 발을 멈추었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우산이 걷혀지며 그림자도 걷혔다.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은 채로, 그렇게 서 있었다. 언제 이렇게 오랜 시간 마주보고 서 있을 정도로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된건지, 연락을 다 밀어 낼 거라며 굳게 다짐을 했던 며칠 전의 내가 생각이 났다. 생각과는 반대로 어느새 전정국과 나는 처음과는 꽤 다른 관계의 감정선을 가지고 있었다.
" 너 지금 진짜 못생겼어. "
" ... "
" ...장난인데, 나 이제 가도 돼? "
" ...아. "
" 간다. "
" 아, 정국아. "
" ... "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성격이 무뚝뚝한 탓에 고맙다는 표현이나, 사랑한다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잘 내뱉지 못해 오해를 샀던 적이 많았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정국아, 하고 이름을 부른 것도 모른채, 마음이 급해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아까 샀던 초콜릿을 꺼내어 내밀었다.
" ... "
" ... "
언제 다 녹아 버린 건지, 포장지를 뚫고 나와 흘러내릴 듯 내용물을 뱉고 있는 초콜릿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걸 왜 내밀었지,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 ...이거 나 먹으라고? "
" ... "
" ...고마워, 나 이제 간다. 조심히 들어가. "
실소를 터뜨리며, 내 손에서 초콜릿을 가져가는 전정국의 모습이 멀어졌다. 아까와 같이 걸어가는 전정국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결국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 했다. 다 녹아버린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하지 말 걸 그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벽에 축,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끊임없이 생각났고 오늘로 인해서 전정국과의 사이가 좀 더 가까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었다. 그게 다였다, 전정국을 이성으로 생각 한다거나,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친 몸을 이끌며 집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고,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물을 맞고만 있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부러 물을 더 세게 틀었고,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말리고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많이 젖어버린 탓에 바로 빨아야 했기에 주머니의 모든 내용물을 꺼냈다. 치마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종잇 쪼가리가 만져졌고, 곧바로 꺼내어 보니 언제 찢어진 건지 아까 전정국에게 건네었던 초콜릿 포장지의 일부가 뜯어져 있었다. 머리가 또 지끈거려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와 몇 마디 나누는 것도 어색한 나였기에, 더 이상 인연을 만들면 안될 것 같았다. 감기몸살에 걸린 건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여 교복을 모두 던져놓고, 침대 위로 쓰러지듯 기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먹었던 김밥이 체한건지, 메스꺼운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결국 화장실에 들어가 음식물을 모두 게워냈다. 입을 헹군 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거실로 나왔다. 두통약을 꺼내 삼켜, 정신을 차린 후 핸드폰을 다시 켜 그간의 알림을 확인했다. 눈앞이 뿌예져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오는 기침을 애써 참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내게 씌워주며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숨을 고르던 전정국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마음을 확실시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전정국이라는 걸 직감한 채로, 걸려오는 전화를 끊어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해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예전과는 달리 이미 마음속 한 켠에 박힌 전정국과의 기억이 자꾸만 생각났다. 곳곳에 남아있는 그간의 기억을 무시한 채,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 내용상 형제라면과 카톡, 스토리가 좀 바뀌었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이게 무슨 급전개,, 여주는 맨날 잠만 자네요.
글이 갑자기 진지 해졌네요. 역시 저는 진지한 건 안 어울려요...ㅋㅋ 이게 무슨 망글이람..
다음 화부터 진도 좀 더디게 나갈 듯싶어요, 철벽도 더 심해질 것 같고,,
과제 하면서 메모장에 있던 거 틈틈이 옮긴 글이라 오늘은 분량이 좀 짧아요, 죄송합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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