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14
강한 부정은 긍정의 의미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 이치이다. 지금 나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 중이다. 라디오가 끝난지 몇십여 분이 지난지 오래였지만,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낯간지러운 가사들이 머릿속에 박혀 책을 덮은지 오래였고, 입을 벌린 채 앞 친구의 등판만 멍하니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야자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집에 가자며 어깨를 툭툭 치는 정수정을 가만히 쳐다보며 눈만 깜박거리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디오에 소개된 자신의 사연을 들었냐며 신나게 얘기하는 정수정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 마지막에 소개된 사연 너랑 비슷하지 않아? "
" ...안 듣고 잤는데, 뭐였길래? "
" 어떤 남자가 자기를 쫓아다니는데, 뭐 자기도 그 남자가 좋아졌다는 사ㅇ... "
" 좋아진 거 아니야. "
" ... "
" 아니, 다른 여자랑 같이 있으면 신경 쓰이고 연락 없으면 불안하다, 이걸 좋아하는 거라고 치부하지 마. 너가 그 여자애 마음을 어떻게 알아? "
" 뭐야, 자느라 안 들었다며. "
" ...들리긴 들렸어. 그리고, 내 상황이랑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나 전정국 안 좋아해. "
" 그렇게 따라다니는데 관심이 없어? "
" 없어. "
집에 도착해 교복도 벗지 않고 가방을 집어던져 침대에 풀썩 누웠다. 파란 불이 깜박거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막상 화면을 키고 보니 무슨 행동을 해야할 지 몰라 엄지손가락을 액정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핫토픽 키워드는 ' 짝사랑 ' 이었다. 미쳤나 봐, 핸드폰을 멀리 던지고 셔츠 단추를 풀며 거실로 나와 TV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 소개팅에 나가실 때, 남자친구나 좋아하는 남성을 만날 때 이렇게 간단한 메이크업을 통해,
- 네, 여성분의 고민인데요, 관심이 가는 남자가 생겼는데,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궁금해요.
- 이 제품은요. 남성분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많이들 입는 제품이신데요, 어깨선이 드러나는,
- 수컷 하이에나가 암컷 하이에ㄴ...
리모컨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소파에 기댔다. 하필 오늘 나오는 프로그램도 죄다 사랑, 사랑, 사랑에 관한 얘기다. 쿠션을 팡팡 내리치며 한숨을 내쉬다, 탁자 위에서 거세게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머리를 귀에 꽂아넘기며 문자를 확인했다.
- ㅇㅇㅇ님 대출 기한 1일 남으셨습니다.
내가 책을 빌렸던 적이 있었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며칠 전 전정국에게 빌려주기 위해 내 이름으로 대출했던 연애서적 몇 권이 생각났다. 책 달라고 이 야밤에 전화를 걸 수도 없고, 학교에 찾아갈 수도 없고, 원래 빌린 사람이 갖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콧바람을 내뱉으며 전정국을 씹었다. 첫눈에 반했다면서 번호를 따 놓고, 연락은 몇 주 전에 끊긴지 오래였다. 전정국 때문에 버스도 놓치고, 체해서 토를 하질 않나, 비도 홀딱 맞는 바람에 몸살도 걸리고, 남자들한테 망신을 당하질 않나. 생각할수록 들춰지는 전정국과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 Ep 15
" 뭘 어떡해, 야자 째고 학교 찾아가야지. "
" 내가 거길 왜 가. "
" 그럼 뭐 어떡하게, 너 전정국 어디 사는지 알아? "
" ...몰라. "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책상을 발로 두어 번 세게 찼다. 어찌 됐건 전정국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책을 받으러 가는 거니까, 다른 의도는 없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전정국이 다니는 학교의 위치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며칠 전 전정국이 나를 데려다주었던 길 반대편으로 가서, 전정국에게 전화를 한 뒤 책을 받으면 끝나는 일이다. 수업 중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이미 안중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몇 시간 뒤 일어날 전정국과의 상황의 파노라마가 그려졌다.
치어스, 출장으로 인해 당분간 종례를 반장이 하게 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석식 시간인지라 교문 경비가 덜한 틈을 타 학교를 빠져나왔다. 몇 주 전 전정국이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았던 탓에 전정국이 다니는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짚으며 반대편에 위치한 학교로 향했다. 한참을 걷자 학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학교가 끝난 지 한참 지나 하교하는 학생이 없는 건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교문 앞을 서성거리며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학교를 나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 혼자 다른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앞을 지나가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여학생들, 귓속말을 짓거리며 지나가는 남학생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전정국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고개를 푹 떨구고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남자친구를 기다리냐며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애써 웃어 보였다. 꽤 많이 지난 시간에 다리가 저려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언제 외워버린 건지 전정국의 휴대폰 번호를 막힘없이 입력하였다. 전화를 걸까, 고개를 푹 숙이며 뒤를 돌자 부딪히는 어깨에 죄송합니다, 대충 사과를 건네는데,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 ㅇㅇㅇ? "
" ...너, 책 빌려 간 거 이제 줘. "
"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구나. "
" 그럼 뭐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오겠어. "
" 간다. "
책을 바닥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전정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책을 건네받으려 내밀고 있던 손이 머쓱해 주먹을 쥐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주워들었다. 가장 맨 위에 있는 책을 열어보았다.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질투심 유발, 스킨십의 필요성, 관계 유지, 제목만 보아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얼른 책을 덮었다.
/
" 이거 반납이요. "
" 아, 다시 대출할 수 있어요? "
아까 보았던 낯간지러운 제목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 결국 책을 또한 번 대출했다. 절대로 누구를 유혹하기 위해, 꼬시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다. 그냥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다. 의자를 끌어 앉아 책상에 책을 내려놓았다. 새빨간 표지가 시각을 자극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여는데,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신경질을 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을까, 잠시 고민하다 끊길 생각 없이 애처롭게 울리는 전화에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 집 앞으로 나와
다짜고짜 집 앞으로 나오라는 목소리에 얼이 나간 상태로 끊긴 전화의 번호를 확인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번호였다. 책장을 넘기던 손을 떼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정말 겨울이 다가오려는 건지 후드티에 이리저리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며 바지를 갈아입었다. 머리를 매만지면 매만질수록 볼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놀이터 그네에 가만히 앉아있는 전정국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위치한 벤치에 살며시 앉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전정국의 눈길을 무시했다. 사람을 불러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철없는 애도 아니고, 살풋 웃으며 그네를 타는 전정국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 ...왜 불렀어? "
" 그냥. "
" 들어간다. "
" 야. "
일어서는 내 팔목을 다시 잡아 옆자리 그네에 앉히고는, 축 처져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머리에 씌웠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벤치에 앉으며 모자를 벗는데, 다시금 모자를 씌우는 전정국의 행동에 힘이 빠져 가만히 앉아있었다.
" ...야, 그냥 하는 말이니까 무시해. "
" 어? "
" 모자 쓰면 잘 안 들리잖아, 그냥 무시해. "
" ...뭐라는 거야. "
" 내가 요 며칠 너 안 따라다녔잖아. "
" ... "
" 내가 그, 책을 읽어봤는데, 여자한테 너무 잘해주면 그 여자가 싫어한대. "
" ... "
" 질린대, 싫증 나고 그런다는거야. "
" ... "
" 오늘 교문 앞에서 너 봤을 때 존나 놀랐거든. "
" ... "
" 근데 너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또 치대면 너가 나 더 싫어할 것 같아서 좀 싹수없게 굴긴 했어. "
" ... "
" 내가 책 던진 거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어, 나도 놀라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
" ... "
" 그리고, 너 집 갈 때 내가 너 따라간 거 눈치챘어? 도서관 밑에서 기다리고 그랬었어. "
" ... "
" 집 들어갈 때까지 쫓아다니다가 심심해서 너 불렀어, 귀찮았지, 미안. "
" ... "
" ...괜히 지랄했네, 고백하기도 벅찬데. "
" ...그 사람이 뭐래? "
" 어? "
" 니가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뭐 어떻게 될 거래? "
" ...관심 가지고, 질투도 나고. 그런다는데. "
" ... "
" 안 믿어, 관심은 무슨. "
" ...순 엉터리다. "
" ... "
" 그런 짓 하지 마, 난 너가 뭘 하든, 연애 칼럼니스트 글을 읽고 뭘 하든 너한테 관심 없어, 저런 글 믿는 게 이상한 거지. "
" ... "
" ...추워, 집 들어가. "
새빨개진 볼을 들킬까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일어나자마자 손목을 잡아 옆자리 그네에 앉히는 전정국이 괘씸했다. 손을 뿌리치고 다시 일어나는데, 아예 두 팔로 그네를 잡아 가둬버리는 전정국의 행동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해, 쿵쾅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정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모자를 벗기는 손길에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실실 웃으며 볼을 매만지는 전정국의 손을 쳐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얼굴을 쓸어대는 전정국에 얼굴이 터질 듯 화끈거렸다. 그네를 잡고 있던 전정국의 팔을 밀쳐 전정국에게서 빠져나왔다.
" ...지금 뭐 해? "
" 볼에 머리카락 붙어있길래, 떼줘도 저래 까칠하네. "
" ...떼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거든. "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는 전정국을 뒤로한 채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화끈거리는 볼을 애써 잠재우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느새 따라나와 손을 맞잡는 전정국의 행동에 간신히 잠재웠던 얼굴이 또 한 번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손을 맞잡은 채 전정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줍은 듯 빨개진 귀를 만지며 전정국이 내게서 손을 떼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계속해서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헛기침을 내뱉으며 내 손톱을 매만지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 내가 그동안 계속 너 쳐다보면서 느낀 건데, 손톱 물어뜯는 거, 좀 고쳐. "
" ... "
" 손톱이 이게 뭐냐. "
" ... "
" ...시간 늦어서, 갈게. "
활짝 웃으며 반대편으로 향하는 전정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전정국이 한참을 매만지던 손톱을 들어 눈앞에 갖다 대었다.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패인 손톱들이 눈에 들어왔다. 축 처진 어깨를 간신히 지탱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쯤 되면 적응할 만도 한데,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텅 빈 집이 어딘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아까 읽던 연애 서적이었다. 감겨오는 눈꺼풀을 부릅뜨며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엎드려 누워 책을 폈다. ' 너무 다가가면 질리는 게 당연한 거예요, 가끔씩은 차갑게, 모질게 대하세요 ' 전정국이 읽었다던 부분이, 이 부분인 것 같았다. 오글거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책장을 넘겼다. 졸린 눈을 쉴 새 없이 비비며 책을 읽어나갔다. 계속해서 감겨오는 눈꺼풀에,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읽지못한 채 책 위에 얼굴을 묻고 잠에 들었다.
+) 이 급마무리는 뭐야,,,, 이번 화 분량 역대급이네요, 진짜 짧은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진짜 미안해요
분위기가 이게,, 아 그리고 후속작?... 랜선연애가 끝나고 쓸 글잡 쓰고 있어요 ! 분위기 좀 차분해요.
예전에 독방에서 투표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멤버가 제일 많더라구요..! 그래서 그 멤버로 쓸 예정입니다,
그 글이 또 끝나면 이제 형제라 면에서 한 명 또 골라서 나머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해요.
아 그리고 다음 편부터 진도가 엄청 많이 나갈 것 같아요. ㅠㅠㅠㅠㅠㅠ 노여움 푸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그리고 심각한 건 아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좀 생겼어요 ㅠ
노트북에 써놓은 거 있어서 업데이트가 늦어지지는 않을텐데, 혹여나 조금 늦게되더라고 양해 부탁드려요 ㅠ
독자님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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