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12
회의가 있어 야자를 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책상 위에 가만히 엎드려 학교가 끝난 후 생긴 오랜만의 시간에 잔뜩 들떠있었다. 오늘도 먼저 가라는 정수정의 말에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땅히 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기엔 싫고, 그렇게 하염없이 길가를 거닐다 자주 가는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걱정과는 달리 도서관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귓가에 그대로 박힐 정도로 고요했다. 발뒤꿈치를 들어 살살 걸었다. 도서관 구석,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책상에 가방을 살짝 올려놓은 후 책을 한 권 가져왔다. 한참을 책만 읽은 탓에 뻐근해져오는 어깨를 돌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책을 살짝 덮고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언제 이렇게 변한 건지, 많이 달라진 외향이었다. 무음으로 해두지 않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가 들을새라 서둘러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여보세요
- 어디야
다짜고짜 어디냐고 묻는 목소리에 귓가에서 휴대폰을 떼어 번호를 확인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전정국이라는 걸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 도서관
- 어디 도서관
- 왜
- 그냥 물어보는거야
- ...□□도서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끊겨버린 전화에 기분이 상했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하며 도서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참이 흘러 지루해진 시간에 책을 다시 덮었다. 손가락을 튕기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다시 꺼내들어 자리에 앉았다. 이쪽으로 향하는 발소리도 듣지 못한 채 책에 열중하다가, 누군가 내 앞의 의자를 끌어 앉았을 때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 와, 존나 청순하다. 책 좋아하는 여자애가 내 이상형인데. 어, 교양 없어보이는 여자애들은 좀 싫더라. "
" ...너가 여길 왜 와? "
" 너 보려고 온 거 아닌데, 책 읽으러 온 거야. "
" 왜 하필 내 앞에 앉아. "
" 그냥. "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전정국에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며 책에 눈길을 돌렸다. 책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전정국의 움직임이 신경이 쓰여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 ...가만히 좀 있어. "
몇 초간 눈을 마주치다, 핸드폰으로 입을 막고 웃기 시작하는 전정국이 짜증이 났다. 아예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끅끅대며 웃는 전정국에 사람들이 나를 흘겼다. 창피함이 몰려와 가방을 챙겨 자리를 일어났다. 곧바로 따라 일어나는 전정국을 무시하며 2층으로 올라가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옆에 앉는 전정국의 뻔뻔한 행동에 기가 찼다. 문제집을 꺼내들어 풀기 시작했다. 문제만 푸는 내가 지루해진 건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전정국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집 위로 던져진 사탕을 집어 들며 고개를 들었다.
" 공부하면 당 떨어져. "
" ... "
" 아 맞다, 너가 오늘 준 거 아직 안 먹었다, 전에 다 녹은 거 그것도 아직 냉장고에 있어. "
" ...먹으라고 준 건데. "
작게 고마워, 하고 다시 문제에 집중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만히 쳐다보기란 고역이었다. 아예 몸을 내 쪽으로 틀어앉은 전정국이 부담스러워 머리카락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 오늘은 알바 안 가? "
" 응. "
" 그럼 언제 가는데? "
" 날마다 달라, 주말은 거의 항상 가고 평일은 갈 때도 있고, 안 갈 때도 있고. "
" 너 안 지루해? "
" ...뭐가? "
" 너 30분째 그 페이지만 푸는 거 알아? "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문제집을 쳐다보았다. 풀이과정이 가득해야 할 문제집 속에는 언제 그린 건지 쓸데없는 낙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 얼른 문제집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마땅히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을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울리는 경보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알만 굴리는 전정국에게 다가갔다. 가방끈을 붙잡고 구석으로 들어가 전정국의 가방 지퍼를 열었다. 가방을 열자마자 보이는 연애서적 몇 권에 할 말을 잃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듯 앞머리만 매만지는 전정국을 올려다보았다.
" ...이걸 그냥 가져오는 사람이 어딨어. "
" 가져와도 되는 거 아니야? "
" 당연히 빌려야지. "
" 아, 대출증 없는데. "
" ...기다려. "
전정국의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데스크로 향했다. 소란을 피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끌끌 차며 바코드를 찍는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책을 던지듯 내려놓는 사서의 행동에 구시렁대며 전정국에게 향했다.
" 1주일 안에 다 읽어. "
" 이걸 어떻게 다 읽어. "
" 그럼 읽지 마. "
" 너가 빌렸는데 어떻게 안 읽어. "
" ...너가 알아서 해. "
* Ep 13
주말의 아침은 상쾌했다. 축축 처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머리를 간단히 올려 묶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알바라 설레기라도 하는 건지, 그간의 날과는 달리 피시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과 전정국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첫눈에 반했다며 말을 걸어오는 남자는 가차 없이 차 버릴 거라고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많이 달라진 나의 태도에 조소를 띄웠다.
여느 때와 같이 피시방에 도착해 카운터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피시방에는 사람이 적은듯싶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꺼져버린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에 전정국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미쳤나 봐,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구석에서 게임을 하고있던 초등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괜스레 민망해져 의자를 끌고 카운터 구석으로 들어가 알림 한 통 없는 핸드폰을 켰다. 시간이 꽤 흘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슬리퍼를 끌며 안에서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안녕히 가세요. "
" 저기요, 나 알지? 전에 전정국이랑 같이 왔었는데. "
" 아, 그 가해자... "
" 어? "
" ...아, 아니에요. "
" 맞다, 너 전정국이랑 썸타? "
" 그런 거 아니거든요, 혼자 넘겨짚지 마세요. "
" ...와, 싸가지 없다. "
" 그런 말 많이 들어요. "
다짜고짜 자신을 아냐고 묻는 남자에 적잖이 당황하여 가만히 서있었다. 전정국과 함께 왔었다는 말에 눈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어보니, 전정국에게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던 남자가 생각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말을 내뱉었다. 급속히 어두워지는 남자의 낯빛에 아무렇지 않은 척 코를 매만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전정국과 썸을 타냐고 묻는 남자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곧이어 싸가지가 없다는 남자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건넸다.
" ㅇㅇ고 다닌다며, 인물 새고 샌 새끼들 존나 많던데, 전정국 좆됐네. 어제부터 계속 같은 지역끼리는 전학 못가냐고 지랄을 하길래. "
" ... "
" 전정국 인기 존나 많아, 여자애들 줄 섰어. "
" ...네. "
" 야, 전정국 그냥 끊어, 존나 이렇게 질질 끌다가 크게 데인다. 싫어하는 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
" 가지고 논 적 없어요, 말 가려서 하세요. "
" 좋다고 따라다니는 새끼 버리긴 아깝고, 그렇다고 사귀기는 싫고, 아니야? 불쌍하지도 않냐? "
" ...관심 없어요. "
" 전정국은 얘가 뭐가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냐. "
어이가 없다는 듯 짜증을 내며 피시방을 나서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말을 막 뱉어버렸다.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막말을 내뱉는 남자에 짜증이 났다. 내가 뭐 어때서, 뭐가 좋냐고 따라다니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술을 한껏 내밀며 카운터 의자에 몸을 축 기대어 앉았다. 세차게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보았다. 눈길을 돌리자 보이는 무리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갈 때마다 풍겨오는 담배 냄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내뱉으며 지나가는 무리에 속으로 혀를 찼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껌을 씹으며 지나가는 전정국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 같았으면 의자를 끌어와 쉴 새 없이 말을 건다던지, 내가 알던 전정국과는 다른 모습에 괜스레 위축되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전정국이 의아했다. 주말 새에 정이 뚝 떨어지기라도 한건지, 선반에서 컵홀대를 여럿 꺼내었다. 사람이 많이 줄어든 탓에 피시방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스를 한 잔씩 주라는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컵에 주스를 따랐다. 고개를 내밀어 안을 쳐다보았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건지 키보드를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4명, 컵 두 개를 손에 간신히 쥐어 안쪽으로 향했다. 숨을 죽이고 다가가 키보드 옆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다시 카운터로 향해 컵을 들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전정국의 정수리에 긴장이 되어 손이 덜덜 떨려왔다.
" 저기요. "
" ...ㅇ, 네? "
" 나 주스 안 좋아해요. "
" ...그냥 드세요. "
" 싫어요. "
" 그럼 가져갈게요. "
" 싫어. "
키보드 옆에 주스를 내려놓자마자 몸을 의자에 축 기대는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못 본 척 나가려는데, 손목을 세게 잡아오는 전정국에 하는 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짜고짜 주스를 싫어한다는 전정국의 말에 멍을 때렸다. 아려오는 팔목에 이곳을 빠져나가려 컵을 다시 손에 쥐어 손목을 빼는데,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무리들에 얼굴이 화끈거려 도망치듯 카운터로 향했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소란스럽게 욕설을 내뱉으며 카운터를 지나가는 무리가 보였다.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놓쳐 손톱만 물어뜯으며 모르는 척 컴퓨터만 바라보는데, 평소와는 달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피시방을 나서는 전정국이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
시끄러운 시계를 차버린 게 화근이었다. 정수정의 전화를 받으며 일어난 광경은 가히 처참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이불과 베개, 언제 빠진 건지 바닥에는 건전지와 알람시계가 나뒹굴고 있었다. 교복을 입으며 세수를 했다. 며칠 전 사둔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대충 욱여넣으며 집을 나섰다. 켁켁거리며 막히는 가슴을 두드리며 빠른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지나치듯 스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애써 못 본 척 지나쳤다. 화장실에 들어가 이름도 모르는 후배의 빗을 빌려 머리를 빗었다. 엉켜 서로 꼬인 머리카락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머리를 빗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교실로 향했다.
" 선생님 아직 안 오셨어? "
" 어제 출장 간다고 했잖아.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
" 왜? "
" 존나 못생겼어. "
" 하루 이틀이냐, 괜히 뛰어왔네. 나 매점 갔다 올게. "
허기진 배를 달래려 매점을 가기 위해 치마를 정리하며 자리를 일어났다. 쉬는시간처럼 소란스러운 남자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매점으로 향하는데, 어깨가 세게 돌아갔다.
" ㅇㅇ야, 너 페북에 걔 누구야? "
" ...너 나 알아? "
" 와 시발, 존나 서운하다. 1학년 때 옆반이었잖아. 나 기억 안 나? "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슴 부근을 쳐다보니, 김지원이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 ...아. "
" 너 페북에 전정국이라는 남자애, 아는 애야? 남친은 아닐 거 아냐. 나 걔좀 소개해주면 안돼? "
" ... "
" 존나 잘생겼길래, 우리 학교는 꼴초 새끼들밖에 없잖아. 한 번 만나보려고. 번호 좀 쳐봐. "
" ... "
" 아 맞다, 예쁜데 나 싫어하는 애, 이거 뭐야? 정국이가 너 좋아해? "
" 너 전정국 알아? "
" 아니, 모르니까 번호나 치라고. "
"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 진짜 생각 없어 보여. "
" 뭐? "
" 그리고 전정국 너 같은 애 싫어해. "
젓가락으로 반찬을 헤집다, 문득 아까 내뱉은 말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급식에 나온 제육볶음과 전정국의 얼굴이 겹쳐 보여 큰 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무시한 채 발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 수정아, 너 김지원 알아? "
" 존나 유명하지. "
" 왜? "
" 3학년에 송호범 선배 알아? 그 선배 꼬셔서 여친이랑 헤어졌잖아, 그리고 뭐, 몸 굴리고 다닌다는 얘기도 돌던데, 근데 너가 그걸 왜 물어봐? "
" ...아니, 그냥 궁금해서. "
/
3학년과 체육수업을 같이 한다는 말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강당에 모여 보이지 않는 분계선을 두고 갈라서 있었다. 피구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한숨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강당 바닥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선배들을 가만히 쳐다보다, 3학년과 엮이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눈길을 거뒀다.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정수정을 두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강당을 걸어 다니는데, 어깨를 찌르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지민 선배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 혼자 뭐 해? "
" 그냥... 할 거 없어서요. "
" 쌤이 코트 앞으로 모이래, 빨리 와. "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팔짱을 끼며 째진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선배들의 눈길을 애써 무시했다. 못 본 척 발목을 돌리기도 하고, 더 이상 빗을 것도 없는 머리를 하염없이 빗다가, 짝피구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빗질을 그만두고 앞을 쳐다보았다.
" 3학년 키순으로 서고, 2학년도 키순으로 서. "
몸을 느리게 움직이며 키순으로 자리를 섰다. 6번째, 눈대중으로 옆에 서있는 선배들을 흘겨보다, 내 짝은 지민 선배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
지민 선배와 짝이 된 덕에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다. 보상이라나 뭐라나, 냉장고에서 꺼내주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석식을 먹지 않고 교실에 앉아있었다. 야자를 하지 않는,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가만히 쳐다보며 책상 위의 손가락을 두드렸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박수를 한 번 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가는 정수정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감겨오는 눈에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 야 ㅇㅇㅇ, 너 이거 써. "
" ...이게 뭔데? "
" 오늘 학교 라디오 하잖아, 사랑에 관련된 사연인가? 그거 써서 내면 사탕 하나씩 준대. 아, 그리고 채택되면 커플 뭐 준다는데. "
" ...쓸 거 없는데. "
분홍빛 포스트잇을 매만지며, 다른 한 손으론 별 볼일 없는 볼펜을 돌리다가, 도저히 쓸 게 생각나지 않아 다시금 책상에 엎드렸다. 볼펜을 책상에 쿡쿡 찌르며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짝사랑이나,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빈 포스트잇을 채워나갈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열심히 써 내려가는 정수정을 쳐다보다 볼펜을 쥐어들어 몇 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르륵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며 책을 읽었다. 그 순간 시끄러운 소음이 한 번 울리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해 책을 덮었다. 형식적인 인사멘트와, 기지개를 펴며 정신을 차리는 반 친구들, 거울을 쳐다보며 화장을 고치는 여학생들, 행여나 선생님이 들어올까 곁눈질로 눈치를 보며 휴대폰 게임을 하는 남학생들,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학년 남학생의 사연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귀여운 고민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는 남학생들에 한쪽 귀를 막았다. 두 번째 사연은 3학년 여학생의 사연인데, 서슴없이 애정표현을 내뿜는 남자친구가 부담스럽다는 배 아픈 사연이었다. 한숨소리와 동시에 간간이 욕설도 들려왔다.
세 번째 사연은 2학년 여학생의 사연이었다. 좋아하는 3학년 선배가 있는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속상하다는 사연이었다. 운동하는 선배가 너무 멋있다는 둥, 편지는 잘 받았냐는 둥,잘 생겼다는 둥, 끝없이 이어지는 자랑에 혀를 차며 다시 책을 들었다. 갑자기 커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원우오빠 좋아해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익명의 사랑고백에 복도와 교실은 함성으로 가득찼다. 확 달라진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시끄러워진 상황에, 정수정 혼자만 입술을 물어뜯으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웃음을 터뜨렸다.
네 번째 사연은, 3학년 남학생의 사연이라고 했다. 며칠 전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후배가 한 명 있다고 한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굴리는 모습이 귀여워 첫 눈에 반했단다. 어느새 교실은 탄식으로 가득했다. 그 후배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데려다줘도 고맙다는 얘기는커녕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단답을 하거나, 인사를 건네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네, 아니요, 왜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여자인 것 같아 내심 마음에 찔렸다. 조만간 고백을 할 것이라는 말과 동시에 교실은 또 한 번 함성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 다섯번째 사연은 2학년 여학생의 사연이라고 했다. 슬슬 지루해지는 분위기에 한 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방송 소리가 커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한숨을 쉬며 이어폰을 정리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요즘 들어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가 한 명 있는데, 처음엔 그게 그렇게 싫어서 차갑게 대하고, 대놓고 싫은 티도 냈지만 요즘은 뭐가 씌인 건지 밥 먹다가도 얼굴이 겹쳐 보이고, 말을 걸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다른 여자가 관심이라도 가지면 정색도 하고, 질투라고 하기엔 애매한 감정도 든다는 고민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써낸 사연 같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그대로 전해졌다. 나의 감정을 내가 아닌 스피커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 기분이란 참으로 오묘했다. ' 좋아하는 감정이에요, 부정하지 마세요. 그분이 마음 돌리기 전에 잡으세요. 괜히 되도 않는 철벽 치지 마시구요. ' 라는 목소리를 끝으로 방송이 종료되었다.
눈을 깜빡 거리며 방금 전 흘러나온 멘트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좋아하는 감정이에요, 부정하지 마세요. 코웃음을 치며 저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단정 짓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몇 분 동안 같은 문단만 계속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덮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진부한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잘 보이지 않는 액정을 몇 번 눌렀다. 또 사랑 노래다. 아무리 넘겨도, 넘겨도 나오는 건 짝사랑, 사랑, 사랑 노래뿐이었다. 노래마저 왜 이러는 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 노래에 신경질적으로 이어폰을 빼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어 손을 꺼냈다. 전정국이 내게 건네었던 오렌지맛 막대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빡이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새콤한 맛이 입에 퍼졌다. 이어폰을 다시 꺼내들어 귀에 꽂자마자 아까 듣던 사랑 노래가 새어 나왔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는 걸 애써 부정하며 깨지지 않는 사탕을 하염없이 깨물었다.
+) 네 번째 사연은 과연 누굴까요 ㅎ,,ㅎㅎ,,
쓰차가 걸려서 글을 못 올렸어요 ㅠㅠ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글 전체적으로 수정할 예정이에요
예전에 썼던 거 ctrl c ctrl v 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서 올렸던 거라 글이 좀 어색해요
그리고 삭제한 부분도 많아서 글이 되게 뜬금없고 이상하고 그랬을 거에요 다 알아요,,,
오늘부터 전체적으로 수정할 예정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하트
++) 여러분 저 피시방에서 잠깐 나오는 재수없는 남자 태형이에요
미워하지 마세요 ㅠㅠㅠㅠㅠㅠ 지금만 좀 차갑게 나오는거에요 ㅠ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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