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 아저씨, 있잖아요. 오늘 엄청 이상하고, 특이하고, 근데 또, 그 모습이 잘 어울리는 애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막 제 앞에 서서 이상한 포즈로, 봐봐요! 딱 이 자세! 이 자세로 씨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 아저씨가 말한 또라이 같은 사람이 여기 있구나. 대학 들어와서 또라이란 또라인 다 본 것 같은데 아직 내가 알아가야 할 또라이가 남았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얘랑 또 마주친거 있죠. 밥 먹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제 앞에 앉아서 돼지처럼 마악 먹더니 리필을 해서 오는 거예요. 아아, 그리고 또 있었어요! 오늘 김규태 만났거든요…… 근데 걔가 엄청 멋있게 엿먹여 줬어요! 아저씨가 그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아저씨, 자요? 내 말 듣고 있어요? "
" 미안. 밤새 작업하느라 집중을 못하겠네. "
" 밤샜어요? 그럼 이제 자요. 내가 너무 오래 있었다. "
어쩐지 피곤해 보인다 했더니. 혀를 끌끌 차며 소파에 누워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아저씨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아저씨가 바람 빠진 웃음을 뱉으며 하얀 손으로 내 손을 치우곤 눈을 마주치며 물음을 던져온다.
" 새로 사귄 친구야? "
" 음…… 글쎄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
*
" 김OO! 죽여! "
" 뭘 죽여요. "
" 죽여 준다고! 오늘만 해도 등록한 애들이 벌써 열 명이야! "
동아리 모집이 시작되었다. 정문을 기준으로 나란히 하얀 천막을 쳐놓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는 신입생들을 꼬드겨 천막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게 최우선의 목표였고, 그 다음 자연스럽게 가입 신청서를 내미는 게 두 번째 목표였다. 호석 오빠가 그런 건 또 잘하지. 원래 가입하려고 했던 나를 꼬드겨 들어오게 한 게 호석 오빠였고, 그 다음 낭창하게 학교 생활을 물으며 가입 신청서를 내밀더라. 그게 아직도 생생한데 내가 이 천막 안에서 기타를 들고 있다. 그것도 제법 선배 포스를 풍기며. 잔뜩 들뜬 호석 오빠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저 이제 그만 가볼,
" 어? 씨걸! "
" 어? 씨걸? "
씨걸이었다. 오늘도 역시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환하게 웃고 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 아직 친구 사이라고 정의를 내리기 애매한 사람.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걸치고 손을 흔들었더니 굳이 꼬드기지 않아도 천막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다. 내 바로 옆에 있는 기타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더니 이내 신입생들이 앉아야 할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기타를 든다.
" 기타 쳐요? 기타? 딩기리딩딩? "
" 네, 기타 쳐요. 근데 거기 신입생들이 앉는 곳인데. 재학생은 여기. "
" 나 신입생인데? "
" 네? "
신입생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학생식당에서 본 그의 모습은 절대 신입생의 모습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리필하는 그 모습 하며, 신입생인데 혼식이라니. 경악한 표정을 본 건지 만 건지 개구지게 웃고는 기타 줄을 쓸어내린다. 코드 하나 잡지 않은 기타 본연의 소리가 좋았다. 오늘을 위해 호석 오빠가 기타를 제대로 조율한 게 틀림없다.
" 기타 쳐요? 여기서? "
" 기타 동아리예요. "
" 와, 짱 멋있네. 짱! "
" 네, 짱. "
" 이거 가입 신청서 맞죠? "
설마 가입하려고? 갸우뚱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여전히 웃음을 걸치고 있는 씨걸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모나미 볼펜을 하나 들어 가입 신청서에 이름을 적기 시작한다. 전. 정. 국. 딱 스무 살 남자애 같은 글씨에 웃음이 나왔다. 겨우 한 살 차인데도 이제 고딩 딱지를 뗀 게 어찌나 티가 나는지 귀여웠다. 나도 딱 저 마음을 가지고 가입 신청서를 적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아마 그땐 내 옆에도 친구가 있었다.
*
" 너 수업 안 바꾸니? "
" 내가 수업을 왜 바꿔. "
"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야, 너 작년에 네가 한 짓 생각 안 나? "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앞에서 알짱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겨우 이런 일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김규태의 여자 친구. 그리고 내 과거의 친구.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저 눈 때문에 울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아저씨가 그랬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네가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그래서 털어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 애를 나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려 했다. 그랬더니 정말 깔끔하게도 이를 악 물며 눈물을 참아야 하던 날들이 점점 줄어들더라.
" 생각. 안 나. "
" 허, 이거 미친년이네. 야, 너…! "
" 생각. 안 난다고. "
" …야, "
" 생각. 안 나니까 그만하라고. "
잔뜩 당황스러운 표정에 부끄러움이 더해져 울그락불그락한 저 얼굴이 얼마나 우스운지 내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너를 올려다보는 걸 관두고 고개를 숙여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덕분에 주변을 조용했고, 졸지에 아웃사이더인 나에게 무시당한 그 애는, 그러니까 한때 내 친구였던 김연주는 한참을 나를 노려보다 굽 소리와 함께 떠났다.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가슴을 졸이고 졸이다 겨우 내뱉은 한숨이었다. 매끈한 책 표지 밑에 단정하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OO. 한참을 그 이름만 쳐다보았다.
*
" 자, 모집 기간이 끝났고! 신입생 환영 파티만 하면 되겠지? "
" 전 안 가요. "
" 아, 왜! 네가 안 가면 누가 가라고! "
" 돈도 내야 하지, 술도 마셔야 하지. 뭐 좋다고 가요. "
" 돈은 내가 회장의 이름으로 까주면 되지, 술 대신 사이다 마시면 되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용~히 말로 할 때 가자? "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 붙잡고 안식처 찾아왔는데 더 이상 동방은 내 안식처가 아니었다. 척 봐도 파릇파릇해 보이는 신입생들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라색 쇼파를 차지해 앉았고 눈치를 보면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 어지러워. 이전의 것에 갈증을 느끼며 테이블에 올려진 생수통을 집어들었다.
" 어디 가? "
" 물 뜨러 가요, 물 뜨러. "
호석 오빠의 물음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은 생수통을 흔들었고 오빠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녀와, 공주! 웩. 무슨 남친 코스프레람. 호석 오빠의 기분이 아주 좋을때, 가끔 한 달에 한 번쯤? 튀어나오는 호칭이었다. 몇 년을 알고 본 아저씨도 그렇겐 안 부른다. 웩. 다시 한 번 토하는 시늉을 하며 동방 문을 열었다. 정수기가 동방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이거 하나는 편했다. 동아리 이름은 로맨틱 스트리트 1번진데 동방 문을 연 순간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은 게 흠이지만.
생수통 입구를 정수기에 갖다대고 있는데 마침 물을 마시려던 사람이 흔히 정수기 옆에 달려 있는 종이컵을 찾는다. 여긴 늘 종이컵 같은 거 없었는데. 신입생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좆같네.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욕을 뱉는다. 입이 험한 사람이구나. 잔뜩 사린 채로 정수기에서 생수통의 입구를 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어쩐지 옆이 따갑다.
" 저기. "
옆을 보니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너무 잘생겨서 헉. 너무 무서워서 한 번 더 헉. 혹시 종이컵이 없어서 기분이 나쁜데 내가 생수통을 들고 물을 받고 있어서 더 기분이 나빴나? 잔뜩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리며 겨우겨우 눈을 맞추는데 그 남자의 입이 금방 열린다.
" 내가 컵이 없는데. "
" ……그래서요? "
눈썹을 살짝 찡그린 그의 눈이 잠시 날카로워진 것도 같다. 내 물음에 눈을 한 번 내리깔고는 나와 다시 눈을 맞춘 남자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호의적인 눈에 당황해 눈을 크게 뜨는데 남자의 입이 다시 열린다.
" 컵이 없다고요. "
" 네, 컵이 없…, 아 이거 드실래요? "
감사. 재빠르게 물통을 뺏어든 남자가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일렁이는 목울대를 따라 나도 물을 삼키는 것처럼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누가 보면 변탠 줄 알겠다. 다시 눈을 내리깐 나를 힐끗 본 남자가 물통을 건넨다. 눈치는 더럽게 없네. 한 마디 툭 내뱉은 남자가 나를 지나쳐 가는데 목적지가,
우리 동방?
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떡 적혀 있는 동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누가 보면 수십 번 정도는 들락날락거린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문이 서서히 닫히고 동방 안에선 그를 부르는 것 같은 얇은 목소리가 쨍하게 울려퍼진다.
" 야! 김태형! 어디 갔다왔어! "
정국학개론 |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 이 글을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요. 독자님들도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늘 사랑해요.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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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 암호닉 넣어 주시지 않으면 제가 못 찾습니다! 암호닉 신청할 때 꼭 [] 안에 넣어 주셔야 해요!
그리고 전남좋 때 신청해 주셨던 분들 다 기억하니까 기억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p.s. 댓글에 씨걸이 필터링이 되나 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