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아저씨, 있잖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 아빠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공장 냄새만 가득한 날엔 서랍에 라면도 꽉 채워두시고, 공부하라고 가끔 지우개도 사오시는 거 있죠. 아, 어제는 치킨도 먹었어요.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눈물이 다 날 뻔했잖아요. 그래서요. 그냥 조금 더 살아보려고요. 나 없으면 아빠는 혼잔데 제가 어떻게 나가요. 지금 힘든 거 조금만 더 버티면 아빠도,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
" 씨걸. "
" 네? "
" 씨걸 몰라요? 씨걸. "
멀쩡하게 생겼는데. 내 앞을 막고 서 있는 어린 남자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는 사인가, 싶어도 벌써 몇년째 아는 남자라고는 아빠와 아저씨밖에 없는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아, 동아리 선배들이랑. 등교길, 뜬금없이 내 앞에 나타나 이상한 자세를 취하며 한 마디 내뱉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른쪽 무릎을 들고 양 팔을 벌려 손을 꼿꼿하게 내린 그 모습이 꼭 새와 같아서 갸우뚱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새……? "
" 아, 그거 말고요. "
자세는 꼭 새였거든. 잔뜩 실망한 것 같은 표정에 덩달아 나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아침 수업이라 여기서 이상한 남자애랑 노가리 깔 시간 없는데. 품에 안은 전공책들을 한쪽 팔로 들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분침이 10과 11의 사이에 머물러 있는 걸 확인하고는 안 그래도 동그랗다고 아저씨가 많이 놀리는 눈을 더 동그랗게 말아올렸다. 미안한데 저 먼저 갈,
" 야! 전정국! "
여전히 새와 같은 자세를 취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옆으로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이 달려와 남자의 등짝을 세차게 때린다. 아프겠다. 요상한 자세를 취한다고 들고 있는 저 다리보다 등짝이 더 아프겠다.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다 잠시 잊고 있었던 1교시 수업을 다시 떠올렸다. 또라이 새끼니, 뭐니 앞에서 온갖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먼저 갈게요. 꾸벅 목만 살짝 숙이고 걸음을 빨리했다.
근데 씨걸이 뭐지?
*
" 화장으로 가린다고 그게 가려지겠냐? "
" 왜요. 그래도 아무도 몰랐어요. "
" 어? 오늘은 누가 말 걸디? "
" 아니요. 그럴 리가. "
김OO. 올해 스물하나.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행정학과. 꿈이란 건 잡을 수 없는 것, 진로는 공무원. 어쭙잖게 기타 동아리 들어서는 이젠 제법 코드 정도는 잡을 수 있는 실력. 동아리 활동만 죽어라 하는 탓에 과에서 아웃사이더.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과에서 아웃사이더라서 동아리 활동을 죽어라 하는 편.
정호석. 올해 스물다섯. 졸업반인데도 정신 못 차리고 동아리만 들락날락거리는 오빠. 보통은 삼학년들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는 편인데 굳이 자기가 하겠다며 우기고 우겨서 무늬만 회장인 짓 하고 있는 한심하지만 따뜻한 사람. 컴퓨터공학과. 근데 진로는 아직 못 정했단다. 저게 말이야 방구야. 그래도 꿈은 있단다. 그 꿈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오빠라면 뭔가 이뤄낼 것 같아서 기대된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 아저씨만큼이나 늘 날 걱정해 주는 사람.
" 어디 봐봐. "
" 어제 약 바르고 자서 오늘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
" 그렇게 맞으면 안 아프냐? "
" 그러게요. 영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
웃지 말라며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통통 두드린 오빠가 구석에 놓여 있는 수많은 기타들 중 제일 앞에 있는 기타를 잡았다. 공부는 안 해요? 졸업해야죠. 내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책꽂이에서 악보를 꺼내 펼친다. 책꽂이에는 악보보다 동아리 선배들의 전공책이 더 많이 꽂혀 있는 것 같은데 굳이 고르는 건 악보다. 컴퓨터에 별 흥미도 없는 사람이 왜 그런 과를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행정학과의 1도 모르던 내가 행정학과를 들어간 것과 같은 맥락인가.
기타를 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저렇게 기타를 쳐야지, 하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훅 지나가 있었고 저렇게 기타를 치기는 개뿔, 칠 때마다 버벅대며 코드를 잡는 게 끝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엔 잡지 않은 지 오래되어 겨우 잡아두었던 굳은살이 말랑해졌다. 그래도 작년까지만 해도 내 유일한 낙이었는데.
" 아, 맞다. 야, 이제 동아리 모집 기간인데. "
" 신입생들 들어올까요? "
" 명색이 기타 동아린데 안 들어오고 지들이 어쩔 거야? "
" 안 들어온 학번 여기 있네요. "
오빠의 눈이 축 쳐졌다. 동시에 어깨도. 말 그대로였다. 승승장구를 달리는 정도는 아니라도 나름 기타 동아리의 구색을 갖출만큼 사람수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 동아리는 딱 우리 학번에서 인원 미달을 겪게 되었다. 사실 우리 동아리가 인원 미달을 찍게 된 건 밴드부와 합창부의 탓이 컸다. 우리 학교에선 밴드부, 합창부 아니면 동아리도 아니다, 하는 소문이 많이도 퍼져 있었는데 그런 밴드부가 무슨 속셈인 건지 인원을 늘렸고, 합창부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겠다며 모집 조건에 기타를 넣는 게 아닌가. 호석 오빠가 분한 마음에 항의도 하고, 욕도 먹고 참 뭔갈 많이 하긴 했는데 끝은 그랬다. 결국 우린 인원 미달.
밴드부와 합창부가 성과가 꽤 좋았던 건지 그 패턴을 유지했고 걱정이 되는 건 결국 호석 오빠였다. 적정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폐부될 게 뻔했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동아리가 걱정이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 아니, 너네 학번은 공부만 하냐? "
"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던데. "
" 누가 기타 잘 치래? 아니, 그냥 놀러와서 얼굴 한 번 비추고 가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어?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
" 있는 부원도 나가겠어요. "
" 넌 안 돼. 넌 내 대를 이어야 한다. "
" 아, 정말 싫다. "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다시 축 쳐져서는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동아리가 없어지면 아웃사이더의 입장인 나도 곤란하긴 한데. 지금 4학년이 졸업하고 나면 동아리 인원도, 동아리를 찾아올 인원도 얼마 되지 않을 게 뻔한데. 테이블에 턱을 괴어 기타를 쳐다보았다. 사실 여길 들어오게 된 건 아저씨의 공이 컸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저씨가 졸업한 학교를 들어가라며 적극 추천하더니, 들어오게 된 후엔 이 동아리를 적극 추천하더라. 호석 오빠한테 물어봤더니 이 동아리를 아저씨가 만들었다고 한다. 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한창 유럽 여행을 갔다와서는 낭만에 젖어 지은 이름이라며 지금의 아저씨는 오글거림에 몸서리를 치던데.
" 오빠, 재학생도 받는 건 어때요. "
" 웬 재학생? "
" 동아리 모집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오디션 보는 동아리 떨어진 애들은 다른 동아리 신청도 못해보고 끝났잖아요. 혹시 알아요? 밴드부, 합창부 떨어진 애들이 우리 동아리 다시 들어올지도. "
" 야, 너,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이다. 걔네가 버린 거 주워먹는 것 같은 기분이 좀 들긴 한데 그래도 의견 좋다, 야. 역시 에이스. "
시원하게 손바닥을 건넨 호석 오빠와 영혼 없이 손바닥을 마주치고는 다시 턱을 괴었다. 언제부터 내가 에이스였는지 금시초문이었지만 쳐져 있던 어깨가 뽕을 넣은 것 같이 든든해진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웃고 말았다. 졸업반 맞아?
*
" 안녕. "
바쁜 일이 있는데 혼자 먹을 수 있겠냐는 호석 오빠의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안 괜찮다고 하면 무거운 마음 꾹 안고 갈 게 뻔한데.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저어 오빠를 보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밥을 혼자 못 먹겠어? 오빠는 연신 미안하다며 걱정되는 표정을 짓고는 내 손을 꼭 쥐었다. 누가 보면 우리 친오빤 줄 알겠어.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 동아리실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첫째, 나는 따뜻한 밥 종류를 먹고 싶다. 둘째, 1인분은 배달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로 학생식당을 선택했다. 애들이 잘 먹지 않는 시간이니 안심하고 갈색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숟가락을 들었는데 어딘가 들어본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온다.
" 밥 혼자 먹어요? "
" 아, 네, 혼자 먹네요. "
" 전 혼자 못 먹는 찌질이니까 앞에 좀 앉을게요. "
씨걸이다. 오늘 아침 요상한 자세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사람. 그의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상또라이. 멀쩡한 사람이 왜 저럴까, 싶다가도 문득 씨걸이 궁금해져 코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인터넷을 켰다. 잘 잡히지 않는 와이파이에 폰을 살짝 흔들었더니 거짓말처럼 페이지가 뜬다. 씨.걸.
이게 무슨 개소리지. 영어단어였나, 싶어 단어를 눌러 확인하려는데 나오라는 단어 뜻은 나오지 않고 온갖 예문만 나오길래 스크롤을 내려 확인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에 코를 박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씨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 거, 밥 먹을 땐 밥만 먹읍시다. "
꼭 공장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저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건지 은근하게 느껴져오는 능글거림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가 웃어버렸다. 아저씨와 호석 오빠 이외의 남자와 말을 해 본 것도,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은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휴대폰에 떠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씨걸이에요, 씨걸.
" 갈매기? "
씨걸이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살짝 스친 손이 따뜻했다. 코트를 입어도 될 정도로 쌀쌀한 날씨에 하얀색 무지티 한 장에 다리를 훤히 내보인 여름 패션임에도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손에 당황하기도 잠시. 밥을 오물거리다 눈썹을 요상하게 움직이던 씨걸이 다시 폰을 건네주었다.
" 뜻을 물어본 게 아닌데. 모르면 됐어요. "
다시 숟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뒤에 수업 있나. 천천히 좀 먹지. 먹으면서도 여기저기 흘리는 모습에 쟁반이 왜 필요한가 했더니 세상에 이런 애도 있으니 쟁반이가 필요하겠구나 싶다. 바닥이 보이는 씨걸의 그릇에 덩달아 나도 다급해졌다. 씨걸이 가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건데. 분주한 씨걸의 손놀림을 따라 내 손도 분주해졌다. 빨리 먹고 같이 자리를 떠야지. 그리고 곧바로 동아리실로 가면 되는 거야.
씨걸이 밥을 다 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입에 밥을 가득 담고 씨걸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설마 진짜 예의 없이 밥만 먹고 가는 거야? 나 두고? 눈빛에 애절함을 담으려 노력하는데 씨걸이 쟁반이 아닌 그릇을 들고 배식받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릇을 쟁반에 올려두는데 밥이 수북하다. 얼굴을 갸우뚱하자, 씨걸이 검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며 코를 찡긋거린다.
" 리필. "
" 아……. "
돼지다. 돼지 갈매기. 꽤 수북한 그 밥을 이번엔 천천히 먹는다. 리필 받으려고 그렇게 빨리 먹었나. 숟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던 내가 괜히 머쓱해져 여유롭게 움직였다. 밥 한 번, 국물 한 번, 김치도 한 번. 씨걸이 입에 밥을 가득 담고는 돼지처럼 웃길래 나도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환히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늘 아저씨한테 말할 게 하나 늘어났다. 말해줘야지. 돼지 갈매기를 보았다고.
" 이야, 김OO 남자 친구신가? "
익숙한 그 목소리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라 일부러 그와는 수업도 겹치지 않게 피해서 다니곤 했는데 이런 데서 그의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새 마주치지 않아 둔감했던 탓일까.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흔들리는 내 눈을 본 씨걸의 시선이 내 뒤에 닿았다. 얼굴을 보면 정말 기절을 할지도 모르겠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가 나를 지나쳐 테이블에 손을 얹는 게 느껴진다.
" 김OO가 어떤 앤지 알면 놀라서 도망갈 텐데~ 얘가 남자 친구 사귈 입장은 아니거든요. "
" 남자 친구 아닌데. "
" 아아, 썸? "
" 썸도 아닌데. "
" 그럼, "
" 내 말은. 딱히 이 여자에 대한 평가를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인데. "
꼭 감은 두 눈. 눈을 보지 못하니 소리가 선명해지는 걸까. 씨걸의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벌써 두 번째 반가웠다. 첫째, 밥을 혼자 먹고 있는 내 앞에 앉았을 때. 둘째, 지금.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내 옆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말문이 막힌 듯 했다. 때로는 당연한 말이 사람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나 보다.
" 그것도 당신한테. "
" ……. "
" 내가 씨걸인데. 그쵸? "
눈을 살며시 떴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여전히 손을 떨려왔지만 그건 부여잡고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씨걸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씨걸이지. 어쩐지 가슴이 조금 아려온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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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로 돌아왔어요! 스토리를 미리 생각해뒀는데 글 쓰면서 계속 변경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시험 끝내고 돌아와서 더 즐거운 마음으로 글 쓰겠습니다! 전 화(프롤로그)에 댓글 적어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암호닉은 [] 요기 안에 넣어서 신청해주세요! 요기 안에 안 넣으면 제가 찾지 못해요 ㅠㅅㅠ 전 화(프롤로그)에서 신청해 주신 분들 1화에서 새로 신청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하뚜 정국이도 하뚜 p.s. BGM ~ Oshio Kotaro - Close To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