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청춘 보고서 ::
02
우리 집 옆에 김태형이 살았다면 우리 집 위에는 박지민이 살았다. 박지민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불알친구만큼이나 가깝게 지내는 친구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하여튼 기억도 잘 안 나는 오래 전에 우리 집 위에 이사를 왔다. 박지민과의 첫 만남은 그닥 특별하지 않았다. 박지민은 이사 떡을 돌리러 우리 집에 왔고 나는 당연히 김태형인 줄 알고 무방비 상태로 문을 열어 주었다. 다 늘어난 티셔츠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 대충 묶은 똥머리에 떡진 정수리. 문을 열고 그게 김태형이 아닌 낯선 남자애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는 동공 때문이었다. 나는 급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수 천 개, 수 만 가지의 물음표와 느낌표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쟤는 누구지? 우리 집에는 무슨 일? 내 나이 또래 갔던데, 망했어! 헐, 나 브라도 안 하고 있었어! 미친! 따위의 것들. 그런 생각들로 나는 현관에 주저앉아 절망을 하고 있었고, 조금 지나지 않아 현관 밖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윗집에 새로 이사 와서 떡 주러 왔는데...여기 앞에 두고 갈게.”
오 마이 갓. 왓 더 퍽! 맙소사. 윗집이라니. 앞으로 자주 마주치겠구나.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뻔 했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지만, 그 나이에는 왜 그렇지 않은가. 이성에 막 눈을 뜨고 이성에 예민한 그런 시기인지라 불특정 다수의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껏 꾸미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녀스러운 척도 해 보고. 그런데 그런 시기에 내 치부를 낯선 또래 남자애에게 들켰다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이 다 어디 있겠는가. 뭐, 지금은 그 날 일 때문에 김태형만큼이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문제는 박지민이 아직도 그 날 일로 틈만 나면 놀린다는 게 문제랄까.
“너 또 김태형이랑 싸웠지? 니네는 나 부르는 일이 둘이 싸웠을 때 뿐이냐?”
“아니거든. 이번엔 안 싸웠어.”
“그럼 뭔데?”
“김태형 시발새끼.”
“에이, 싸웠네. 싸웠어.”
“아니라니까! 아, 됐어. 너도 똑같아. 김태형같은 새끼.”
“야, 동급 취급은 하지 마라. 오빠야 쫀심 상한다.”
“오빠야는 개뿔, 니가 언제부터,”
“야야, 김태형 온다는데 뭐라해?”
“뭐? 안 된다 해. 무조건 안 된다 하라고!”
“집 앞이라고 문 열라는데?”
맙소사.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지금 꼴이 딱 그렇다. 물러설 곳은 없다. 우리 집이 9층인데, 지민이네 집은 우리 집보다 무려 2.5미터 더 높다. 여기서 창문 열고 뛰어 내렸다간 앞으로 내 예쁜 각선미를 뽐내지 못할 수도 있다. 잘못했다간 저 세상 가는 건데 김태형 하나 때문에 그런 무모한 짓은 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좆을 까시오! 그 때 내 눈에 보인 건 옷장이었다. 그래, 저기라면 숨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야! 박지민! 나 옷장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김태형 빨리 집에 보내. 알겠지?”
“뭐? 야, 거긴 안ㄷ, 야!”
옷장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집 앞이라던 걔. 집 앞이라니까 문 열라던 걔. 그래, 김태형.
“니가 뭔데 여기 있냐.”
“내가 먼저 와 있었는데 니가 온거거든.”
“존나 어이 없네. 쥐새끼처럼 숨어서 다 듣고 있으니까 좋냐?”
“야, 말은 똑바로 해. 너도 여기 숨으려고 여기 문 연거 아니냐?”
“그거야, 니가 앞이라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얼굴 마주치기도 싫어하냐?”
“뭐?”
“툭 까놓고 말해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너 피해 다니고 너한테 뒤에서 욕먹어야 되냐고.”
삐딱한 김태형의 시선 끝에 걸린 내 동공에 물기가 어렸다. 저걸 멍청하다고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존나 못 됐다고 해야 되는 건지 감도 안 온다. 아, 차라리 오지 말걸. 고등학교 친구나 만나서 술이나 진탕 마실걸. 백번 그럴걸.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하면 다시 받아줄 의향은 있었는데 김태형은 그걸 제 발로 보기 좋게 차 버렸다. 차 버린 건 김태형인데 왜 나만 아파해야 되는 건지 억울했다. 거봐, 너 말 못하잖아. 라며 당당하게 옷장에서 기지개를 펴고 나오는 김태형의 잘난 면상에도 나는 입술만 깨물 뿐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성대인지 식도인지 부풀어 올라 숨을 내뱉기도 힘들었다. 동공에는 물기가 끝없이 차오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져버렸다. 싸늘한 공기가 견디기 힘들어 나는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잡아오는 박지민의 손을 내쳤다. 나, 이제 정말 친구 없는 건가.
집으로 가는 계단 스무 개, 서른 발자국이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또 있었나. 자꾸만 시야가 흐려지는 게 짜증이 났다. 짜증스레 눈을 비비니 눈가 살이 쓰라렸다. 진짜, 김태형 때문에 이게 다 뭐야.
*
“뭐야, 지민이 형네 간다며. 왜 벌써와?”
“남이사.”
“왜 또 울고 지랄이래.”
“지랄?"
“뭐.”
“내가 니 친구야? 개새끼야!”
“야, 소리는 왜 지르는데.”
“누나 소리 안 붙여?”
“지랄.”
내가 아무리 12월 30일에 태어났대도 지보다 누나인데 꼬박 꼬박 하극상 부리는 이 새끼는 우리 이모 아들, 전정국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보다 덩치 작아서 내가 이겨 먹었었는데 이제 이겨 먹지도 못하겠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었나, 갑자기 키가 훅 크더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무슨 운동을 한다고 근육까지 덕지덕지 붙여 놨다. 이제 무서워서 건들지도 못 했는데 오늘은 진짜 건들면 죽여 버릴지도. 이 김에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눈앞에서 깝죽대는 게 오늘 쟤든 나든 둘 중 하나 장례 치뤄야지 싶다.
*
전정국한테 말했다. 쪽팔리게도 대학교까지 와서 이상한 소문에 휩싸여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근데 김태형 그 새끼가 내 편은커녕 소문 믿고서 나한테 뭐라 한다고. 전정국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와, 성이름이? 그딴 일로 울기도 해 이것도 가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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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시발. 너 아까 뭐? 동급 취급하지마? 나 다 듣고 있는데 존나 그런 말 잘한다?" "그건 진짜 기분 나쁘니까 그렇지. 내가 너랑 동급 될 클라스냐?" "당연히 아니지. 내가 너보다 잘생겼지, 키도 크지, 인기도 많지." "그대 못생겼어요." |
작가의 주저리 |
오늘도 조각...스러운 분량...죄송...ㅎ합니다..헤... 겁나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어요. 뭔가 1화 2화 합쳐야 원래 1화 분량이 나와야 될 것같은... 몇 화까지 쓸지... 그냥 작가를 때려 죽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