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죄송합니다!"
빛과 같은 속도로 사과하고 다시 뛰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크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아…."
뛰어가다 자신과 부딪힐 때 남자가 들고 있던 커피 한 방울이 크리스 소매 끝에 튀었다. 그것을 확인한 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깔끔함의 미학 00
아침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크리스는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자신이 항상 출근하던 시간 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래도 다른 직원들에 비해 일찍 간 것이긴 하나 크리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비서를 지나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본부장실의 문이 닫혔다.
"내 다크서클 좀 봐."
"너 어제 또 잠 안 잤어?"
커피를 쌓아놓고 마셨다. 아침에도 먹었어. 말을 하면서 책상에 엎드리는 종대를 백현이 혀를 차며 쳐다봤다.
"야. 잠은 자면서 그려야지. 그래서 선이 눈에 보이냐?"
"어제는 그런 거 아니야. 이사했어.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가버리다니. 원서 넣을 때야."
입시미술을 준비하면서 공부까지 놓지 않는 종대는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대한민국 고3 김종대의 하루는 짧았다.
"아 진짜. 엄마는 왜 이럴 때 이사를 간다고 해서…. 아마 고3 아들을 두고 이사 가는 사람은 우리 엄마밖에 없을 거야."
"좋은 데로 가놓고 엄살은."
"몰라. 엄청 무리했어. 그렇게까지 가야하…. 야 맞다 나 오늘 아침에 존나 잘생긴 남자 봤다."
엎드려있던 종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여자는?"
"아 모르겠고, 여튼 키도 존나 크고 무슨 조각이 걸어 다니는 줄 알았다니까 진심. 내가 뛰어가면서 존나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사람 잘생긴 건 알겠더라."
"뛰어가느라 잘못본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아 한 번 더 만날 수 있겠지. 영감이 막 떠올라."
"병신."
"조각은 조각이고, 너무 졸리니까 일단은 자야겠어."
"그래 잠 좀 자라 너.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리고 또 밤에는 경영인의 밤 참석하셔야하고…."
"꼭 가야되는 스케줄입니까 그거?"
"아, 저번에 빠지셔서 이번에도 또 빠지시면…."
"11시 맞습니까?"
"네."
"2시간 남았네요.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네."
비서가 나간 후 크리스가 책상에 턱을 괴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저번에 내가 왜 빠졌지,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려고 했더니.'
아침에 있던 일이 아직까지도 가끔 떠올라 기분이 안 좋던 크리스의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왔구만. 오랜만이야."
"네. 음식이 괜찮네요."
"그렇지? 나도 어쩌다 발견한 곳인데 아주 마음에 들어."
'DO그룹 회장이 요즘 새로운 젊은 여자를 끼고 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여자가 이 호텔과 관련있는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거린 크리스의 어깨를 두어번 치며 수고하라는 말을 건넨 DO그룹 회장이 자리를 떴다.
"크리스?"
의미도 영혼도 없는 안부를 주고받던 크리스를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
"반갑네. 얼굴보기 힘들어."
크리스가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하는 경수를 내려다봤다.
"빨리 좀 잡아주지? 팔 떨어질 거 같은데."
"그냥 거두어. 오늘은 세정제를 차에 두고와서."
말을 끝낸 크리스가 지나가던 웨이터의 쟁반에 있던 샴페인 한 잔을 들었다. 경수가 한 번 웃고는 같이 샴페인을 들었다.
"건배는?"
"그건 너랑 하고 싶지가 않아."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는 크리스를 보며 경수가 얼굴을 살짝 구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시계를 쳐다 본 크리스가 샴페인을 내려놓고 경수를 쳐다봤다.
"이만 가지.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나중에 또 보고."
크리스가 긴 다리를 뻗어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으악!"
크리스의 차가 급하게 멈췄다.
'오늘 되는 일이 없네.'
문을 열고 나온 크리스가 넘어진 남자를 향해 물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네? 아…. 괜찮아요."
남자가 넘어지며 팔이 까졌는지 팔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저기, 혹시 나중에 치료하시고 여기 명함…. 어."
"어? 안녕하세요!"
아침에 그 남자다. 남자도 그 일을 기억하는지 크리스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어…. 저 모르세요? 저 이사왔는데! 104동 1003호."
"아, 예. 예?"
"104동 1003호요!"
해맑게 웃은 종대가 (물론 크리스에게 그의 웃음은 해맑은 것이 아니고 악마의 웃음 같았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하루 종일 자신을 시끄럽게 했던 장본인과 오늘 아침에 커피남이 동일인물이었단 말인가. 크리스는 처음 본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의 끝을 향해 달렸다.
"아침에는 죄송했어요! 기억은 하시죠? 전 기억 하는데, 너무 잘생기셔서!"
"네?"
"아니요,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네. 여기 명함이요, 그럼."
크리스가 명함을 건네고 차에 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와, 역시. 내가 잘못본 게 아니었어."
다시 한 번 감탄한 종대가 떨어트린 봉투를 들고 104동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