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15고합23343
w. 정국학개론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라
<별빛>, 안도현
" 죽이지 않았어요. "
모든 증거가 그를 가리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용의자는 오른손잡이였고 증거는 범인이 왼손잡이임을 명백히 드러냈다. 아니, 단언할 수 없음에도 모든 사람들이 범인은 그라고 확정지었다. 질 게 뻔한 사건을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보았지만 지금처럼 내 앞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피고인은 처음이었다. 죽이지 않았어요. 같은 말만 반복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혼자 살고 있는 여성에게 둔기를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여자의 집에서 정액이 묻은 휴지가 나온 그 시점부터였다. 단순한 살인인가, 아니면 강간살인인가. 경찰이 무언가를 숨기는 듯 했지만 휴지에 묻은 정액은 그를 가리켰고, 혈흔의 방향 역시 왼손잡이인 그를 가리켰다. 보통은 그렇다. 처음 마주한 피고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히 주장하다 진실을 말해야 도와 줄 수 있다는 내 다정한 손길을 붙잡으며 죄를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솔직하게 털어놓곤 한다. 보통이 아니었다. 다갈색의 옷을 입고 두 손을 불안하게 잡고 있는 그는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로 눈을 가린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죽이지 않았어요. 한 마디만 반복하며.
*
" 김태형 씨. "
" 죽이지 않았어요. 진짜 죽이지 않았어요. "
" 김태형 씨, 저 보세요. "
그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어대던 그가 숙였던 고개를 서서히 올렸다. 앞머리에 가린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불안함에 떨던 손이 멈추었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곧 그의 입술이 어렵게 떨어졌다.
" 변호사 님. 저 정말로 죽이지 않았어요. "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 씨는 죽이지 않았어요. 내 말에 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새하얗게 비틀어져 있던 입술에 금세 빨간 피가 고인다.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말아요.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
" 요즘 CCTV 안 틀어놓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
" 아, 글쎄 여긴 돈이 많이 들어서 평소에도 안 틀어놓는다니까! "
" 확인하게 해 주시죠. "
" 경찰이 이미 확인하고 갔으니까 아가씨는 그만 가보라고! "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차차 맞춰가던 퍼즐 하나가 부족했다. 누군가가 퍼즐을 훔쳐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증거들이 나에게 등을 돌릴 리가 없다. 둘 중 하나였다. 그를 범인으로만 해야 성립이 가능한 범죄이거나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피고인이 변호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들은 잦았다. 특히 중범죄의 경우에는 그 횟수가 잦았다. 우선 가해 사실에 대해 부정을 하고, 1심에서 유죄에 어마어마한 형량을 선고받고 그제서야 잘못했다며 사실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의 경우에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저 깊은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그가 범인이거나 범인이 아니거나. 그러나 나는 범인을 잡는 경찰이 아니었고 나의 피고인이 범인이든 범인이 아니든 그를 지키는 변호인이었다.
" 김태형 씨, 그 집에 갔었어요? "
" 주소도 모르는 곳이에요. "
" 김태형 씨 집에서 불과 15분 거리예요. 정말 안 갔어요? "
" 모르는 곳이에요. "
"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해요. 그래야 내가 김태형 씨를 지켜 줄 수 있어요. "
" 변호사 님. "
얘기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어느새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수첩에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를 무심하게 보다 갑작스레 닿은 그 시선에 화들짝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펜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손이 펜에 닿자마자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저 못 믿으시는 거죠. "
*
" 잘 돼가? "
" 선배, 저 진짜 어떻게 하죠. "
" ……. "
" 저는 그 사람을 믿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이 범인이래요. "
" ……. "
" 진짜 어떻게 하죠. "
" 그 사람이 거짓말하는 건 아니야? "
아니거든요. 금방 들이킨 술잔을 놓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그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나를 도와 주려 자처한 선배들마저도 너무도 확실한 증거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그의 가족조차도 그에게 등을 돌렸는데 혼자 남은 그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게 나 하나라는 게 힘이 들었다. 거짓을 진실이라 주장하는 그들에게 그것은 거짓이라 말하는 게 더 힘이 들었다.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는 얼마나 힘이 들까, 그를 생각하는 게 더 많이 힘이 들었다.
" 검사 쪽에 연락이라도 해 보든지. 자, 번호. "
" 선배, 고마워요. 이 은혜 진짜 안 잊을게요. "
" 은혜는 무슨. 근데 너 그 검사랑 친하지 않았냐? "
선배와 헤어지고 휴대폰을 들어 선배가 건네준 쪽지에 대충 날려 있는 번호를 옮겨 적었다. 010 xxxx x... 하단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손을 멈추었다. 전정국. 이름 뒤에 붙어 있던 하트를 지우려 수백 번은 더 노력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자료를 받자마자 확인했어야 할 그 이름을 왜 놓치고 있었을까. 뒤통수를 한 대 탕 맞은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 이름을 더이상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날에는 웃으며 마주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마음도 머리도 복잡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신발을 대충 벗어두고 소파에 누웠다. 통화 버튼 앞에서 손이 흔들렸다.
*
" 오랜만이네. "
" 응, 그러게. "
" 잘 지냈어? "
" 응, 뭐… "
" 연락 올 것 같았어. "
" ……. "
" 들었어. 네가 변호 맡은 거. "
그때보다 더 훤칠한 얼굴로 내 앞에서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앞머리를 내고 다녔던 그때와는 다르게 머리를 번듯하게 올린 것도, 검사였지만 캐주얼을 추구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주말에도 수트를 입고 나온 것도.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지자면 낯선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살도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익숙하게 커피를 시키는 것도 어색했다. 내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유일한 특징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웃음뿐이었다.
" 피고인은 뭐래? "
" ……. "
" 안 죽였다고 하지? "
" 안 죽였어. "
" 너는 그게 문제야. 사람 말을 너무 잘 믿어. "
" ……. "
" 안 죽였다는 증거를 찾지 말고 어떻게 하면 형을 줄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 그게 더 현명한 판단이야. "
" ……. "
" 이기고 지는 건 내 손에 달려 있어. 그리고 난 절대 지지 않아. "
*
" 김태형 씨, 왜 피해자 집에서 김태형 씨 정액이 나왔을까요. "
" …모르겠어요. "
" 모르겠다고만 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해 봐요, 생각을! "
" ……. "
" …미안해요. 그냥, 좀. 그게. 너무 답답해서… 미안해요, 정말. "
화가 터져나왔다. 상대가 잘못되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아무것도 몰라야만 했다. 그는 범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그 집에 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아팠다. 진술과 다른 증거. 증거와 다른 진술.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들에 눈을 감았다. 기분 좋지 않은 고요함 속에서 그가 소리를 내었다.
" 일주일 전에… "
" ……. "
" 한 적은 있어요. "
" …뭘요? "
" …그러니까… 그… "
" …그? "
" …자위를요. "
수첩 옆에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쥐었다. 힘겹게 한 마디씩 내뱉는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와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김태형 씨. 나긋하게 부른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죠. "
" …네, 변호사 님. "
*
사건 당일 11월 2일, 그로부터 일주일 전인 10월 26일 그는 그의 방에서 자위를 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자위를 한 적도, 그렇다고 성관계를 한 적도 없으니 분명 피해자의 휴지통에 있던 정액이 묻은 휴지는 아마 그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그것이 분명해야 한다. 펜을 달칵거렸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처음부터 시작한다고는 했지만, 이게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사건 현장을 수사한 경찰 측에 물어봐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그들이 나에게 협조해 줄 리가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 들은 거 있어? "
" 아, 진짜 이거 비밀인데. "
" 빨리 말해 봐. "
" 현장 수사한 팀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거야. "
" 뭐가? "
" 피해자의 몸 속에서 정액이 나온 것도 아니고, 단순히 휴지통에 있는 휴지에 묻어 있는 정액을 가지고 어떻게 재판까지 갈 수 있냐는 거야. "
" 몸에서 안 나왔어? "
" 안 나왔대. 선배가 똑똑히 봤대. 근데 넘긴 자료는 영 딴 판이었다니까? 강간당한 게 확실할 수밖에 없는 자료들이었대. "
" 뭐, 몸 속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다든지, 피해자의 질액과 섞여 있었다든지? "
" 그래, 그거. "
" 야, 지민아. 고마워. 내가 나중에 밥 살게. "
" 근데 이거 비밀이다! "
사무실로 돌아와 펜을 달칵거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넘겨진 자료를 도로 회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판에서 지민이를 증인으로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판까지 겨우 3일밖에 남지 않은 촉박한 시간에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까지 생겼다. 이런저런 경우의 수가 있었지만 끝까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펜을 놓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숨을 쉬고는 다시 펜을 쥐었다.
*
" 지민이가 말씀을 이미 드렸다고 하던데. "
" 아, 네. 재판에서 얘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
" 재판에서 얘기하셔도 됩니다. "
" 네? "
" 제가 증인으로 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세요. "
" …그게 무슨… "
" 지민이 말 들어보니까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면서요. "
" 김남준 씨. "
" 부탁드립니다. "
그에게 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내가 힘을 써 알아낸 것도, 무릎을 꿇어가며 증거를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앞에서 어깨를 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여전히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는 눈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슬며시 웃고 있는 걸 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의 물음에 조금 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증인이 생겼어요! "
" 증인이요? "
" 결정적인 증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
" ……. "
" 증인이요, 증인! 김태형 씨 무죄를 입증해 줄 수도 있는 사람! "
" …….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입에서 곧 뜨거운 한숨이 터져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고 있는데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처음으로.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가 웃었다.
*
"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요 우리. "
" ……. "
" 김태형 씨. "
" ……. "
" 김태형 씨, 나 봐요. "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가지런히 그의 무릎 위에 있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있던 내 손을 올려 그의 양 볼에 올렸다. 여전히 그의 눈을 볼 수 없었지만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그와 눈을 마주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고, 그는 가만히 내 손길에 응했다. 조금씩 떨리고 있던 몸이 잠잠해졌고 나는 평소보다 과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 김태형 씨는 죽이지 않았어요. "
" …변호사 님. "
" 그걸 판사님께 말하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
" ……. "
" 내가 도와 줄게요. "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 쪼그려 있던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하고 발을 움직였다. 그때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는 그의 손길에 시선을 내렸다. 두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내 팔에 얼굴을 잠시 기댄 채 몇 분을 흘려보내던 그가 내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법정 안으로 들어서는 문을 열었다.
" 사건번호 2015고합23343 판결을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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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어디 갔다온다고 늦었어요. 늦은 주제에 단편이라니! 하시는 분들께는 죄송의 말씀을 드립니다 ㅠㅁㅠ 빠르게 로맨틱 스트리트와 사심의 정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랑해요! BGM ~ 316 - 하얀거짓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