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정국
w. 정국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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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면 너는 커다란 몸으로 내 앞을 지켜주었다. 해를 등지고 해보다도 화사하게 웃는 그때의 너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색의 칼라와 새하얀 셔츠, 짙은 남색의 바지, 앞부분이 조금 닳은 검은색 삼선 슬리퍼. 여느 남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너는 내게 다가왔다. 그런 너를 나는 곧 사랑하게 됐다.
나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풋풋하고, 사랑스럽고, 조금은 가벼울 수 있는.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는 입에 붙은 말을 제외하곤 늘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나는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떡볶이를 좋아하는 내 친구들을 좋아한다. 나는 잘생긴 수학 선생님을 좋아한다. 또 뭐가 있더라. 나는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숨이 차오르고 마침내 목구멍 앞에서 턱 막혀올랐을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하나하나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아하는 게 참 많은데, 좋아한다는 말로는 내가 널 볼 때의 그 벅차오름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
2018, 스물넷
" 와, 니 진짜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곤 연락도 안 하더니 뭐하고 지냈는데? "
대학을 졸업했다. 요즘은 별일 없이 집에서 뒹굴고 있다. 뭐하고 지냈냐는 물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많은 일을 했던 것 같은데, 남들에게 설명하자니 겨우 한마디면 끝이 났다.
" 학교 다녔어. 올해 졸업했고. "
" 휴학 안 했나. 어느 대학? "
" 그냥 저기, 서울에 있는 곳. "
별일 없이 집에서 뒹구는 게 눈치 보이는 것도 그 이유였다. 우리 엄마는 깡촌에서 서울로 대학 가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했다. 마치 이미 번듯한 직장을 가진 성인이 된 것처럼 대하는 어른들이 부담스러워 대학을 간 이후로는 내려온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고, 그래서 아마 내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 아, 맞다. 니 서울에 있는 대학 간다고 울 엄마가 완전 난리였는데. 내 대학 붙은 것보다 니 대학 붙은 걸 더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더라. "
어색하게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조잘조잘 쉴새없이 입을 움직이는 얘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는데, 3년 내내 반장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반장.
4년만의 동창회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생활에 지쳐ㅡ취업에 실패해ㅡ 내려온 나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대하는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집 밖을 나오고 싶었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티 없이 맑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했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너는 어떻게 지냈을까. 그게 조금은 두렵고 궁금했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고, 조금은 낯선 얼굴들도 몇 있었다. 4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동창들은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가장 친했던 세희는 나를 보고 울었다. 본인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내 예전 폰번호를 보여주며 펑펑 울더라. 미안하다 연신 사과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눈과 코가 빨개진 세희가 내 손을 꼭 붙잡고 그랬다.
" 잘 왔어. 진짜 잘 왔어. 여기선 좋은 일만 있을 거야. "
그랬으면 좋겠다. 지난 4년 간의 시간에 지친 나는 차마 환히 웃지 못했다.
2년 전 우리 학교가 폐교됐다고 했다. 대학생들 엠티, 직장인들 야유회에 적합한 숙소로 개조된다는 말도 있었고, 철거하고 다른 건물이 들어온다는 말도 있었고, 소문은 무성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동네를 지키고 있는 몇 동창들은 가끔 가서 청소를 한다는 것도 같고. 4년 전 그 느낌이 여전히 생생한데, 추억이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내려와볼걸. 오랜 친구들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어색함을 느낀다고 생각했을까, 세희가 내 손을 꼭 잡더라.
" 전정국 매년 왔었어. 너 본다고. "
" …그래? "
지난 추억이었다. 너를 볼 때의 느낌, 그 기분은 생생했지만 네 얼굴은 흐릿했다. 내가 반장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처럼 너도 시간 속에 잊혀졌었다. 아마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년 왔는데 오늘은 통 안 보이네. 웃으며 대답하려는데 흐릿했던 기억 속의 얼굴이 다가온다. 호프집 문을 열고, 그대로 걸어온다. 시간이 흘렀는데 변한 구석이 없네. 꼭 교복을 입은 네가 걸어오는 것 같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 야, 전정국 오늘 김여주 왔다! "
축구를 좋아한다며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뻥뻥 소리치던 정호석이었다. 지금은 공시생이란다. 그 애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주하게 나를 찾던 전정국의 눈과 일순간 마주쳤고, 시선을 피한 건 전정국이었다. 머쓱한 듯 목 뒤를 살살 쓰다듬으며 나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전정국의 행동에 부끄럽냐며 옆에서 짖궂은 장난을 치는 건 전정국과 친했던 남자애였다. 역시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전정국 사이를 자주 놀려먹었던 애였다.
여전히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세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더니 웬일, 부끄럽나 봐. 이쪽으론 오지도 않네. "
" ……. "
내 시선은 전정국을 쫓았다. 그래도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는데 변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나는 조금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너는 그대로일 리가 없다. 너를 보지 못한 지난 몇 년 동안 잠시 너를 잊고 있었던 내 죄책감을 조금 덜어내기 위해서였다.
전정국은 들어온 지 10분이 지나도록 말이 없었다. 주변은 소란스러웠지만 마음은 고요했다. 전정국은 제 앞에 있는 맥주 한 병을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중음의 목소리로 크지 않게 말했지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 나 결혼한다. "
///////사담////////
00 먼저 올리고 금요일부터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
저는 경고했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취향에 맞지 않을 거라고... (ㅠㅠ)
크게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작게는 2013년과 201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