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들의 시간 03
w. 하프
상태가 그닥 좋지 않다. 창을 넘어 방 안을 비추는 밝은 햇살에 눈쌀을 찌푸리며 정신을 차린 후, 민석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였다. 눈을 뜸과 동시에 훅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지끈 머리를 눌러오는 두통에 민석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민석이 그제서야 등에 달라붙어 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사람이 움찔, 뒤척이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순간 동작을 멈춘 민석이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어제는 분명 루한이 자신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도, 제가 루한을 위해 내어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었다. 그랬기에 오늘만큼은 홀로 눈을 뜰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도대체 언제 제 방으로 찾아오는 것 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민석은 마른 침을 삼켰다.
쳇바퀴 돌듯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이런 일상은, 루한과 함께 생활하며 겪어야하는 모든 일들 중 가장 민석을 괴롭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정신상태는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주제에, 허리를 끌어안은 팔은 묵직했고, 단단했다. 손등에 솟아오른 핏줄은 남자 내음을 물씬 풍겼다. 한 달을 거쳐 힘겹게 그를 잊었지만, 철저히 그를 위해 맞춰져 있던 몸은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등 뒤에서 제 허리를 꽉 끌어안은 팔은 정사 후 후희에 취해 제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잠에 들던 과거의 루한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그래서 민석은 괴로웠다. 힘겹게 잊었던 그 와의 추억아닌 추억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루한이 야속했다. 매일 밤 제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오려는 루한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때마다 루한은 젖은 눈을 하고 민석을 애처롭게 바라봤지만, 민석은 항상 차갑게 방 문을 닫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모든 것은 이미 수포가 되어버린 후 였다.
“ 아……. ”
민석은 순간 메스꺼움을 느꼈다. 목까지 차오른 욕지기에 민석이 서둘러 허리에 둘러진 팔을 떼어냈다. 익숙한 민석의 향에 취해 깊게 잠에 들어있던 루한의 팔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민석이 화장실로 달려나갔다. 급하게 변기 뚜껑을 들어올려 목까지 차오른 역겨움을 토해내려 숨을 내뱉었지만, 나오는 것이라곤 신물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석은 몇번이고 구역질을 했다. 당장이라도 속을 가득 채운 역함을 토해내고 싶었다. 몇 번이고 이어진 헛구역질에도 더 이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없자, 민석은 엉킨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멍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벽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상태가 조금 나아졌을 때쯤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내렸다. 찬물에 입을 헹구며 뜨겁던 얼굴을 씻어낸 민석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구역질에 눈이 퀭하게 꺼져있었다. 민석은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마셨던 술과 꾸역꾸역 먹었던 늦은 저녁식사가 화근인 모양이였다. 잦은 스트레스 탓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소화력에 무리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민석이 여전히 제가 누워있던 자리를 향해 돌아 누운 채 새근새근 잠에 들어있는 루한을 내려다보다,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잡아 들었다. 액정에 떠오르는 시간을 확인한 민석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뒤늦게 찾아와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게 했던 술기운이 오래도록 이어진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알람 소리조차 못 들은 채 잠에 취해있었을 리가 없다. 이미 출근시간을 한참 지나버린 시각에 민석은 빠르게 체념했다. 어차피 당장 회사를 간다 한들 멀쩡히 하루를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민석은 일단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겨놓은 종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염없이 제 전화를 기다린 것인지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고 금새 끊어졌다. 머지않아 이어지는 수화기 너머 종대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 야, 김민석 너…!
“ 미안해. 핸드폰을 지금 봤어. ”
빠르게 이어진 사과에 종대는 더 이상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푹,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 아 너는 진짜…, 전화 한 통을 안 받으니까 걱정했잖아, 임마.
“ 걱정 많이 했나보네…, 전화도 이렇게 많이 하고. ”
- 나랑 헤어진 다음날에 연락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집에 돌아가다 쓰러지기라도 했나, 혼자 별 생각을 다 했다.
원체 정 많고 걱정이 많은 종대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였다. 농담으로 뱉는 말이 아님을 아는 민석은 그저 작게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냐는 종대의 꾸지람이 수화기 너머로 찾아 들었다. 종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 무슨 일 인데? 한번도 이런 적 없는 애가 출근은 안 하고 소식도 없고.
“ 아침에 눈을 뜨니까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부장님 화 많이 나셨어? ”
- 그렇지 않아도 이럴 것 같아서 너 아프다고 대충 둘러댔어.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마시면 얼마나 마셨다고?
“ 그러게. 나도 이젠 늙어가나봐. ”
- 듣는 동갑 서럽게 그런 소리 할래? 하여튼 목소리 들었으니까 일단 끊자, 부장 눈치 보인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
“ 응. 걱정시켜서 미안. ”
- 됐다, 쉬어.
저를 나무라는 종대의 목소리에 어느새 안도감이 묻어나와, 민석은 그 따뜻함에 작게 미소 지었다. 흥미를 잃은 삶에 종대는 언제나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종대만큼 저를 챙기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더 있을까. 루한을 잃고 난 후 곁에 종대가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외로운 삶을 버텨내는 것이 곱절은 더 힘겨웠을 것이다. 민석은 언제나 종대가 고마웠다.
회사에 연락을 하고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 아려왔다. 어젯밤 꾸역꾸역 먹었던 저녁이 얹혀도 단단히 얹힌 모양이였다. 소화제라도 하나 찾아보기 위해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민석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레 몰려왔던 욕지기에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떠난 터라 이불이 저 멀리 밀쳐져 있었다. 그랬기에 제 몸인 양 등에 꼭 붙어 있던 루한도 덩달아 제대로 이불을 덮지 못한 상태로 잠에 들어 있었다. 말없이 그런 루한을 내려다보던 민석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손을 뻗었다. 이불을 잡아 든 민석이 루한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꼼꼼히 이불을 여며주던 그 순간 루한이 갑작스레 몸을 뒤척였다. 당황한 민석이 허공에 손을 띄운 채 굳었을 무렵, 여전히 잠에 취한 루한에게서 깊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민석아……. ”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그 누구보다 익숙한 이름에, 민석은 할 말을 잃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몸을 뒤척인 루한의 입에서 두어번 더 제 이름이 반복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석이 더없이 착잡해졌다.
너는 왜, 꿈속에서조차 나를 부르고 있어. 차마 물을 수 없을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루종일 제 생각만 하며 살아가는 루한이, 눈을 감을 때 만큼이라도 다른 세상을 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다면 민석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루한을 밀어낼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이건 반칙이였다. 정말 루한의 삶에 중요한 것이 민석 뿐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민석은 힘없이 침대에 걸터 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와서 이러는 루한이 야속했다. 숨이 막히도록 힘겹던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온 그 순간부터 매일 자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루한이 미웠다. 내가,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었는데. 고작 당신 하나 잊어보려고 몇 일을 울고 힘들어 했었는데……. 괴롭게 지새우던 지난 날이 아팠다. 모든 걸 다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결국엔 변한 것이 하나 없었다. 머리는 전보다 더 지끈거렸고, 가슴은 더욱 꽉 막혔다. 더 이상 루한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민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거실로 나온 민석이 서랍을 뒤져 약을 찾았다. 스트레스가 쌓이자 병치레는 잦았다. 집에 구비해둔 약만 벌써 한 서랍이었다. 메스꺼운 속 부터 달래려 소화제를 찾던 민석이 한숨을 쉬었다. 애석하게도 수두룩하게 쌓인 약들 중 소화제가 들었던 박스만 비어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약을 뒤적이던 민석이 결국 소화제를 포기하고 두통약을 꺼내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라도 달래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물 없이 삼키는 알약은 매끄럽지 못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민석은 마른 침과 함께 힙겹게 약을 삼켰다.
두통과 메스꺼움이 공존하는 느낌은 최악이였다. 찌푸려진 미간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써 이겨내보려 두 눈을 꾹 감은 채 이마를 짚고 있던 민석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른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이 서랍, 저 서랍을 모두 헤집어 놓았을 무렵에야 찾던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랍 속 실패를 꺼내든 민석이 주저없이 실을 풀어 이로 끊어내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를 꾹 누르자 묵직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몇 번을 주물러 피를 모은 후에야 끊어 둔 실을 꽁꽁 동여매었다. 그리고 민석은 바늘을 꺼내들었다. 위치를 잡아 주저없이 손을 따니 검은 피가 솟아 올랐다. 상태는 민석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엄지 손톱 아래로 검은 피가 모이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민석은 쓰게 웃었다. 체기가 내려가도 피는 다시 붉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썩어 문드러진 속내를 채운 피도 어느새 시꺼멓게 변질되어 있을 듯했다. 아침 내내 민석을 괴롭혔던 답답함은 손을 따 피를 보고 나서야 회복이 시작되었다. 휴지를 뽑아들어 손가락에 맺힌 피를 닦아내자 언제 피가 맺혔냐는 듯 손가락은 깨끗했다.
이유가 다른 답답함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도 바늘을 들어야했다. 그 순간은 피가 맺히고 통증이 몰려온다 한들, 한 번은 겪어야 끝이나는 일이였다.
민석은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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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석……! ”
문득 눈을 뜬 루한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연하듯 비어있는 옆자리에 루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히 질려갔다. 이런 일은 없었다. 부지런한 민석이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한다해도 루한은 악착같이 따라 일어나 민석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봤었다. 민석이 저를 두고 집을 나가는 모습에 가슴이 찢겨나가더라도 하루도 거른 적 없이 이어갔던 일이였다. 그런 제가, 늦잠을 자버렸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있었고, 민석의 온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루한의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눈물이 솓구쳤다. 쓰러지듯 자리에서 일어난 루한은 제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이불을 서둘러 거둬내고 하염없이 민석을 불렀다. 민석, 민석아…….
밤이 짙어질 무렵, 쭈뼛쭈뼛 민석의 방을 찾았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새근새근 잠이 든 민석이 예뻐 하염없이 민석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다. 손 끝 하나라도 대면 사라질까 두려워 그저 얼굴만 내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한없이 민석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그 옆자리에 몸을 뉘였고, 움츠린 그 등을 끌어안아 온기를 품었을 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저 예쁘기만 한 사람, 죽어도 미워할 수 없을 사람, 루한은 소중한 민석과 떨리는 마음을 끌어안고 그렇게 포근하게 잠에 들었었다. 그리고 그 소중함을 한꺼번에 잃은 루한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민석의 이름만 끝없이 불렀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서둘러 방 문을 열고 뛰쳐나가던 루한이 순간 훅,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차마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루한이 얼떨떨하게 앞을 보았다.
“ 이제야 일어났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깨우러 가려고 했어. ”
“ …민석……? ”
“ 거기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빨리 와. 오전 내내 잤는데 배도 안 고파? ”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던 민석이 눈 앞에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있던 말던 눈길조차 주지 않던 민석이 저를 부른다. 자신을 향해 건네는 말에 온기가 실려 마음이 따뜻해졌다. 루한이 얼을 빼고 있자 민석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 안 먹어? 안 먹으면 치운다? ”
“ 어, 어어…! ”
그리고 그 말에 당황한 루한이 쏜살같이 식탁으로 달려왔다. 행여나 민석이 정말 치우기라도 할까 자리를 잡은 루한은 일단 제 밥그릇부터 챙겨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치울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민석을 바라보았다. 방에서 뛰쳐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던 루한이 눈 깜짝할 새 앞으로 달려온 것에 놀라있던 민석이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제 밥그릇을 사수하고 있는 루한을 바라보던 민석이 피식,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보던 루한이 놀라 굳어버린 건, 당연한 반응이였다.
“ 안 치울테니까 빨리 놓고 먹어. 국 식는다. ”
“ ……. ”
“ 막 끓여서 평소보다 맛있을거야. 장 본지 꽤 돼서 재료는 빈약해도 먹을만 할 껄. ”
민석은 국그릇을 들어 손수 따뜻한 국을 담아주었다. 그릇이 꽉 차도록 넉넉히 담던 민석이 뜨거움을 담은 그릇을 루한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제 그릇을 체우는 양은 루한의 것과는 달리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릇을 내려놓은 민석이 숟가락을 들었다. 먹자. 차분히 내려앉은 목소리에도 앞자리에 앉은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에 민석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루한이 의아해 말을 붙이려던 순간, 루한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예뻐, 민석……. ”
“ ……. ”
“ 너무, 너무 예뻐……. ”
그리고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으로 루한을 보고 있던 민석이 먼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루한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벅찬 감정 하나하나가 말에 녹아 있었다. 그래서 민석은 더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 좋아하는 거, 못 해줘서 미안해. ”
“ 어…? ”
“ 바쁘니까 냉장고에 든 것도 없고, 할 만한 반찬이 몇 개 없었어. ”
“ 어, 어어…. ”
“ 뭐, 어차피 재료가 있다고 해도 니가 좋아하는 걸 다 해줄 요리실력도 못 되지만. ”
“ 아, 아니…! 아니야, 아니야……. 나는 민, 민석이 해주는 건 다, 다 좋아. ”
그 말에 더디게나마 움직이던 민석의 젓가락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듯 텅 빈 시선으로 반찬들을 내려다보던 민석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내가 해주는 건 다 좋아? ”
“ 응, 으응…. ”
“ 그래, ”
“ ……. ”
“ 다행이네……. ”
민석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한은, 왜 문득 울고 싶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 빨리 먹어. ”
“ ……. ”
“ 식으면 맛 없다. ”
덤덤한 민석의 말투에 루한은 그제서야 수저를 집어들었다. 한참만에 시작된 식사는 그동안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단연 으뜸이였다. 민석의 정성이 녹아들어 더욱 그러했다. 한 번 시작된 수저질은 멈출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루한은 보는 사람이 다 배가 불러올 만큼 맛있게 먹었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 하나하나 빼는 것 없이 복스럽게도 먹었다. 그에 반해 현저히 느린 식사를 이어가던 민석의 밥그릇은 그닥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문득 그런 민석을 발견한 루한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민, 민석아, 왜, 왜 안 먹어…. ”
“ 응. 별로 식욕이 없어서. 나 신경쓰지 말고 많이 먹어. ”
민석은 그렇게 루한을 달랬지만 루한의 얼굴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정말 괜찮다며 다시 한 번 루한을 달래려던 민석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저 버릇처럼 밥을 떠놓았던 숟가락 위로 밑반찬 하나가 올라왔다.
“ 안, 안 먹으면 안 돼, 민석, 많, 많이 먹어야 돼. ”
걱정을 가득 담은 루한이 손수 얹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민석에게는, 잊고 싶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 난 통통한 사람 별론데. ’
‘ ……. ’
‘ 얼굴에 이렇게 살집 있는거 별로야. 애 같아 보여. ’
‘ ……. ’
‘ 어린애랑 뒹굴 만큼 변태 취향은 아니니까. ’
뜨겁던 밤을 보내고 그의 가슴팍에 기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통통한 제 볼을 붙든 채 루한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저의 마음은 어떠 했었나. 태어나 처음으로 유독 얼굴에만 동그랗게 모인 볼살을 미워했었다. 모두가 순수한 칭찬의 의미를 담아 건네는 어려보인다는 말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민석이 마르고 야위어가던 건 루한을 잃고 난 후에 시작된 일이 아니였다. 악착같이 이를 악 물고 늦은 나이에 시작했었던 독한 다이어트는 괴로웠다. 마음 편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민석은 울음을 삼키고 반찬이 놓인 밥을 입에 넣었다. 민석이 밥을 먹은 후에야 루한은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풀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듯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 덩어리를 힙겹게 씹어내며 민석은 루한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한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민석은 차마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식사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민석은 미련없이 몸을 일으켰고, 루한은 어리둥절하게 그런 민석을 지켜보았다. 그대로 쓰레기통 앞으로 향한 민석이 거의 변한 것이 없어 그릇 가득 채워져 있던 밥을 미련없이 쏟아부었다. 루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 민, 민석아, 왜, 왜 그래……. ”
민석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뚝뚝하게나마 대화를 이어나가던 민석이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한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손에 쥔 수저도 놓지 못한 채 루한이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민석을 지켜보았다. 대답을 삼킨 민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루한은 머지않아 다시 거실로 나온 민석 덕분에 자리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이윽고 나타난 민석의 얼굴은 평소처럼 굳어있었고, 그런 민석을 지켜보던 루한이 멍하게 굳어버린 건, 싸늘한 민석의 얼굴이 아닌,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옷 한 벌 탓이였다. 멍한 루한과 눈을 맞추고 말을 꺼내는 민석의 목소리는, 그 어떤 날보다 차분했다.
“ 차린 것도 많이 없었는데,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다. ”
“ ……. ”
“ 가는 길에 배도 고프면 괜히 더 서럽잖아. ”
“ ……. ”
“ 옷은 깨끗이 드라이했어. 사실 한 지가 꽤 돼서 옷장 냄새는 좀 베여들었는데, 이해해 줄 거지? ”
“ ……. ”
“ 그동안 몸에 맞지도 않는 내 옷 입느라 고생했어. ”
“ ……. ”
“ 그래 너는, 항상 이런 옷이 잘 어울렸는데. ”
민석의 손에 들린 것은 깨끗이 다려진 정장 한 벌이였다. 딱 봐도 귀티가 흐르는 옷은 한 달동안의 긴 여정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 날, 집 앞을 지키던 루한이 입고 있었던 옷이였다. 귀하신 몸이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느라 옷은 꽤 더러워져 있었기에, 민석은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두었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루한은 다시 전처럼 고귀해야 했으니까.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랜 싸구려 티셔츠는, 애당초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 이제, 돌아가야지. ”
“ ……. ”
“ 너무 늦었어, 루한. ”
그를 위해 꺼내든 바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아프게 살을 찔렀다. 그래서 루한은, 차마 숨 조차 쉬지 못한 채, 그렇게 굳어버렸다.
글솜씨도 한참 모자란 저에게 다들 왜 그렇게 과찬을 해주시는지ㅠㅠㅠㅠㅠ
글에 감정이입해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함께해주시는 독자분들을 보며 너무 기뻤습니다ㅠㅠㅠ
정말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어요ㅠㅠㅠㅠㅠㅠㅠ 게다가 암호닉까지 신청해주시고..♥ㅠㅠㅠ
암호닉 신청해주신 홍삼님, zio님, 김루한님, 콩쥐님, 예이님, 아아님, 데일밴드님, 얄루님,
슬픈미소님, 김치찌개님, 양파님, 삉삉님, 종대생님, 개밥님, 코코볼님, 배고파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암호닉은 언제든지 가리지 않고 받을 예정이니 편하실 때 신청해주세요! 다들 꼭, 기억하겠습니다 ㅠ0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