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난 돈을 날린 입장이다. 이왕 지불한 것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당한 서비스를 받는 게 훨씬 이득이지. 어차피 나도 차여서 솔로이겠다, 곧 크리스마스이겠다 겸사겸사 좋은 쪽으로 하자구. 저 사람, 그러니까 민윤기는 내 남자친구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도 애인 대행이라고 괜찮은 인물이 내 옆에 딱 붙어 있는데 내가 그걸 마다할 이유는 더욱 없지. 아니 잘 보니까 내 구 남친이었던 김남준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괜히 머리 쓰고 현실 부정해봤자 나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맞아, 그렇고 말고. 하지만 어쩐지 그의 하얀 피부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왜인지 모르게 자꾸 기가 빨리는 기분이라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아, 온몸에 힘이 다 풀리는 느낌이야. 해외 여행이라도 가자고 차곡차곡 모으던 돈을 이렇게 순식간에 날리다니, 역시 술은 사람을 개로 만드는구나. 나는 개야, 나는 개라고……. 역시 돈은 모으는 게 어렵지 쓰는 건 참 쉽다. 내가 한숨을 깊게 쉬며 그를 쳐다보자 그가 왜 쳐다보냐는 표정으로 마주했다.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져서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난 그 상태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생각이 진지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나 거의 다 파악한 것 같아, 민윤기한테는 많은 걸 바라면 안 돼. 아니지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니? 난 엄연히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입장인데 말이야. 하지만 곧 그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갔다. 왜냐면 상대는 민윤기였기 때문이다. 머리 아프게 생각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뚱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들어 자연스럽게 티비 전원을 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이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는 마치 우리가 대략 3년간 사귄 애인처럼 보이게 해 줬으나 내 멘탈을 쪽쪽 빨아가는 악의 축이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다른 말 안 하고 정말 내 남자친구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나름 만족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게 달달한 로맨스나 내 상상 속 로망따위를 제외한 상황에 한해서였지만. 이왕 지불한 거 한 달동안 잘 지내보자 이거다. 돈 받아서 민윤기도 좋고, 나는 이걸 계기로 김남준 좀 잊어보고, 어 완전 일석이조잖아.
"아, 볼 거 더럽게 없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내가 차마 염두에 두지 못 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연애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봤다면 다들 공감하고 알겠지만 문득 떠오르는 구의 생각을 잠재우기란 참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헤어진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이라면 더더욱. 흔한 이별 노래와 드라마 속 가련한 여주인공, 그 어떤 일이든 슬프고 애잔하다 싶으면 내 모습을 끼워 맞추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더 쉽게 얘기하자면 바로 나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를 예를 들 수 있다.
민윤기는 채널을 열심히 돌리다가 지쳤는지 드라마가 재방송으로 나오고 있는 곳으로 돌리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는데, 그럼으로 자연히 나도 그를 따라서 드라마에 집중하게 됐었다. 어차피 우리 둘이 길게 말할 건덕지도 없었고 괜히 빤히 쳐다봤다간 어색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아서 선택한 루트였던 것인데, 그때만 해도 이 드라마가 나에게 이런 감정을 가져다가 줄지는 몰랐던 것이 미스였다.
마침 드라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클리셰를 따라 여주인공은 바닥에 우산을 던져놓고 쏟아지는 폭우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어디론가 계속해서 전화를 걸던 주인공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 전화가 끊긴 화면에는 남자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과 함께 옆에 앙증맞은 하트가 붙어있었다.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던지는 주인공을 보면서 민윤기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질렀고, 나는 괜히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개자식아! 엉엉. 이렇게 헤어지는 게 어딨어.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는 내가 드라마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앞 내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해 줬더란다. 아, 이건 정말 다른 걸 갖다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이별 장면이구나.
전화로 헤어지잔 통보를 받던 그날이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 목으로 살짝씩 올라오던 감정은 기어코 밖으로 터지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걸고 걸어도 끝끝내 대답은 커녕 연락을 받지도 않던 그의 마지막 행동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으니까. 오랜 시간 연애를 한 것이 이렇게 부질없었구나 느끼던 그 순간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일보다도 더욱 비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은 종국에는 내가 얼굴을 무릎에 박고 흐느끼게 만들었다. 정말 웃기게도 저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딱 나 같아서.
"…… 야, 너 우냐?"
"안 울거, 든."
"헐, 얘 진짜 우네. 야, 왜 네가 울어?"
내가 영화 보고 우는 애는 봤어도 드라마 보고 우는 애는 또 처음이다. 야, 울지 마. 너 지금 되게 못생겼어. 몸을 틀고 앉아서 내 팔을 살짝 잡고 안절부절하는 민윤기의 모습에 괜히 서러움이 더욱 올라왔다. 왜 달래 주는 모습이 이렇게 닮은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서로 좋아했는데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사람 인연이 이렇게 약하면서도 질기다. 나를 저 하늘까지 데려가 줬다가도 금방 땅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무의식 중에 그를 다시 찾았던 모양이지. 민윤기, 너는 그냥 남준이의 대용일 뿐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못됐다. 그런 사람이야.
그래 어쩌면 이 상황이라 더 눈물이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차였는데도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웃기면서도 신기해서. 근데 그 상대가 내 그리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크게 다가온 거지만. 애인 대행일 뿐인데 편안한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모든 걸 받아들이던 내가 너무 한심했다. 며칠 전에는 좋아 죽겠다던 남준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죄책감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결국 이 사람은 한 달 뒤에 안 볼 사람인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을 잊기 위해 만나고 있다는 게 정말 모순적이어서.
술에 꼴아서 전화를 걸었던 것도 결국은 내가 원해서 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를 다시 찾고 싶었으나 자존심이 상해 그러지 않았던. 어쩌면 끝에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다른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었을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 하던 비난과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그러면서도 옆이 비어져 있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워서 누군가를 데려다가 뒀다. 어차피 돌리지 못 하는 상황 조금이나마 위로 삼고 싶어서 술을 핑계로 이런 짓을 저질렀어. 이런 내가 다시 매달리면 네가 나를 다시 봐 줄까? 누가 들어도 안쓰러운 소리가 입 밖으로 안타깝게 흘러나갔다.
"야, 울지 마. 김탄소, 나 봐."
언제까지 이렇게 이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따끔하게 충고도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건가봐요.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르고 울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별 소득이 없는 걸 알면서도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더이상 갈 곳도 없는 밑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앞에서 민윤기의 깊은 한숨이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에 티비 전원을 꺼버린 건지 집 안에는 내가 울음을 억누르는 소리만 울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올라오는 울음을 누르고 있을 때 윤기가 내 두 팔을 잡아왔다. 설마 지금 차인 거 생각나서 우는 거냐? 그의 말이 끝나자 눈을 누르고 있던 내 손이 걷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표정을 찡그리며 뿌옇게 번진 시야로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남자친구한테 차여서 나한테 연락한 거라며."
"내가 언제……."
"거, 네가 말한 것도 기억, 아 그래 뭐 술 취했으니까."
그냥 네가 나한테 안 말한 게 없다고 생각하면 돼. 다시 한숨을 한 번 쉰 윤기는 계속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친구가 필요해서 날 부른 거면, 대행이든 대용이든 잘 굴리라고. 너 어차피 외로워서 나 부른 거 아니었어? 돈도 그렇게 줬는데 나 같으면 억울해서라도 이것저것 요구하고 시키겠다 등신아. 귀에 날카롭게 박히는 말들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계속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우울하게 내려앉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요 고객님, 돈을 내셨으면 응당 서비스를 받으셔야 할 거 아니에요. 정수리 위로 하얀 손이 턱 얹어진다. 그리고 슥슥 한두 번 머리를 헤집는다. 아 감정선이 왜 이렇게 왔다 갔다 난리도 아니야. 나 아직 술 덜 깬 건가. 그래 구에 얽매여서 정신 못 차리고 사는 인생은 사는 것도 아니라고 다들 그랬는걸. 이제는 거의 다 진정된 기분에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가 조울증도 걸릴지 모르겠는데……. 눈가를 슥슥 문지르며 슬픔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김탄소, 청승맞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드라마 보고 우는 게 어딨어, 그것도 고작 이별 장면 가지고 말이야. 어차피 운명이고 인연이었으면 이렇게 헤어지지도 않았겠지.
스스로를 위안하며 잘 살아보자 다짐을 속으로 하는데 민윤기가 가만 나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는다. 왜 웃나 싶어서 따라 보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눈을 진득하게 마주치는 그. 내가 살다살다 애인 대행 하면서 우는 여자 달래는 건 또 처음이네.
"뭐든 다 떠나서 지금은 내가 네 남자친구야, 알겠어?"
"알겠어……."
"알겠으면 가서 라면이나 끓여와."
내가 이 사람이랑 한 달을 잘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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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님 분홍이불님 짐빔님 민트님 마음님 뿌얌님 빵요님 부산님 민군주님 두둠칫님 큐울님 플로라님 오아시스님 미꾸님 망고빙수님 충전기님 슈팅가드님 계피님 #방치킨님 자몽소다님 헤헿님 정국아블라썸님 박뿡님 증원님 슈팅가드님 싱숭생숭님 대행서비스님 마틸다님 감사합니다 ♡
헠헠... 주 1회 연재도 넘나 힘든 것...
긴 댓글은 읽을 때마다 참 즐거우면서도 감사한 느낌이 있어요 오랜 기간 저를 따라와 주신 분들께도 너무 감사드리고!
글에 대한 지적 받습니다
고쳐졌으면 하는 부분이나 아쉬운 부분 그런 점들을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보는 분들이 편한 글을 쓰고 싶어요
제가 답댓은 달고 있지 않습니다만 모든 댓글들은 꼼꼼하게 읽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진짜 그 한 줄 혹은 더 긴 댓글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읽으면서 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