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늦은 밤에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찾아 온 나를, 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윤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방학이 시작 됨과 동시에 기대감으로 부푼 나에게, 7개월 동안 잘 만나오던 남자친구로부터 헤어지잔 말을 전해들은 오늘. 나는 무작정 윤기의 집을 찾아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먼저 생각났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일. 답답함으로 응어리 진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찾아온 나의 네버랜드. 언제든 두 팔 벌려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있는 곳. 나의 피터팬같은 윤기. 중학교를 같이 나와서,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좋은 친구였다. 윤기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울음을 터트리는 나를 가만 안아주면서 등을 살살 문지르는 손길만 있을 뿐. 항상 그래왔다. 내가 슬픈 일이 있어서 울고 있을 때면, 옆에선 이렇게 묵묵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윤기가 있었다. 나는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늘 든든했고, 가벼웠다. 이렇게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후에 찾아올 지도 모를 힘든 일에 대한 나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감소 시켜주는 좋은 역할을 했다. 대나무같은 포근함. 모든 것을 털어 놓아도, 제 마디에 새길 그런 사람.
"힘들었지."
"……."
"많이 힘들었을 거야."
나 진짜 힘들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슬픈 울음은, 원망의 울음으로 바뀐다. 고맙지만 너는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덤덤히 위로해주는 윤기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그래도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 다정한 위로의 말에 더 울음이 나왔다. 난 잘못한 거 없잖아. 난 걔한테 용서 빌 필요 없는 거야. 그래서 안 붙잡았어, 나 잘했지. 그리고 너 찾아온 건데, 나 정말 잘 한 거 맞지? 아픔을 덮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잘 했어, 탄소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실컷 울어. 그리고 털어내자. 다정함이 잔뜩 묻어있는 말에 전 남자친구가 생각났다. 걔도 나한테 잘 해줬었는데. 왜 그랬을까. 윤기의 옷이 흠뻑 젖도록 펑펑 울면서, 털어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잊혀지지 않을 것이란 걸.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아니면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난 뒤라도 생각날지도 몰라. 많이 좋아했으니까. 사람의 감정은 참 지독하다. 그래서 더 잔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02
윤기같은 성격이면 어떤 여자 애들이라도 좋아하겠다 싶어서, 좋은 친구들을 소개 시켜준다고 했었던 적도 있었는데. 윤기는 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거절을 했었다. 그게 윤기가 나에게 감추는 유일한 비밀이었다. 나에게조차 말해주지 않는 그 상대가 과연 누굴까, 항상 궁금했다. 정말 완벽한 남자인데. 넌 왜 연애 안 해? 묻는 말에 옅게 미소 짓는 것이 전부였다.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안 돌아올 것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 때 나는 한창 설레임에 빠져 있었다.
03
윤기가 많이 아프댔다. 남준이에게 말을 전해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잘 안 아프던 애가 왜 갑자기.
저번에 내가 아팠을 때 윤기는 어떻게 했더라. 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면서 이것저것 샀다. 일단 아프면 기분이 안 좋아지니까, 단 초콜릿. 그리곤 약국에 뛰어가서 내가 전해 들은 윤기의 증상을 두서없이 말하고, 그 광범위하고 애매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약사 선생님께 약을 여러개 받아왔다. 그 후, 윤기의 집 근처 죽집에 들려 죽을 샀다. 내가 충분히 만들어 내줄 수도 있었지만, 시간도 시간이었고. 급한 마음에 그럴 정신이 없을 듯 한 탓이었다. 뜨끈한 죽이 혹여나 식을까 품에 꼭 안으며 윤기의 집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파도 그렇지 왜 문도 안 잠그고 있대. 이러다가 도둑 들면 어쩌려구. 신발을 빠르게 벗고 윤기의 방으로 향하는데, 근처에만 갔는데도 열이 후끈 전해졌다. 침대 옆에 걸터 앉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윤기를 흔들어 깨우니, 눈커풀을 겨우 들어 나를 쳐다 본다.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들은 것보다 열이 꽤 높았다. 어제 뭘 했기에 이렇게 아파. 타박하듯 쏘아 붙이는 나를 보더니 다시 눈을 느리게 감는다. 걱정 돼 죽겠네. 옆으로 치워져있는 이불을 다시 끌어와 윤기에게 덮어주며 말했다.
"죽 사왔으니까 먹고 약 챙겨 먹어."
대답은 없었다. 들었으려나. 그래도 환자인데 그동안 챙김 받은 것도 있고, 멀쩡한 내가 좀 챙겨줘야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내 손목을 세게 붙잡는 후끈한 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너, 병원 갈래? 물었지만 또 대답은 없었다. 죽 먹여줄게, 잠시만.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몸을 일으킨 윤기가 다시 손목을 잡아챘다. 그 힘에 허리가 약간 숙여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탄소야……."
"응?"
"난…… 너 좋아해……."
난 왜 너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 없이 많은 길을 달렸던 걸까. 왜 그리도 걱정이 됐는지.
"미안, 그…… 생각해보니 나 약속 있었던 것 같아."
"……."
"죽은 식탁에 놓고 갈게…… 꼭 챙겨 먹어."
우린 친구잖아.
뜨거운 건 어차피 식어. 저 죽처럼.
04
너도 알잖아, 그치 윤기야.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지. 내가 정말 좋아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질렸다길래, 단순히 권태기인 줄 알았지. 근데 바람 피고 있었던 거였더라. 무려 2년이래. 내가 진짜 여자친구가 아니라, 내가 바람 대상이었던 거야…….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 했던 말들이 술술 터져 나갔다.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내뱉는 울음도, 서러운 감정도 모두 와르르 꺼내 놓으며 처음부터 다 말했다. 윤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편한, 둘도 없는 친구. 묵묵히 들어주는 그 모습이 좋아. 하도 울어서 끊기는 호흡으로 얘기함에도 윤기는 계속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완전 나쁜 새끼네."
"네가 뭔데 우리 성재 욕 하구 그래! 우리 성재가 얼마나 착한데……."
"후, 김탄소, 너 정말."
야, 너 이럴 거면 집에 가. 제 앞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며 등을 떠미는 윤기에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힘을 주어 버텼다. 너 나 싫어하지. 왜 집에 보내려고 그래. 지금 나 우울한 거 안 보여? 그러니까 뒷담하는 거 더 들어달라구. 괜한 투정을 부리며 징징거리니 졌다는 듯이 떠미는 행동을 멈추는 윤기. 그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푹 한숨을 내쉬고 다시 윤기를 쳐다봤다. 팔짱을 끼고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민윤기.
"어쩌면 너처럼 연애 안 하는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꼭 그런 건 아니거든."
왜. 너처럼 연애 안 하면 이렇게 실연 당할 일도 없잖아. 누가 바람 필 일도 없구. 아무튼, 넌 몰라, 이 바보야! 넌 아무것도 몰라!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차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배고프니까 밥이나 해 줘. 금세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다 닦아낸 내가 뻔뻔하게 소파에 가서 앉자마자 배고프단 얘기를 하니 윤기가 어이 없다는 듯이 숨을 허, 하고 뱉어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거잖아. 먹고 다 잊어 버릴 거야. 이럴 땐 미성년자인게 조금 서럽다. 어른들 말로는 술 많이 마시면 기억이 없고 막 그렇다던데.
"빨리. 나 너가 끓여준 라면 먹고 싶단 말이야."
파는 넣지마. 나 파 안 먹을 거야.
05
춥다. 한 겨울의 바람은 시리다. 손이 간질거리는 것이 싫어서 장갑을 안 끼고 나온 탓에, 손이 금방 발갛게 얼었다. 입김을 불면서 손을 녹이고 있는데 내 손을 잡더니 제 주머니 안에 넣는 민윤기. 뭐야, 왜 이래. 평소같았으면 가만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지난 일이 생각 났다. 아픔에 취해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었던 너. 괜히 혼자 민망해져서 손을 빼니 물끄러미 쳐다만 본다. 이젠 정말 신경 쓰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저 덤덤한 표정. 잔잔한 눈빛.
사실 엄청 신경 쓰인다. 하지만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설레고 두근거리는 감정이 아닌데 좋아하는 것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우린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 사이인 걸. 내 목도리라도 할래? 평소 추위를 잘 타는 네가 선뜻 묻는다. 제 목도리에 손을 대고 있는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정말 줄 것도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다시 입을 꾹 다문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 맴도는 거 진짜 싫은데.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걸까. 우리의 사이가, 너의 감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쌓인 눈을 발로 살살 치우고 있는데, 윤기가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마주친다.
"탄소야."
"……."
"김탄소."
왜. 또 쓸데 없는 소리 하기만 해 봐. 나 너랑 친구 안 할 거야, 그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던지듯 대답하니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변하는 거 싫어, 윤기야. 우리 정말 좋은 사이였잖아. 가까운 거리 하나 의식 된다.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민망해. 언제부터였을까. 그 말, 진심은 맞는 걸까. 나는 너에게 어떻게 반응 해야하는 거야. 지금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한 번 숙여진 고개는 더더욱 들리지 못 한다. 죄책감이었을까. 아니야, 난 잘못한 게 없는 걸.
"아니다, 그냥."
"……."
"언제든 편하게 기대라고."
미안. 이제 그러지 못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