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보여줄게 집착이 어떤 건지
그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그가 자연스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내 옆에 앉았다. 물기가 뚝뚝 이불 위로 떨어졌다.
"감기 걸리겠다"
"괜찮아-"
"내가 싫어요- 이리 와요 머리 말려줄게"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 화장대 앞에 앉혔다. 드라이기를 켜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그의 금발머리를 살살 쓸어올리며 말려주었다. 군데군데 뿌리가 자라 검은색이 비쳤다. 그는 내 손길이 나른한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왜 항상 이렇게 금발로 하고 다녀요?"
"........."
"처음엔 원래 당신 머리가 금발인 줄 알았어-"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떠 거울을 통해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 망설이는듯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요"
"........... 싫었어..."
"응? 뭐라고요?"
"어느 날... 이렇게 거울을 봤는데..."
"........"
"내 모습에서 아버지가 보였어..."
"........"
"너무 지독하게도 모든 게 닮은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그랬구나..."
괜히 그의 상처를 들춰내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가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게 보여서 좋았다. 그의 머리를 다 말리고 나란히 침대에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누웠다. 창밖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우리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활짝 열린 저 암막 커튼처럼 그도 온전히 나에게 마음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셔서 부럽다고 하면 화낼 거예요?"
"아니..."
"난 항상 혼자였어요... 그래서 혼자인 게 너무 익숙해서 외로움 같은 거 안 탈 거라고 생각했는데..."
"........."
"나도 외로움이란 걸 타더라고요..."
"......."
"그때 당신이 나타났어요 내 앞에...."
"........"
"근데 혼자였던 시간들이 너무 길어서 그랬는지... 당신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어"
"........"
"그냥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인데..."
"됐어 그 얘긴 그만하자...."
"왜 자꾸 피하려고만 해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주야..."
"화만 내려 하지 말고 나 좀 믿어주면 안 돼요? 그땐 당신을 잘 몰라서 그 진실들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그래서 도망친 거지만... 지금은... 당신을 알고 싶어요 나도..."
"그 진실이 너를 숨 막히게 할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널 결국엔 죽이고 말 거야"
"당신이 그러지 못한다는 거 알아요"
"사람의 천성은 변하지 않아!! 결국 또다시 내가 싫어져서 도망갈지도 몰라..."
"당신 말대로 내가 또 도망친다면..."
"..........."
"그때 당신 손에 죽게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
"약속해요- 그럴 일 없도록 내가 도와줄게요... 나도 이제 그만 외롭고 싶어..."
그도 나도 더 이상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확실히 그는 변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떠날 거란 두려움보단 결국 스스로 나를 죽이고 말 거란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런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너른 식탁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가 없이 이렇게 혼자서 밥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인 거 같다. 그가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 수록 나의 일상은 조금씩 자유로워 졌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방에 갇혀만 있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건 그와 함께여야 했지만 집 안에서의 행동은 그가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와 매일 이 식탁에 앉아 마주 보며 식사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그가 일이 있어 홍콩으로 갔단 소식을 오늘 아침에서야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그가 없었다. 내가 없던 그의 아침이 항상 이랬을까 견디기 힘든 쓸쓸함과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뭐예요?? 지금 무슨 일이에요??"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상대 조직이 습격했습니다. 하필이면 보스가 안 계실 때... 아가씨를 무사히 모셔오시라는 보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얼른 저를 따라오세요!!"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쯤 그가 돌아올까 그때 정원에 웬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리고 똑같이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와 상대 조직이 습격을 했다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하는 나를 우악스러운 힘으로 잡아끌고 가는 이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는!! 순영 씨는 무사한가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보스께서는 안전한 곳에 잠시 피신해계십니다. 저는 보스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내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나를 밖에 서 있는 차의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양옆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올라탔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단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먹은 것들이 뒤집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몸을 들썩이며 반항하려 들자 그들이 내 두 팔을 제압하고는 내 입을 손수건으로 막았다. 마치 그날 같았다 내가 처음 이 집으로 잡혀왔을 때처럼 반항을 하려 몸에 힘을 주었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결국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이- 이것 봐 그만 일어나지그래?"
"크윽... 누구..?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 아가씨, 백마 탄 왕자님이 지금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까"
"무슨 짓이야!! 이거 풀어 당장!!"
눈을 떴을 땐 낯선 곳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라고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그에겐 적이 많다는 걸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기둥에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턱 부근을 기분 더럽게 만져대는 이 남자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보스가 아주 너를 옆구리에 끼고 얼마나 애지중지해하는지 보는 내가 다 감탄했어"
"제발!! 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걱정 마- 이제까지 정은 생각해서 저승길 가는 곳 외롭지 않게 같이 묻어줄 테니까"
"당장 내꺼에서 더러운 손 치워-"
"아아- 드디어 오셨구먼 백마 탄 왕자님"
"순영 씨!!!"
"괜찮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 구해줄 테니까"
"아니야 순영 씨!! 이러지 마요 도망가!!"
그가 왔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누가 봐도 그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나를 미끼로 그에게 혼자 올 것을 강요했을 거란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그에게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울부짖으며 도망가라고 소리치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오호- 역시 대단해 왜 그 어린 나이에 보스가 됐는지 알 수 있는 싸움이었어"
"크윽.. 개자식.. 이런 게 바로 하아.. 키워준 개새끼가 주인을 무는 격이라고 하는 건가"
"이런- 그 말을 본인 입으로 직접 하시다니. 본인 얼굴에 침 뱉는 격이지 않나?"
"비겁한 자식- 그래서 넌 내가 되지 못한 거야-"
"웃기지 마!! 돌아가신 보스께서 남긴 유언장을 조작하고 그런 보스를 죽여놓고선 뭐? 키워준 개새끼가 주인을 물어? 비겁해? 내가? 여자한테 미쳐서 날뛰는 너 같은 새끼한테 들을 말은 아닌 거 같군"
"하아.. 그때 널 윽..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하아.."
"후회는 저승길이나 가서 하라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그는 많이 지쳐있었다. 뒤에서 묵묵히 그가 싸우는 걸 지켜보던 남자가 여유롭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웃고 있었다. 웃는 게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가 웃는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저 모습이 마지막일수 있단 생각들이 온통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돌고 돌아서 겨우 되찾은 그를 잃어버릴까 무섭고 두려워 두 눈을 꼭 감았다. 차라리 꿈이었음 좋겠다. 내가 그 대신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눈을 뜨면 그가 다시 나에게 잔인한 말들을 내뱉으며 소리쳐도 좋으니 제발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하아.. 여주야.. 눈떠봐.. 괜찮아 다 끝났어.."
"으으.. 순영 씨 흐윽.."
"미안 미안해- 나 때문에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 "
"아니야.. 흐윽.. 순영 씨 머리에서.. 피.. 많이 나요.. 어떻게 흐..."
"괜찮아 하아.. 난 괜찮아.."
둔탁한 마찰음과 신음이 난무했다. 눈은 감아버렸지만 손이 묶여있어 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 소리들이 잦아들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묶여있던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눈앞에 피를 뒤집어쓴 채 서 있는 그에게 안겼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는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해주었다. 그의 품이 너무 넓고 따뜻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죽어!!!"
"안돼!!!"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의 수하들이 들이닥쳐 상황을 마무리 지었지만... 내 옆구리는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대로 주저앉는 나를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그가 보였다. 그에게 맞고 쓰러진 남자가 손에 단도를 쥐고 일어서는 걸 봤다. 겨우 되찾은 그의 미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안겨있던 몸에 힘을 주어 몸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내 옆구리에 단도가 박혀들어왔다.
"여주야!! 하아... 안돼... 왜!! 왜그랬어!! 나같은거 때문에 네가 왜..."
"하윽.. 괘..괜찮아요..나아... 하아... 나.. 안죽어... 당신.. 하윽... 두고.. 안 죽을..거야..하아.."
"제발... 흐윽.. 왜!!!! 죽어야 마땅한거 난데!! 네가 왜!!"
"하아..아냐..흐..나..믿죠..하윽.. 나.. 하아.. 이..손..안놓는..다고..흐..말했잖아..하아...울지마요..나..윽..당신..혼자...안둬..이제..하아.."
"흐윽..여주야...흑..죽지마...니가..흐..죽으면 나도...흡...죽어..."
꼭 그날 밤 같았다. 분노로 내 위에 올라타 내 목을 조르며 울고 있던 그의 눈빛이 꼭 이랬다. 죽지 마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나도 죽기 싫어요 순영 씨 어렵게 잡은 이 손 나도 놓고 싶지 않아 무서워요 당신 마음이 이랬나요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까 무서워요 그러니까 제발 내 눈에서 사라지지 마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붙잡고 또 붙잡고 싶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였다. 하지만 몸이 말이 듣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서 등을 보였다. 가지 말라고 소리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엄마~ 이것 봐요~ 지유가 하늘을 날고 있어요~"
"우와~ 지유 하늘 나니까 어때요~ 신나요?"
"네~ 아빠 더 높이 올려주세요~"
"여보! 그러다 애 떨어지겠어요- 권지유! 너 또 아빠한테 비행기 태워달라고 졸랐지!"
"에이~ 애한테 왜 화를 내- 지유야 꽉 잡아~ 더 높이 올라갑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지독한 악몽이라도 깨어나면 그만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게 많을수록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법이다. 그것을 모두 내려놓으면 홀가분할 것을 미련하게 다 들고 가는 방법밖에 모르는 남자를 만났다. 그런 그의 손에서 짐을 빼앗고 대신 내 손을 쥐여주었다. 그는 미련 없이 반대 손에 쥐고 있던 것들도 다 버려버리고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비로소 환하게 웃는 그와 마주 섰다 이제 온전히 우리 둘 뿐이었다. 아니 우리 사랑의 결실인 예쁜 딸까지 셋이서 행복한 날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여보- 만약 그때 내가 그렇게 가버렸으면 정말 나 따라서 갈 생각이었어요?"
"아니- 내가 그랬잖아 살아서도 죽어서도 넌 내 거라고 아무 데도 못 간다고 박제라도 시켜서 곁에 두려고 했지-"
"당신... 농담이죠?"
"아니- 진심인데..."
"..........."
"풋, 농담이야 농담!"
"진짜- 갈수록 못됐어 정말"
"만약에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상상만 해도 숨 막혀 그때 그렇게 가버렸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었겠지. 넌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지금도 그 맘 변치 않죠?"
"응- 내 손 이렇게 꽉 잡아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 행복해서 죽을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다. 물론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니까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봐주세용~ |
일단 이런 급 전개 급 마무리에 당황하셧을 독자님들에 죄송스런 마음에 구독료는 설정해 두지 않았습니다.(일주일 정도 뒤에 설정해둘 예정입니다...) 다들 덩싸고 안닦은 찝찝한 기분이시겠죠??ㅠㅠㅠㅠ 뭐 변명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더이상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ㅠㅠ 제가 벌려놓고 제가 못 주워담는 꼴이라니... 그렇다고 연중을 할수도 없고 독자님들을 기다리게 하는것도 아니라 생각해서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사실 저도 이게 이렇게 길어질줄 몰랐어용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독자님들이 좋아해주시고 피드백 해 주셔서 였습니다. 저도 이제 집착순영이를 내려 놔야 겠네요ㅠㅠ 안뇽ㅠㅠ 수녕아ㅠㅠ 잊을수 없었어 너의 솔로무대ㅠㅠ 다음 작품은 뭐가 될지 모르겠어요ㅎ 일단 메모장에 벌려놓은 것들이 많은데 제가 드디어 7개월만에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내일부터 출근을 하게되서ㅎ 글잡에 올 시간이나 있을련지ㅎㅎ 그래도 주말마다 쉬니까ㅎ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겠죠?ㅎ 부족한 제 글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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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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