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같은 네가 참 좋다.
SPRING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따스한 봄날이었다.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창섭이는 노래 실력만으로 대학에 붙었고 ㅡ호원대라고, 실용 음악계에서 알아주는 대학이라는 것 같다.ㅡ 나 또한 내 꿈을 이루려고 노력한 대가로 나름 괜찮은 대학에 붙었다. 합격 통보가 나도 창섭이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보통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으면 자랑하고 싶어지지 않나?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애초에 가수라는 꿈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고, 본인도 그걸 알고 합격을 예감했을 수도 있으니까. …성격 상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아이였다. 이창섭이라는 사람은. 보드 선수를 꿈꾸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솔직히 노래를 정말 잘 부르던 아이라 놀라움은 없었지만, 연예인들이 얼마나 힘든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걱정은 남들이 할 뿐 본인은 상관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매일 보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졌을 때, 나는 이창섭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한 못 볼 꼴 다 본 사이였고, 그만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는 존재했다. 남녀 칠세 부동석? 난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랑 창섭이는 그럴 수가 없는 사이였으니까.
“조심 좀 해라.”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이었다. 이창섭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훅 들어와버린 건. 아, 어… 생각지도 못한 설렘에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왔었지. 이때부터였나, 어린 마음에 창섭이의 연락을 다 피했었다. 20년 동안 지켜온 우정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 아니다. 뜻밖의 사랑의 감정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었을까? 아니다. 그냥, 이때의 나는. 이창섭이라는 사람을 친구가 아닌 짝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스스로를 부정했을지도 모르지. 짝사랑의 아픔을 겪어본 적 없기에, 버림받는 것이 두려웠다. 나 좋자고 달려들었다가 다시는 못 보게 되면 어떡해? 이게 솔직한 감정이었나. 곧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불릴 텐데 나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도 싫었다. 한 일주일쯤 연락을 피했을 때, 창섭이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덕분에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 문자 썼다가 지우기를 수백 번 반복했지. 내가 이창섭 때문에 이런 것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먼저 피해놓고 왜 연락을 기다리는지 묻는다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짝사랑은 이기적인 거라고.
“설아, 방에 있니?”
“응, 왜?”
“창섭이가 왔네.”
헉.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왜 온 거지? 혹시 화났나? 사람이 1초 만에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안 볼 거니? 지금 나가! 대충 보이는 카디건을 걸치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에도 ‘날 찾아왔네’ 하는 설렘이 생겼다…. 나 진짜 네가 좋나 봐, 창섭아. 대역 죄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창섭이의 앞에 섰는데, 언뜻 보이는 표정이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입을 열었다. 이러한 내 생각이 무색하게도 급하게 코를 찌르는 익숙한 향이 몸을 감쌌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새하얘졌었거든. 그러니까 대충, 얘가 날 안았다고 해야 하나. 부드럽게 감싸 안은 게 아니라, 아이가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것처럼, 그런 식으로 안았다고 표현하면 되겠다.
“야, 야아… 이창섭…….”
“가만히 있어봐.”
“어?”
“나 지금 심장 떨려.”
일주일 만에, 창섭이의 목소리로 처음 듣게 된 말이었다. 창섭이 특유의 깨끗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빨개진 볼에 스쳤다. 어릴 적 학예회에서 연극의 주인공을 맡았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은 사고 회로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무슨 의미야? 네 팔이 닿은 내 어깨, 내 허리.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는데, 깊은 한숨을 내쉬던 창섭이가 나에게서 떨어져 두 손으로 팔을 꽉 잡으며 눈을 마주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질 것만 같던 심장이 폭발해버리는 듯했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버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떨림이었다. 설레기도 설렜지만, 미안해서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괜히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는데 ‘야.’ 하는 묵직한 목소리에 단호한 눈동자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 연락 피했어?”
아, 그게. 변명하듯 흐르는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이 한마디 속에 모든 것을 담아 창섭이의 품에 안겨주었다. 나 네가 너무 좋아. 그래서, 무서워서 연락을 못했어. 사랑이 처음이라, 너에 대한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나오지 않는 말들을 속으로 곱씹었다. 내 이런 반응에도 창섭이는 화를 내거나, 따지거나 하지 않았다. 이유 없는 일주일이면 욕을 해도 못마땅할 텐데. 아직 온몸에 남아있는 온기가 살랑이는 봄날처럼 따스했다.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창섭이는 한다는 말이, 그래. 뭐… 못 말할 것 같으면 하지 마라.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아는 아이는, 이창섭이라는 사람은.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돌이켜보면 본인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해줬고, 본인의 기분보다는 내 기분을 먼저 고려해줬다. 어쩌면 내가 창섭이를 좋아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배려 받는 일이 너무 익숙해져서 설렘이라는 감정 뒤에 숨겨져 있었던 거겠지.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창섭이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