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tions
w. 임시저장함
종현이 형의 성의는 고맙지만 태민은 죽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놓고 약만 챙기곤 학교에 도착했다. 입 맛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늦었다고 종현이 형이 전화로 미리 통보를 해놔도 시간이 여유롭진 않았기 때문에 밥 먹는데 시간을 쓰기엔 아깝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먼저 교무실을 들릴 까 하다가 교실에 먼저 도착한 태민이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슬쩍 보았다. 평소 애들을 재우러 수업을 들어 온다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기가 시간이다.
역시 내 예상과 다르지 않게 수업을 듣는 절반의 이상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단짝인 모범생 진기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정도이므로 태민은 괜히 지금 들어갔다가 자신도 지루하고 졸린 수업을 받고 싶진 않아 복도에 앉아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마땅히 할 것이 없던 태민이 교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으로 꺼내 만졌다. 그러다 문자 메시지 함을 열어 지금까지 확인하지 못한 문자들을 확인했다.
문자엔 종현이 형 외 친구들의 문자가 꽤 와 있었다. 내일은 학교에 오냐, 학교 안 와서 좋겠다, 아픈 건 괜찮냐 등등 엄마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문자를 넘기면서 읽는데 저장되지 않는 번호로 온 문자가 있다. 몇 번 넘겨도 똑같은 번호로 문자가 꽤 와 있길래 뭐지? 의아한 태민이 내용을 보는데 전에도 본 적 있는 내용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태민 어디야
태민아
보고도 씹지
전화 좀 받아
야
짤막한 문자들을 보고야 태민은 이 번호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민호 형. 문자도 꼭 자기같이 보낸다. 아마 옥상에서 사건 이후로 너무 미워서 번호를 지운 것 같았다. 그래서 문자를 받았을 때도 보고도 전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신 연락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는데.. 하지만 어제 직접 형이 찾아와서 사과도 했으니 태민은 손가락을 움직여 다시 번호를 저장하였다.
대신, 민호 형이라고 하면 너무 친해 보이니까 최민호 선배님이라고 해놔야지. 그리고 곧 있다 종이 치고 선생님이 앞문으로 나오는 동시에 반대로 태민은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뒷문을 열어 교실로 들어갔다.
“어! 이태민 오랜만!”
제 자리를 찾은 태민이 가방을 책상에 내려 놓는데, 기가 쌤의 위력으로 전멸한 아이들 사이로 겨우 유일하게 살아남은 진기가 태민을 알아보곤 반가운 인사를 건낸다. 안녕. 태민이 웃으면서 진기의 인사를 받아준다.
“아픈 건 괜찮아? 담임이 너 오면 교무실로 오랬는데.”
“응, 괜찮아. 교무실?”
역시 교무실부터 들릴 걸 그랬나. 진기의 말에 태민이 알겠다며 다시 교실을 나와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은 내게 별말 하지 않으셨다. 그냥 이제 건강은 괜찮냐는 안부만 묻고 내가 없는 동안 진기가 많이 날 그리워했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만 한 게 다였다. 굳이 교무실로 날 부르지 않아도 될 만한 이야기들. 이번에 담임 선생님은 자기 학생들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아무튼 이제는 교실로 돌아가도 좋다며 손에 사탕을 쥐여주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교무실을 나오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내가 그렇게 찾았던 사람.
지금 내 눈이 잘못 된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 민호 형의 뒷모습이었다. 태민은 혹여나 놓칠까 봐 얼른 민호를 따라갔다. 저 멀리서 긴 다리로 걸어가는 사람이 혹여나 없어질까 달려가는데도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평소 달리기를 못 하던 태민에게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리고 옥상으로 가는 듯한 형의 모습에 옥상에 가는 사람은 얼마 없으므로 달려가는 것을 멈추고 몰래 형을 따라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이태민?”
갑작스러운 태민의 등장에 민호가 놀란 듯 태민을 보았다. 근데 일단 따라오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따라올 때는 뒷모습만 봐서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민호 형의 얼굴을 보니 또 뭐가 간질간질 올라온다. 결국, 태민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고백, 진짜예요?”
“......”
“형 진짜 저 좋아해요?”
“..어.”
이태민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민호가 태민과 눈을 마주하고 웃으며 그때처럼 태민의 머리를 맘껏 헤집는다. 그런 형의 손길에 또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는 자신이 미웠다. 형은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는데, 나만 혼자 부끄러워하는 게 나만 이상한 애가 된 것 같다. 형은 그런 말이 쉽게 나와요? 전 이렇게 힘든데. 태민이 입술을 앙다물고 민호를 올려다본다. 입술 먹지 마. 민호가 태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 툭 치자 손길을 쳐 낼 줄 알았던 태민이 반대로 그 손을 잡았다. 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자꾸 형 생각이 나요.”
“뭐?”
“형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잠시 뜸을 들이던 태민이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기고 까치발을 들어 민호에게 입을 맞추곤 재빨리 떨어졌다. 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펼쳐 아까 선생님께 받은 사탕을 태민이 민호의 손에 직접 사탕을 올려 쥐여주며 말했다.
“저도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대로 민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뒤돌아 옥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쳤다. 태민은 자신이 민호에게 준 사탕을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딸기 맛일 거라고,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딸기 맛은 태민이 가장 좋아하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