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사연 읽기전에 오늘은 할 일이 있죠?"
"...."
"오늘, 이 시간 만큼은 작가님이 저 터치 안하기로 했어요 열한시분들. 제 시간입니다. 다아 제 시간이에요."
"...."
"많은 분들이 왜 하필 열한시이냐, 또 굳이 라디오 방송이름까지 열한시로 한 이유는 뭐냐, 라는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별거 아닌데, 그냥 열한시가 좋았어요. 처음 라디오 DJ를 하겠다고 결심한 시간도 열한시였고, 작가님과 피디님이랑 미팅해서 최종 결정된 시간이 열한시쯔음, 됬었나?"
"...."
"열한시분들과 이렇게, 만나게 된 시간이 열한시니까요. 저에겐 소중한 시간입니다. 밤 열한시."
"...."
"작가님 저 터치 안한다하셨으면서 결국 재촉하시네요. 아이구, 저렇게 저를 재촉하네요. 네 네, 사연 읽겠습니다. 오늘도 익명이네요."
"안녕하세요 민DJ님. 매일 열한시와 함께 잠에 들려고 노력하는 학생입니다. 항상 열한시에 나오는 고민들과 민DJ님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저도 용기내서 사연을 보내네요.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왔는데, 아직 새롭고 신기한 것 투성이여서 적응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아, 저희 학교는 공학인데 분반이라 여자만 있는 반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처음엔 그저 같은 반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못하는 것도 없는 아이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 그 아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성격도 좋아보이고, 모난 구석 없이 바른 아이 같았거든요.
그런데 날이 갈 수록 그 아이를 피하는 제가 보였어요.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상해서 다른 곳으로 가고, 나보다 잘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지고요. 며칠 전에 깨달았어요. 제가 그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요. 처음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정말 이 감정이 열등감인가 싶어 곰곰히 생각을 해봤는데 결국 열등감이 맞았어요. 제가 그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 아이는 제게 감정 상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에서 인기도 좋은 아이인데 제가 너무 나쁜걸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열등감 느끼는 저 스스로가 너무 밉고 화가 나네요. 그렇다고 이 열등감을 잠재울 수도 없어요. 다 제 탓인거겠죠? 중학교 때까지는 겪어본 적 없는 일인데, 고등학교를 올라오고나서 이런 일이 생기니 요즘 내내 잠이 잘 오지 않아요. 그래도 열한시 덕분에 괜찮은 것 같아요.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어요 민DJ님. 그럼 제 사연 마칠게요. 라고, 익명 전ㅇㅇ 씨가 사연 보내주셨습니다, 사연곡은 안아줘. 가사가 꼭 다른 곳에 있는 나 자신같아서 매일 듣는다고 하시네요. "
"전ㅇㅇ 학생.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힘든 일이 생겼네요. 그렇죠? 아, 지금 문자 오고 있는데...대부분 자신들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반응이시네요 우리 열한시분들."
"...."
"너무 현실적일 수도 있는데, 세상에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또한 그런 감정에 많이 허덕여봤으니까요. 고작 하루를 지내는데도, 나 스스로는 수만가지의 감정을 느껴요. 신났다가, 짜증나다가, 권태하다가, 화나다가, 아무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정신이 팍 들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권태해지고. 그런 순간에 무언가 자극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죠. 예를 들어, 음. 시험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주위를 둘러봤는데 유독 어떤 친구만 막 공부를 미친 듯이 하고 있는거에요. 딱 그게 보이는거죠.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요. 난 하기 싫어서 이렇게 있는데 저 아이는 저렇게 집중하고 있구나,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거기서부터 감정이 뒤틀리는거에요. 나와 다른 사람을, 나와는 틀린 사람으로 분류시키는거죠. 저 아이는 나와 틀려. 생각하는 방법도 다를거야. 그렇게 되버리면 격차가 생겨요. 어떠한 상황이던 누군가에게, 아니면 어떠한 상황에 그런 격차가 생겨버리면 이젠 나 스스로의 가치는 사라지는 거죠. 나보다 남의 가치가 더 돋보여요. 나는 가치가 없고, 변화가 없을거고, 무능하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내가 아닌 남들은 무엇이든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아요."
"저도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인데, 나와 똑같이 시작했던 아이는 너무 능숙하게 잘하는 거에요, 나한테 까다롭기만한 일을. 그래서 전 속으로 생각했어요. 저 아이는 나보다 이걸 잘하는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면 되는건데 이제 전 더 깊게 들어가죠. 충분히 저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상대방이 저랑 비슷하게 잘해버리니 욕심이 사라지는거에요. 아, 저 아이는 이것도 나보다 잘하겠구나. 난 특별하지 않구나. 거기서 시작된거에요. 사소하게 시작한 내 감정이."
"이건 어떨까요. 그 감정의 뿌리를 잘라보는거에요. 힘들면 한 번에 자르지 않아도 되요. 살살 달래도 보고, 매정하게 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시작하는거에요.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 이라고 분류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니 내게 열등감을 주었던 그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혹은 이제 그런 일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등. 의외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괜찮아지신 분들이 계시죠. 그러나 그 뿌리는 달라요. 분명 다를거에요. 나보다 잘난 아이이지만 분명 넌 그 아이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 되뇌여도 실은 아무런 변화가 없죠.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렇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도 누군가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몰라요."
"......"
"나 스스로를 믿고, 나 자신을 한번 봐볼까요? 두려워서 꺼내기 싫었던 내 유약함들, 얼룩진 거짓말들, 은근슬쩍 넘겼던 합리화들. 다 꺼내서 빠짐없이 어루만져주는거에요. 그럼 분명 달라져있을거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나를 사랑한다해도 그 사랑이 보이지 않아요. 고등학교 올라가자 마자 너무 힘든 일이 생겨서 어떡하죠 우리 열한시? 그렇지만 전 믿어요. 소중하지 않은 감정은 없어요. 어떠한 형태이던, 다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감정이잖아요."
"네, 벌써 시간이 끝나갈 쯤이네요. 제가 이렇게 말한거 나중에 들어보면 좀 많이 오글거리던데. 열한시분들은 들으시면서 막 괴롭지 않으시죠? 만약 그러면 게시판에 조금..조금만 글 올려줘요. 알았죠? 조금만? 그럼 오늘의 열한시, 여기서 마칠게요."
"우리 열한시, 전ㅇㅇ양. 잘자요"
=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휘둘리는 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힘든 건 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거였어요.
글은 저렇게 써놓고 정작 스스로가 가장 소심한 사람^^! 자신감이 많이 없네요.
너무 따뜻한 댓글 다 기억해요. 어떻게 잊겠어요. 너무 고맙고 고마워서 어떡해야할지를 모르겠어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