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 10월의 날씨
01
깨끗하고 한적한 거리.
그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 카페에서는 언제나 향긋한 향기가 났다.
늘 복작거리는 바쁜 도시 안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공간.
그 포근함이 좋아서, 그 따뜻함이 좋아서 나는 줄 곳 이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곤 했다.
그날도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쌀쌀한 가을이었다.
밤색 머리의 카페 주인은 웃는 모습이 아주 예쁜 남자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이어서 가끔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분명 여기를 찾는 사람들 중 그의 얼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다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주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남자였다 그는.
고소한 커피 향이 음악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얀 머그잔에 담겨 나온 카푸치노 위의 우유 거품을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너는 언제나 그랬듯 약속시간에 늦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불평 없이 너를 기다렸다.
아마 나는 그때쯤 이미 지친 걸지도 몰랐다.
카페 사장은 아주 친절하고 목소리가 좋은 남자였다.
가끔 손님이 나밖에 없는 시간에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꽤나 서정적인 음악을 틀어 감상에 젖게 하는 날도 많았고,
비라도 오면 조금 더 달달한 커피를 내오곤 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빙긋-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 맛 어때요?'하고 먼저 물어오기도 했다.
내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그도 그녀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예쁘고 또 아주 부드러운 인상의 여자였다.
긴 생머리가 탐스럽다고 나는 매번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매번 그녀가 오는 시간이 다가올 때면 그는 창가를 서성이다가,
이내 그녀가 눈에 들어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카운터 뒤로 걸어가곤 했다.
마치 자신이 전혀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숨겨봐야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녀가 문을 밀고 들어오기 전부터 그의 입꼬리는 이미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에서 한참 살가운 이야기를 하곤 했고,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듣기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매번 똑같은 라테를 시켰고 그는 그걸 들고 그녀에 자리에 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살며시 잡은 그녀의 손은 항상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 예쁜 커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처럼.
나는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홀짝였을 뿐이었다.
가을밤은 짙어져 가는 듯했고 뒤에서는 예쁜 사랑의 속삭임이 오고 갔다.
"사랑해"
하고 그가 말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학연아"
나는 그저 이름이 학연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
약속시간보다 약 30분 정도 늦은 너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나는 가을 오후의 그 어스름함 틈에서도 단번에 너를 알아봤다.
참 애처로운 일이었다.
실루엣만으로도 나는 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주 멀리 있었도, 또 아주 가까이에 있어도 나는 매번 너를 찾고 있었다.
과연 너도 그랬을까?
그저 의문뿐이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이제는 까만 커피 가루 흔적만이 내 머그잔 아래 침식되어 있었다.
그 검은 테두리를 나는 가만히 들여다봤다.
30 분 늦은 것은 양호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조금 긍정적임으로서 그 순간을 애써 피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가을 공기를 뚫고 내게 걸어오던 너는
그날도 어김없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멋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너를 사랑하고 있었고,
조금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의 일부처럼 너를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학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너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기 전에 커피를 주문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미소로 주문을 받은 학연은 네가 돌아서자 그녀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언제 봐도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내 나는 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갑을 정리하며 성큼성큼 걸어온 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네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너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기에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언제나 그렇듯.
"늦었네"
내가 말했다.
너는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검은 그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응, 바빴어"
나는 '괜찮아'하고 대답한 뒤 다시 내 머그잔을 바라봤다.
천천히 그 둘레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커피 더 마실래?"
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영화 보고 왔어"
내가 말했다.
"무슨 영화?"
택운이 물었다.
"전에 내가 같이 보자 그랬던 영화"
"아- 그거"
"재밌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진동벨이 소란스럽게도 울려댔다.
택운은 커피를 가지러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의 지갑을 바라보다 이내 손을 뻗었다.
그의 성격만큼이나 심플하고 깔끔한 지갑이었다.
안에 든 것도 별로 없었다.
카드, 주민등록증, 약간의 현금 같은 것들.
내 사진이나 당신 사진이나 그런 것들은 없었다.
나는 이내 그 지갑을 내려놨다.
"저녁에 뭐 할까?"
다시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내가 물었다.
사실 나는 너와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굳이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나는 다만 너와 함께 하고 싶었다.
무엇이든지 말이다.
"글쎄"
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영화 보러 갈래?"
내가 물었다.
"저번에도 못 봤잖아"
"맘대로 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택운은 말했다.
그러고는 제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만난 지 채 20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아니면 그냥 산책이나 할까?"
"걷는 건 좀... 귀찮아"
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구나"
"응, 조금"
"그럼 왜 나온다 했어 그냥 집에서 쉬지"
문득 내가 말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택운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나른한 눈을 나는 마주 봤다.
이상하게 외로웠다.
너를 만나는 날마다 이상하게 외로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의 365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
어느샌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워져서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권태에 빠진 건지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버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쓰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정택운이라는 사람, 그러니까 너에 대해서는 그 어떤 단어도 적어내려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매번 고민했다.
너를 사랑하면서 나는 매번 애먼 밤을 뒤척이며 보냈었다.
진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가끔 이렇게 감성적인 내가 나도 미웠다.
택운의 한숨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계속 머그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학연의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에는 우리 세 사람뿐이었다.
"왜 울고 그래"
택운이 말했다.
"..."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답답한 듯한 그의 한숨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택운은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다 이내 나를 바라봤다.
"나랑 있을 땐 내 생각 조금만 해주며 안돼?"
내가 물었다.
"하고 있어"
그가 대답했다.
"거짓말"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속 시계 확인하잖아,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없으면서"
"..."
택운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해 우리"
"..."
"정택운"
내가 그를 불렀다.
"...그만해"
문득 그가말했다.
"..."
"넌 항상 그래, 내가 피곤한 거 알면 조금만 이해해 줄 수 없어?"
택운이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이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눈물이 어느새 멎었는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머그잔 안으로 떨어진 눈물들도 이내 커피 가루와 섞여
짭짜름하고 씁쓸한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해해, 계속 이해했고, 외로워도 꾹 참았어"
숨을 들이쉬고 나는 이야기했다.
처음이었다 너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
"택운아, 난 이상하게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아"
그 말은 들은 택운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감싸 쥔 그 하얀 손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작은 신음 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택운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관두자, 이러다 진짜 싸우겠어"
그가 말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분명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해서 더 너와 함께 하고 싶었고,
마음 아픈 일이 생기면 너와 함께 풀어나가고 싶었다.
가끔 서운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기는 날도 많았고,
너에게 조금이나마 서운하게 했다 싶으면 사과하고 싶어 안달했었다.
아주 달콤했던 너와의 입맞춤이라던가,
아주 새콤했던 너와의 일탈들이 내 다이어리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적혀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새콤달콤한 것이 사랑이었을까?
지금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권태라고 하기엔 너무 막막했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씁쓸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택운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마른 세수를 했다.
"넌 너무 어려워"
하고 그가 말했다.
"이런 게 싫으면 다른 사람 만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였던 그 책의 제목이 어느새
'과연 너는 나를 사랑하는 가'로 바뀌어버렸다.
과연 그 가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택운에 의하면 나는 그날 아주 이해심 없고 또 성격 어려운 여자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아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잘못되어가는 걸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가을 전부터 천천히 식어가는 우리 사이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만큼이나 나는 너를 사랑했다.
"다른 사람 만나라고?"
내가 물었다.
택운은 나를 바라봤다.
표현이 많지 않은 네 얼굴에 문득 실수했다는 표정이 지나갔다.
이내 네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일 수도 있었다.
나는 네가 말로 해주길 바라고 있었음에도 말 안 해도 너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과연 내 잘못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운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커피 잔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날 나는 그와 이별을 했다.
가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