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ㅡ 50. 내가 추구하는 연애 방식이였다. 내가 더 좋아해, 내가 훨씬 더 좋아해. 형식적인 말들은 얼마안가 치부가 밝혀지기 일쑤였다. 내가 더 좋아해, 라는 터무니없는 말 보다는 나도 좋아해. 라는 현명하고 간단명료한 대답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편협되어 오로지 한 쪽에서만 사랑이 넘쳐나는 연애를 하는 중이라면, 한 쪽으로 치우쳐 기울여진 같은 연애를 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실패한 연애일 것이라며 정의를 내렸다. 실제로도 그러지아니한가. 사과 열개, 체리 한 개를 저울에 달아놓고는 무게를 재는 연애. 그걸 어떻게 같은 연애선 상에 있겠다고 할 수 있을까. 깊이부터가, 느껴지는 무게부터가 다른데. 필시 이것은 실패한 연애이리라.
“ ..향수 냄새.”
“뭐, 불만있어요?”
그리고 난, 내가 그렇게나 증오했던 실패한 연애를 몸소 실천하는 중이였다.
*
쇼윈도 드라마 01 :: 악연의 발전 가능성
머리가 총명한 쓰레기는 참 지능적으로 내 기분을 더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듣자하니 공부를 조오온나 잘했다던데, 머리를 그따구로 쓸 거면 나를 주지 왜 존나 이상한데에 재능 낭비를 하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 새끼는 나 엿 먹이려고 태어난 게 분명해, 진짜로. 머릿 속에 든 게 내가 어떻게하면 더 기분이 좆같을까, 더 기분이 잡칠까. 이 생각을 항상 하며 사는 게 분명했다. 내가 자신에게 쓴소리 하나 못하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그걸 이용하는 꼴이 너무나도 좆같았다. 아... 존나 개새끼, 쓰레기 새끼. 이 세상 모든 새끼를 동원해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욕을 해도 내 기분은 크게 나아지지를 못 했다. 쓸데없이 미워하는 거에는 또 약해서, 암만 독하게 맘을 먹어도 그를 증오한다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독한 감정을 가지진 못했다. 진짜, 존나 쓸데없이도 나는 정이 유독 많았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가며 쓰레기 욕을 해댔더니 어느새 미운 정이 콕 박혔나.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저 인간이 하는 짓은 꼭 어린애 같았다. 내일모레 서른인데 어떻게 저렇게 관심 필요한 청소년마냥 구는 게 좀 신기하기도 해서 처음에는 콧방귀나 껴댔는데, 이제는 또 그 정도가 심해져서 콧방귀도 못 뀔 노릇이다. 지가 애야? 어? 허, 존나 이젠 기가찬다.
오늘도 까였다. 시발.. 항상 있는 일이였지만서도 여자로써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내가 매력이 없나, 아니. 이 놀음판에서 매력 운운하는 건 좀 어이가 없겠지만서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애인이 밥 한 번 먹자는데, 그게 그렇게 싫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씨발! 이쯤되면 진짜 우리 둘이 전생에 부부는 아니였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일이 좆나게 안 풀렸다. 아니, 근데 우리가 이런 속사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다. 심지어 우리 매니저도 모를 걸.. 아, 갑자기 존나 엄마 보고싶다. 아빠 사업 하나 살리겠다고 쓰레기가 난동피우는 것도 꾹꾹 눌러참고 있는 나를 엄마가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 시발, 잠깐만 눈물. 나같은 딸래미 하나 둬야지 저 새끼가 정신을 차리지, 어떻게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해주고 이기적으로 살아쳐먹었으면서 지금까지 저 회사가 잘 돌아가는 지 모르겠다. 저 새낀 진짜, 자기 할아버지한테 감사해야됨.
사실은, 오늘은 가서 그에게 미운 털이 콕 박힌 나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나한테 가졌을 뭣모를 오해도 풀겸 저녁이나 먹자고 했는데, 주제를 넘는 것 같다며 나를 무슨, 씨발 자기한테 안달 난 여자로 만드는 게 아닌가. 내가 진짜 존나 억울해서... 이때까지 그 새끼의 멱살을 잡으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네 새끼가 왜 그렇게 날 좆같이 구냐고 따지고 싶었을 때도 한 두번이 아니였는데, 오늘은 좀 그 감정이 격해져 괜히 주책맞게 그 잘난 면상떼기 앞에서 울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물고 그대로 그의 사무실에서 나와버렸다. 아무리 랜선 커플이라고 해도, 잘해주는 게 그렇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가나. 자꾸만 삐뚤어지려는 마음을 머리가 알아줬는지 나도 모르게 툴툴 나온 입술에 엉덩이를 씰룩 쌜룩 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씨발! 매니저도, 코디도 없고, 내일 스케줄도 없으니까 마시고 죽을 생각이나 해야겠다. 그와 얽힌 이후로 이상하게 내 집 냉장고에는 술이 종류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이러다가 술배라도 나오면 촬영도 못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미친... 얼른 결별설이 나와야 저 상판떼기를 안 보든가하지. 뾱뾱! 이젠 차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저 알림음도 날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좆같았다. 아, 성격파탄자가 될 것 같다.
그니까, 좋게 포장해서 말하자면 그와 나는 지금 쇼윈도 커플이다. 그의 여동생을 통해 좋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고 몇 달전에 기사가 난. 결혼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조금은 긴 시간동안 커플로 전국에 알려지고, 막상 결혼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결국에는 결별을 할 쇼윈도 커플. 이에 따르기 위해 우리의 데이트에는 항상 스캔들 전문 기자가 따라다녔다. 백화점에서의 쇼핑 데이트도, 영화관 데이트도, 식당 데이트에서 찍힌 사진도 모조리 그 기자 손에서 나온 사진이였으며, 이는 온전히 보여주기 식이였다. 양가 부모님에게 보여주기식, 또 그, 뭐시기, D회사 외동딸인가, 그 여자한테 보여주기식. 그리고, 열애 기사가 나옴으로 인해 아직도 속고있을 몇 천만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식. 쉽게 말하자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몰래카메라’라고 칭해도 좋을 것 같다. 허나, 앞서 말한 몰래카메라와 다를 것이 하나있다면, 언제까지고 이게 몰래카메라라고 밝혀질 일이 없다는 것이였다. 열애 인정 기사를 시작으로, 결별 기사까지 나면 우리의 드라마는 끝이나고, 몰래카메라도 끝이 난다. 정해진 각본 안에서.
근데, 문제는 이 모두를 속일 일종의 몰래카메라가 일이 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커져버렸다.
왜냐.. 그게, 아, 진짜. 내가 맨날 그렇게 욕을 일삼았던 그 쓰레기 새끼를, 내가.. 내가 그니까, 좋아한다. 아.. 어떻게 내가 말해도 진짜 병신같은데, 나도 이걸 제어를 할 수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점이다. 그래, 생각해보면 오늘 그의 사무실에 가서 다짜고짜 밥을 먹자고 존나 당당한 신여성마냥 제안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였을 거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는 말이 있다. 더 사랑을 주는 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지게 되어있다. 매일같이 상처를 받다가도 가끔가다 한 번, 미끼를 주듯 상대가 베푸는 호의에 성 하나 내지못하고 헤벨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신마냥 굴고. 근데 그게 딱 내 꼴이다 이거다. 내가 그 등신이다. 그도 내가 등신이란 걸 너무 잘 아는지, 그 누구보다도 그가 등신 엿먹이는 짓을 참 잘했다. 내가 뭔 말이라도 하면,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한컷 치켜올린 눈썹과, 우리 둘의 사이보다 훨씬은 더 가까워보이는 미간하며, ‘네가 뭔 상관?’ 의 타이핑한 문자를 그대로 형상화시켜주듯하는 벌레보는 듯한 눈빛까지. 씨벌, 누가보면 형사한테 강제심문 당하는 죄수인 줄 알겠다.
악연은 데뷔 후에 이어졌다. 생 초짜 신인이였어서 떡하니 좋은 배역이 굴러들어올 리는 없었고, 시간이 나면 배역 오디션을 찾아 보러다녔다. 그에 운이 좋게 걸린 영화를 데뷔작으로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현주, 맞아. 현주였다. 제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덮어쓰고 처음으로 연기를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이름. 데뷔를 스물 두 살에 했으니, 어연 4년 전일이였다. 데뷔 전부터 걱정하던 성접대는 큰 소속사의 도움으로 막상 걱정이 될 만한 문젯거리는 아니였고, 주변 사람들은 운이 진짜 좋은 케이스라며 추악한 연예계의 측면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종종 내게 들려주었다. 예를 들어, 중년 탑 배우 A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룸의 황제다, 결혼 후에도 이곳 저곳에 씨를 뿌리느라 곤혹을 치른 어린 여자들이 많다하는 이야기들. 출처가 없는 유언비어들은 놀랍게도 어느 정도 하나 둘 씩 사실임을 입증해갔다. 연예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몇 번이고 오르내리락하던 탑배우 A는 나의 데뷔작에서 암투병 중인 엄마를 일까지 그만두며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나의 아빠로 연출되었으니까. 집 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기다릴 아내의 품이 아닌 때깔좋은 반지르르한 어린 여자들의 다리 사이를 품을 탑배우 A가, 작가의 손에서 엄마를 지독히도 아끼는 팔불출 남편으로, 하나뿐인 외동딸을 사랑하는 다정한 아빠로 재탄생되었다. 짜여있는 각본, 예정된 행동. 모든 컷이 끝나고 일정한 초를 세면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작가의 세계는 종료가 된다. 점차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자신이 더 괴로운듯 가슴께를 부여잡고 울부짖던 남편은 컷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어린 여자를 품을 탑배우 A로 탈바꿈하였다. 그 현실을 보며, 처음으로 허망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데뷔작이 너무나도 잘 됐다. 주인공들의 명연기 덕분이 컸다. 예의없어보일만큼 가족들에게 툴툴대기만하던 철부지 여고생이 엄마가 곧장 죽을 위기에 처하자 남자 주인공인 의사의 가운을 잡고 늘어지며 엉엉 울어대는 장면이 그럴듯하게 연출되며, 묻힐 줄만 알았던 나에게도 대중들의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마운 작품 덕에 이제야 배우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스케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난생처음 기자를 만나 녹음기를 두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평소엔 상상도 못해볼 가격대의 옷을 입고 화보를 찍기도 했다. 길거리에 홀로 나가면 언뜻 언뜻 알아보는 사람도 존재하기도 했고, 덕분에 지인과 카페를 들렀다가 예기치않게 싸인회를 열었던 적도 있었다.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축하 메시지도 자주 전해졌고, 현실같지않아 붕 뜰 수 밖에 없는 시기에, 스폰 제의가 들어왔다. ‘스폰’이라 하면 하나같이 성접대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게 아니였고, 단지 연예계에서의 입지가 굳혀지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던 좋은 투자자분이셨다. 누구나 들어봤을 정도로 큰 기업의 사장님이셨는데, 사실 자신의 막내딸이 내 팬인데 실제로 뵙고 싶어한다고. 몇날 며칠을 졸라대서 연락을 드린다고. 그렇게 만나게 된 정체모를 사장님의 딸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였다. 날 보자마자 내 팔을 잡고는 언니, 저 진짜 언니 좋아해요, 진짜로. 와, 개이쁘다.. 남사스럽게시리 자꾸만 예쁘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는지 헤실 헤실 웃고 있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정혜였다. 잘 다려진 교복만 보아도 귀티가 흐르는 게, 역시 부잣집 딸내미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요즘 여고생, 하면 내가 생각했던 입술 뻘건 양아치같은 여자애는 아니였고, 그 반대도 아니였고, 딱 보기에 학생같고 예뻤다. 있지도 않은 여동생을 얻은 것만큼 든든해진 느낌에 되려 내가 더 정혜를 챙기기도 했다. 한 번 정혜는 제게 6살 터울의 친오빠가 있다고 했는데, 가업 물려받으려고 경영 수업만 죽어나게 듣느라 말도 잘 안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차라리 언니가 더 친한 것 같아요, 진짜 그냥 친언니같아. 하며 너스레를 떠는 정혜의 그렇냐며 장난을 맞받아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정혜에게 단지 오빠가 있구나. 하며 넘겼는데, 근데 그게 또 악연으로 발전될 줄 누가 알았겠나.
언니는 연애 안 해요? 정혜가 한 번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하긴, 좀 그렇게 물을 만도 한 것이 무슨 소문이 이상하게 난 건지는 모르겠는데, 철벽녀라고 소문이 나돌고 있댄다. 그냥 아직 연애에 생각이 없는 것 뿐인데, 무슨 철벽녀야. 인상을 찌푸리자 그러다 늙어서도 혼자면 어쩌냐며 나를 나무랐다. 사실 뭐.. 죽을 때 혼자여도 큰 상관은 없는데 말이다.
그래.. 이렇게 원인도 모르는 미움 받으며 살 바에는 그냥 혼자 뒤지는 게 제일 속 후련할 것 같다.
시간이 어느덧 많이 흘렀다. 광고 몇 편에,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 몇 편을 더 찍다보니 나이도 조금씩 먹었고 낯 간지럽게도 내 이름 앞에는 탑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혜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었고. 연예 사업에 손을 대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혜네 회사는 날로 성장하다 결국엔 우리 소속사를 인수했다. 우리 회사가 그렇게 작은 회사가 아니였음에도 거금을 들여 인수를 한 것을 보아 진짜 연예계에까지 자리를 잡으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즉후에 정혜네 회사에서는 우리 소속사 배우를 전폭적으로 지원을 시작했고, 한 때는 신난 표정으로 정혜가 저 멀리서 뛰어오더니 언니! 우리 이제 진짜 가족이에요! 하며 천진난만하게 굴었다.
언제는 직접 정혜네 아버님께, 그니까 우리 소속사를 인수한 회사의 사장님을 직접 뵈게 됐던 날이 있었다. 회사 일로 직접 오셔야할 것 같은데, 조금 중대한 일이라며 와달라는 말씀에 네, 네.. 하면서도 괜히 얼떨떨했다. 회사 일이라 원래는 회장님을 뵈어야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병으로 위독하셔서, 친인척빼고는 면회가 아예 금지라고하니 대신 자신을 뵙게 될 것 같다고 내게 직접 전화를 주셨다.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막 잘리는 건가, 뭐지. 매니저에게도 묻자 뭐 사고친 거 있냐길래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자 잘 처신하고 오라며 날 정혜네 회사에 직접 데려다주었다. 가는 내내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직접 내게 전화를 주신 건 처음이었을 뿐더러, 뭔가 존나 느낌이 쎄한게 가서 김치 싸대기라도 맞고 오는 건 아닌가싶었다. 아씨, 나 요즘에 사고 치고 다닌 거 없는데. 안내데스크에서 쭈뼛쭈뼛거리자 내 얼굴을 알아보신 직원분이 날 친절히 접대실까지 안내해주셨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 보이는 건 사장님과 함께, 기껏해봐야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아, 어서 오세요. 이쪽은 제 아들.”
“..전정국입니다.”
남자가 꾸벅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며 내게 손을 건넸다. 난 솔직히, 여기 이 상황 이후로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오시는 길이 막히진 않았으려나 모르겠습니다, 괜히 불러서..”
“아, 괜찮아요. 약속 시간 맞춰서 일찍 나와서 다행이죠.”
“ 그럼 다행입니다. 정혜랑 아직도 자주 만나시나봅니다. 그렇게 좋다고 신나하던데.”
“네에, 어제도 만나고 왔어요.”
“그러시구나, 감사드립니다. 애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좋은 언니를 만났으니 잘 된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인상이 좋으신 사장님에 무겁기만 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내가 불편해할까봐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시는 사장님과는 달리, 묵묵부답으로 말없이 우리 둘을 지켜보고만 있는 저 남자가 좀 거슬렸다. 전정국이랬나. 아, 그럼 정혜의 오빠겠구나. 6살차이라고 했으니, 대충 스물 여덟이라는건데. 보기 좋게 머리를 넘겨 드러난 이마라인과, 단정히 잠근 재킷의 단추가 예를 갖춘 태가 났다. 있는 집 자제분이라 그런지 확실히 배운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정혜와 달리 원체 말이 없는 성격인건지, 사장님의 물음에도 네, 아니오로만 대답을 한 남자에 사장님이 조금 지치셨는지 내게 말을 붙이셨다. 사실,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일단 저희 쪽에서 먼저 여배우를 물색하고 다녔습니다. 정국이한테 어울릴만한 분들로요.”
“…네?”
“선이나 미팅같은 건 아니고요. 쉽게 말하자면 드라마 한 편을 연출할 계획입니다. 제 아들과, 여주씨가 주인공인 드라마를요. 편히, 캐스팅 됐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무슨..”
“ D회사라고, 아시죠?”
“…그야.”
“얼마안가 부도가 날 예정이에요.”
“네?”
“사기에, 협박, 탈세. 아주 악질 회사죠. 사업 건으로 맺었던 계약이 있었습니다. 자꾸만 몰래 이득을 챙기려는 심산에 취소를 저희 쪽에서 먼저 신청을 했고요. 몇 번 역정을 내다 결국에는 탈세 혐의 약점이 잡혀서 합의 하에 계약을 취하했습니다. ”
“그런데 전에, 무언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회사 외동딸과 저희 아들을 혼인시키겠다는. 실제로 몇 번 만남도 가졌었고, 혼인 준비도 하는 중에 계약이 취소 되버려서요. 부모에게 무슨 지시를 받은건지 그 쪽 회사 딸이 자꾸 끈질기게 붙더라더군요. 처음에는 사랑꾼 타령을 하더니, 결국에는 울면서 계약을 다시 맺자고 악착같이 붙었답니다. 맺지도 않은 관계를 맺었다 주장을 하면서 말이죠.”
“ 다시는 성사시킬 계약도 없는데, 자꾸만 그 회사 쪽에서 사랑을 핑계로 구제를 요청하니 저희 측에서 보여주기 식으로 일을 좀 크게 벌릴 생각입니다. 그래서 배우인 여주씨가 필요한 것이고요. 아시다시피, 이제 한 식구나 마찬가지잖아요.”
“아, 뭐..그렇죠.”
“..듣자하니, 아버지가 작은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네. 제가 번 돈으로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어요.”
“지지를 해드릴 생각입니다. 그쪽 회사 없이도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될 곳은 차고 넘친다라는 걸 보여줄 심산으로 말이죠. 아, 여주씨에 대한 지원은 물론이고요.”
“일주일 후에 기사가 날 겁니다. 제 아들과 여주씨가 정혜를 통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식으로요. 그에 맞춰 공식 입장을 내주시면 여주씨의 역할은 끝이 납니다. 증거를 남기기위해선 제 아들과 몇 번 만나셔야하겠지요. 약속한 시간에 뒤에서 따라붙을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힐 거에요. 그에 유연하게 대처해주시면 됩니다. 결별 기사는 결혼 이야기가 돌 때 쯤에 터질 거니까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사전에 미리 연락을 드릴 것이고요.”
“이 기밀은 외부에는 절대 알려지면 안됩니다. 가족분들에게는 따로 연락을 드리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아버님께는 저희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아, 네.”
“..주말에 만나도록 하죠. 연락 드릴게요.”
어느 정도 사장님의 말씀이 끝이나자, 말없이 앉아 사장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남자는 내게 제 명함을 건넸다. 얼떨떨한 손으로 명함을 건네 받았다. 부사장. 아니, 미친.. 저 나이에 어떻게 부사장이 되냐고. 명함을 받자마자 놀라움에 욕짓거리가 나올 뻔 했다. 것보다 지금 내가 끼어서는 안될 금수저들 판에 끼어서 난리를 치는 건 아닌가,해서 그게 또 언짢았다. 김치 싸대기는 오늘이 아니라 그, 외동딸인가. 그 여자한테 맞을 것 같은데. 내가 하는 일은 그지 크지 않다지만서도, 이런 어마무시한 일에 내가 연루되어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건 그냥 대국민사기극이잖아... 이렇게 스케일이 큰데 누구 하나 걱정을 안하겠냐만은. 그래, 대충 영화 찍는다 생각하고 몇 달, 길게는 몇 년만 좋게 보여진다 생각을 하면 될 것이다. 아, 근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판이 너무 커서. 그게 걱정이다.
조금은 사명 비스무리한 것이 생겼다. 그래, 좋게 생각하면 좋게 되겠지. 내 직업은 가수도, 아나운서도, 개그우먼도 아니고 배우였다. 극 중에서의 나는 대본에 충실히 해야만하는.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혹은 호두깎기 인형같이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에, 다리 양 쪽에 구멍을 뚫고, 얇은 실을 엮는다. 온 몸이 실에 묶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만하면 내 역할은 끝이 난다. 미묘한 표정 변화와, 작은 움직임. 그 안에서의 무언의 변동을 읽어내린다. 어제는 사랑에 빠진 여고생이, 오늘은 돈에 눈 먼 남자의 내연녀가 되고, 내일은 마약에 쩔어 뒷골목을 전전하고 다니는. 못할 것은 없었다. 나를 찍는 카메라는 똑같았고, 상대 주인공도 정해져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연기를 해야하고,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나는 그를 사랑에 빠진 눈을 가득 담아 바라봐야한다. 다만, 내게 유의할 점은, 현실과 혼동되지 말아야한다는 것. 그가 나에게 지어주는 웃음은,내게 건네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는, 모두 가상이었고, 픽션이라는 것을.
나는 현실과 가상의 괴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가상에서의 다정한 그를 현실에서도 맞이하고 있었다. 영영 돌아오지않을 그 가상 세계를.
저 약속 지켰어요! 이거쓰고 이제야 마음 놓고 공부를 하러갈 것 같습니다ㅜㅜ
연재텀이 전보다 훨씬 길어질지 몰라요. 그래도 이 빙의글은 너무 쓰고 싶어서 누구에게 뺏길까 먼저 왔으니
막 미워하진 말아줘요... 우리 길게 오래 오래 봐요ㅠㅠ 다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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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않게 올게요ㅠㅠ 너무 고마워요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