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남긴 상처는 지울수가 없다더라.
학교 폭력으로 전국이 시끌벅적 했었을 때 최선의 예방책으로 실시했던 학교 폭력 예방 교육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않은가. 비언어적 폭력보다 상처를 더 크게 입는 것은 언어적 폭력이라고. 신체적 피해는 아물어 흉이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언어적 피해를 입은 정신은 회복이 불가하다고. 같은 물을 먹고, 같이 햇빛을 쬐어 자라난 두 꽃을 두고, 한 꽃에는 희망적인 말을, 나머지 한 꽃에는 절망적인 말을 하고 지켜두는 실험으로 이러한 가설은 기정사실화된 논리가 되었다. 왜냐, 결과는 뻔했으니까. 긍정적인 말을 들은 꽃은 무럭 무럭 자라고, 그 반대로 부정적인 언어만 들은 꽃은 결국 시들어죽어버렸다. 모두가 예상했듯이.
은은한 향을 품고, 빼어난 색채를 지닌 꽃이라도 해도 주인의 말 한마디에 말라 비틀어져버렸는데, 사람이라고 어찌한들.
그렇게나 냉철한 그가 툭 내뱉었던 말들은 나한테는 큰 비수로 꽂혔다. 분명 내가 싫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 감정을 또 곧이 곧대로 말로 표현하는 게 나로써는 두렵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미움을 받으려고 이 계약을 성사한 게 아닌데. 그의 차가움과, 그 찌푸린 표정을 견디려고 도움을 받은 게 아닌데. 그가 내게 가질 애매한 단어의 증오라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다가서려고만 할 때면 그는 항상 내게 말했다. 선을 넘지 마세요. 아. 하긴, 우리에게는 항상 서로가 침범할 수 없는 보이지않는 선이 있었다. 영영 느슨해지지 않을 팽팽한 선.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시작 조차 모르는 무한한 길이를 가진. 조금만하면 그가 나를 좋게 봐주지않을까, 하는 기대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는 꿈 꿀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의 선은 나를 휘어감을 듯이 팽팽하기만 하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배우가 느끼는 가장 큰 공허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쩌렁쩌렁한 컷소리가 끝나면 몸 담구고있던 가상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 큰 무상함을 느꼈다. 성접대로 유명한 여배우가 소녀가장으로 비춰지고, 도박에 찌든 남배우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막노동판으로 뛰들어가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그런 공허함을 더 큰 허무함으로, 허망함으로 바꿔준 게 전정국과의 계약이었다. 누가봐도 다정한 연인으로 비춰지는 공식 석상, 그 뒷모습에서는 전정국은 날 매몰차게 밀어냈다. 암묵적인 컷 소리. 구 약혼녀가 문을 닫고 돌아서면 상황에 몰입해찍던 영화가 끝이 난다. 수고하셨다는 말도 없이, 그는 내게 얼른 꺼지라는 식의 말로써 방금 나간 여자마냥 매몰차게.
그의 말을 들으니 또 수긍이 가는 것이, 내가 또 한심한 것이 뭐냐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면서도 현실과의 선을 긋지를 못 했다. 그것도 유독 그와의 상황에서만. 어깨에 닿아오는 큰 손과, 이마에 닿는 말랑한 입술. 몇 년이고 연기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스킨쉽에 익숙해져있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그의 신체 일부가 내 몸에 닿을 때면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물론 그 행동 하나하나가 다 예정된 각본에 충실함을 넘어 더욱 더 실제처럼 보여지기 위해 쓰여진 도구라는 것을 알았지만서도, 예정되지 않은 시나리오와 함께 맞물리는 스킨쉽에 가끔씩은 가상의 상황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볼이 붉어진다던지, 눈을 마주치는 것이 괜시리 창피해진다던지.
그리고 얼마 안 가 인정을 해버렸다. 아,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구나.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선을 넘지말라는 말을 기어코 어기게 되었구나. 이제야 조금씩 자라나려는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는 현실에 나는 눈을 감았다.
*
![[방탄소년단/전정국] 쇼윈도 드라마 04 ; 예정에는 없던 시나리오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1/20/17/8b347512c14f70a84e76f20d2ec566e7.gif)
쇼윈도 드라마 04 :: 예정에는 없던 시나리오
“언니, 밥 잘 챙겨먹는 거 맞아?”
“그렇대도, 어제도 치킨 먹었다니까.”
근데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턱을 괴고는 내 얼굴을 여기 저기 살펴보더니 그새 울상을 짓는다. 걱정 하지말라니까, 나 진짜 밥 잘 챙겨먹어. 사실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않게 내뱉으니 그제서야 표정을 푼다. 앳된 여자아이의 얼굴에서 똑닮은 그의 얼굴이 겹친다. 생각해보니 서글서글한 그의 여동생과는 달리 그는 자의적으로 내게 웃어준 적이 없었다. 눈꼬리가 휘어지듯이 웃던 그 때의 상황도 따져보면 내가 아닌 대중의 눈속임을 위해서였다. 날 사랑해주는 것처럼 보여지기 위해서. 그들에게.
“언니 요즘 괜찮은 거 맞아? 표정도 어두워보이고, 갈수록 야위어지는 것 같은데.”
“..괜찮지, 내가 힘들 게 뭐가 있어. 영화 찍느라 피곤해서 그렇지.”
전정국네 아버님께서 바라시듯 그와의 관계를 마치 실제 영화를 찍는 것처럼 연출을 한다면 나로써는 힘들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허나 이게 내 마음에서부터 어긋난 이상,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처럼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상 세계에서의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다정한 모습이 가상임을 알면서도, 가상의 그를 기다리는 나를 느낄 때 마다 공허함이 내 주변을 가득 채우겠지. 현실에서의 그 모습은 존재하지 않을테니.
“…오빠 때문에 그러는 거 맞지?”
“….”
“오빠가 원래 그래. 냉철한 부모님 밑에서 혹독하게 컸으니까 주위 사람들한테 잘 신경을 못 써서..”
“….”
“괜히 언니가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나도 오빠가 언니한테 그러는 거 너무 싫은데, 오빠 주위에는 항상 오빠의 재산만 보고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서 그냥 그렇게 사람 대하게 된 것 같아. 제안하면 거절부터 하고…. 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표정을 알아차린 건지 귀신같이 위로를 해주는 정혜한테 미안해져서 그냥 손사레만 쳤다. 어차피 끝이 날 계약일 거, 우리는 계약 기간만 채우면 다시 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덤덤하게 괜찮다고 겉으로는 말을 툭 내뱉었지만서도 가슴을 꾹 누르는 것 같은 답답함은 깊어져만 갔다. 이미 허해져 아무것도 남아있지않은 마음의 우물에서 누군가 자꾸 물이 샘솟는 오아시스를 찾으려 박박 긁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듯한 무게감에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뿐, 더 이상 내가 힘들어요. 하면서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얼마 보지 못한 나마저도 그를 짓눌러온 부담감의 무게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평생을 보고 자란 그의 여동생은 그를 보며 얼마나 애탄했을까. 행복과 맞바꿔 키운 돈의 무게는 그의 삶에 만족감을 키워줄 수 있었을까? 날 때부터 혹독하게 커야했을 운명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생각해보니 그가 나에게 그렇게 매몰찬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의 주위에는 모두 안 그런 척 하면서도 그의 재산을 탐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있었다고. 애초에 나도 그의 회사의 버프를 받고 인지도를 키웠으니 그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아니꼽겠는가, 나같아도 그랬겠다. 그가 날 싫어하는 이유가 너무 명확해서, 그의 감정을 전환시킬 상황조차 되지 못했기에 갈수록 모래를 삼킨 듯 답답해져만 갔다.
부디, 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있는 나를 그가 알아주질 못 했으면. 지금에서야 단순히 날 밀어내려는 마음이 훗날 증오로 돌아서질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를 좋아하니까 그도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큰 욕심일테니, 그저 그에게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그의 부를 얻기 위해 그에게 다가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단순히 난 오래전부터 지쳐 메말라있을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가 섣불리 오해하지 않아주기를 원했다.
*
의무적인 데이트를 반복하면 피어오르던 증오도 수그러들지 않을까, 는 온전히 내 생각이였다. 말 한번 할 틈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전정국에 나는 그냥 휴대폰만 보면서 김태형과 정혜의 카톡에 의무적으로 대답을 하고만 있었으니. 기사도 났겠다, 사진도 찍혔겠다, 인터뷰도 했겠다. 하라는 건 다 했는데도 왜 굳이 쓸데없이 사석에서 만나라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이 상황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의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연출이 아니였다면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일도 없을테니. 웃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같이 있다는 그 분위기에 만족을 하기로 했다.
어디서 자꾸 향수 냄새가 나서, 내 가방에 있는 향수 케이스가 샜나 했더니 완전히 잘못 짚었다. 내가 사용하는 은은한 향이 아니고 강렬하고, 한 번 스치듯 맡아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게 하는 향. 머리가 슬슬 아파오길래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향인가, 싶었는데 답은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향수 냄새.”
서로 아무 말도 안하고, 각자 일만 하다가 고개를 딱 들며 무의식적으로 말을 툭 내뱉으니 고개를 푹 숙이며 꽤나 중요한 일을 하는 듯한 그가 그대로 고개를 틀어 날 말없이 쳐다본다. 감정없는 로봇마냥 꿰뚫어버릴 듯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말을 버벅대니 여전히 탁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아... 존나 무서운데 개 잘생겼어 미친... 저 입에서 어떤 욕이 나와도 그냥 얼굴만 감상해야겠다. 그게 차라리 더 속이 편하겠다.
말도 없이 쳐다만 보길래 괜히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전정국이 아차, 하면서 옆에 놔두었던 가방에서 무언가 뒤진다. 앞 주머니에서 한참이나 휘젓던 그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나온다. 저게 뭐야, 거무스리한 작은 플라스틱에 처음에는 유에스비인가, 싶었는데 전혀. 생각치도 못 했던 물품이 그의 손에서 딸려나왔다. 립스틱. 태연한 표정으로 립스틱의 뚜껑까지 열며 시뻘건 립스틱을 보여준다. 새 것도 아니고, 짓눌리고 뭉게져도 빼어난 레드의 색감을 지닌 립스틱을 보자니 그냥 웃음이 먼저 터졌다. 향수, 립스틱. 아, 그니까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자고 왔다고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거구나.
“제가 화장품에 무지해서요.”
“….”
“어제 사업 건으로 만난 여성분이 두고 가셨는데, 이렇게 망가져있더라고요.”
“….”
“계약이 잘 성사 되었기도 하고, 똑같은 제품으로 선물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잘 모르니까요. 정보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여주씨?”
여자 향수 냄새를 폴폴 풍기고, 기어이 뭉게진 립스틱까지 보여주면서 처참히도 엿 먹이는 전정국에 그냥 할 말이 없어졌다. 그 순간에서 딱 든 생각은 그냥... 이 사람은 날 이렇게나 싫어하는 구나. 단순히 증오의 감정을 넘어섰구나. 나와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데, 이게 어떻게 맞춰질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내가 아직 그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 아마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 진짜로 나를 욕하며 밀쳐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으니. 아, 생각해보니 공식적인 커플이라고 해도 애인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애초부터 없었구나. 그는 나에게 애인이 없다고도 안 했고, 도리어 그가 어떤 여자랑 뒹굴던, 입을 맞추던 나는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걸 너무도 잘 알았기에 대놓고 저렇게 엿을 먹이는 수가 있는 거겠지. 내 기분이 더 좆같으라고.
그렇지,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상냥한 투로 내게 말을 건넬리가 없다. 날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그러면 왜, 대체 왜 날 싫어하는데. 억울함이 치민다. 태연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무엇이 그렇게 맘에 안 드냐고. 공허함을 가득 담은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내가 먼저 그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겠다고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전정국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 잘난 상판떼기에 대고 물어볼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는데 뱉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도 아니면서, 온전히 제 기능을 잘 하는 중에 있는 입 밖으로 소리를 뱉지를 못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그를 좋아하니까. 좋아한다는 좆같은 이유 하나 때문에 내게 생채기를 마구 남기는 그에게 못된 소리 하나 할 수가 없었다.
*
“여주씨!”
“...네?”
“왜 이렇게 넋이 나가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요. 뭐 그냥 바쁘기도 해서,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봐요. 하하, 뭐라고 하셨어요?”
“그냥요. 오늘 촬영도 일찍 끝난 겸해서, 배우들 다같이 저녁 식사 하려고 하는데. 시간 돼요?”
“…아. 죄송해요.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스케줄이 있어서..”
“거짓말. 내가 여주씨 매니저한테 내일 스케줄 있냐고 물어본 다음에 말하는 건데?”
“….”
“와, 나 서운하려 그래요. 아직 나 불편해서 그래요? 그래서 그냥 가려는 건가?”
“아,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고요.”
“그럼 같이 가요. 알겠죠?”
아 미친... 결국 말렸다. 생각과 다르게 김태형은 존나 철저했다. 내가 거절할 거는 어떻게 알고 매니저한테까지 내 스케줄을 물어보냐고. 상황을 알 리 없는 매니저오빠는 또 순순히 내일 스케줄을 읊어줬을 거고, 결국 난 김태형의 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보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결국 내 발로 회식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테이블에 허다하게 놓인 소주를 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배가 그렇게 고픈 상황도 아니였어서 그냥 반찬이나 깨작깨작 먹고 있는 와중에 제일 늦게 도착한 김태형이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배 안 고파요? 밥 좀 먹지 왜..”
“별 생각 없어서요. 촬영하면서 군것질도 많이 했고. 태형씨 먼저 드세요.”
“그런 게 어딨어요. 한국인은 밥심이지, 얼른 밥 먹어요.“
네, 네에... 밥을 퍼먹을 생각조차 안 했던 터라 꺼내지도 않았던 숟가락의 부재를 보고 손수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기까지 한다. 이럴 필요까지 없다니까 밥심으로 연기하는 거예요. 라면서 내 입에서 찍소리 하나 못 나오게 했다. 완강한 태도에 결국엔 나도 그래, 이게 얼마만의 고기냐. 하고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깃덩이를 집어먹자 김태형이 헤실 헤실 웃으며 쳐다본다.
“태형씨, 너무 여주씨만 챙기는 거 아니야?”
“그니까, 그러다가 여주씨 애인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공개연애의 안 좋은 점이 있다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던, 그냥 숨을 쉬고 있던 항상 그의 이름이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을 때에도 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던 것들이 이제와서야 사람들의 관심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와 그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아닌데도. 내가 김태형과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막말로 스킨쉽을 하든 그는 아무런 관심도 내비치지 않을 거니와 그는 내가 지금 영화를 찍는 지, 드라마를 찍는 지도 모를 것이었다. 김태형과의 친분이 생겨 인터넷에 올라와도 그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커플인 사이에 내가 무엇인가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 전정국에게 괜시리 미안해지면 전정국은 또 존나 뭐라할 게 뻔했다. 내가 그딴 걸 왜 신경쓰냐며,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나는 그럼 또 현실을 직시한다. 무한한 순회. 감정의 반복. 이제는 이 굴레가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에이, 괜찮아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는 분이셔서.”
그리고 나는, 더 완벽한 드라마를 위해 나도 잘 모르는 그를 남에게 정의를 내렸다.
사실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괜히 그의 이름을 들으면 껄끄러울까봐 되도록이면 동료 배우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지. 오래본 사람이던 얼마 보지 못한 사람이던 통과의례처럼 전정국의 안부를 밥 먹듯이 내게 묻는데, 거기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연애는 잘 하고 있냐면서 말을 붙여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상에서도 내 위에 가면을 덧 씌워야했다. 그럼요, 잘 지내죠.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뒹굴고 왔다고 자랑까지 하는데요. 시발.. 내 생각이 많아지는 걸 알았는지 멍 때리는 걸 보고만 있던 김태형이 날 챙겨주는 것은 너무나도 고맙지만, 그냥 지금 상황에서 나는 혼자있고 싶다. 그냥 그 생각이 컸다. 혼자 불 꺼진 집에 들어가서 고독빤다고 술이나 마시면 안 그래도 좆같은 기분 더 좆같아질 걸 알았지만, 내 행동 하나 하나에 반응하며 전정국의 이름을 꺼내는 이 상황이 나는 더 좆같았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결국 선택한 게 혼자만의 시간이였다. 연락도 안 올 휴대폰은 그냥 테이블에 두고, 배우들이랑 웃고 떠들면 김태형이 내가 나간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과 아무렇게나 던져진 내 가방을 보면서 다녀오라며 웃어줬다. 시끌벅적한 식당을 뒤로 하고 고요한 소음을 내뿜는 도시를 보며 난 또다시 넋두리를 뺐다. 별 하나 없는 서울 하늘을 바라만 보고 있자니 시커먼게 존나 소름돋게 내 마음 같아서 그마저도 관뒀다. 지나가는 차들도, 사람들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걸음을 바삐한다.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하다. 아마 나도 그러겠지. 그리고 그의 표정 또한. 지금은 또 어느 여자랑 뒹굴고 있으며, 그는 나처럼 내 생각을 하긴 할까? 해봤자 그저, 이제는 어떻게 엿을 먹일까. 이딴 생각뿐이 없겠지. 그는 나를 싫어하니까. 그는 이렇게나 나를 싫어하는데, 내 주위에서 자꾸만 거론되는 그의 이름을 그가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좆같다며 경멸의 시선을 보낼까, 아니면 또 태연하게 연기를 할까. 그가,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 어떡하나. 벌써부터 이렇게 싫어하는데, 결별 기사가 나기 전까지 내가 울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버틸 자신이라는 게 있을까?
“여주씨.”
“네?”
한참이고 생각에 잠기어있을 때 쯤, 나를 불러오는 김태형의 목소리에 몸을 돌리니, 푹 숙인 김태형의 고개가 보인다. 뭐지, 벌써 취했나. 태형씨, 왜요? 내가 걱정되어서 나온건가, 그건 아닐텐데. 덧붙인 말에도 반응이 없는 김태형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뿜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주씨, 일단 미안해요.”
김태형이 두 팔을 뒤로 숨기고 있다가 내게 손을 내민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내 핸드폰이였다. 일부러 두고 나갔는데 왜, 라고 하자마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금이 되어있지 않은 채로 뜬 화면에는 통화기록이 남아있었다. 정국씨. 우리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듯 어느 연인마냥 이모티콘 하나 없이 딱딱하게 이름만 저장되어있는 전정국. 그리고 남아있는 통화 시간. 전정국에게 걸려온 통화는 불과 2분전의 시간이였고, 통화 시간은 10초 남짓했다. 그니까, 이게..
“아니, 그.. 애인분한테 온 전화인 것 같아서 받고 휴대폰 전해주려고 나왔는데 자기 말만 하고 끊으시더라고요.”
“….”
“여주씨, 이 사람이랑 사귀는 거 아니죠.”
*
독자님들 정말 오랜만입니당...(면목없음)
잘 지내셨나요? 제가 마지막 편을 올렸을 때 아마 3월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간고사, 축제 등 다 끝내고 오니까 벌써 5월이네요ㅠㅠ
저는 다시 또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러 가겠죠..? 7월달만 온다면 다시 열일할테니 조금만 더 지켜봐주세요 엉엉..
제가 요즘에 댓글을 확인할 시간도 없고, 인티 자체도 너무 오랜만에 들어오는 거라서 꾸준한 구독료 수입 쪽지를 보면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ㅠㅠ
댓글들 보면서 항상 힘내고 있고, 조만간 답글도 다시 다 달아드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ㅠㅠ
그리고, 아무도 모르시겠지만 제 글이 초록글까지 갔었더라고요 정국이 부산의 봄! 물론 짧은 기간이였지만 저도 초록글 작가라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방방 뛰었었어요! ㅋㅋㅋㅋ
너무 감사합니다ㅠㅠ ♡♡
이번편은 여주의 가슴앓이가 조금 극대화되었고, 정구기가 조금 더 나쁘게 나왔어여..... 음.. 죄송함당... 답답하죠 저도 그래요ㅠㅠ...
이번편에서 약간 좀 급전개의 느낌이 보이는데, 오랜만에 온 만큼 지루하게 쓰고 싶진 않고, 그렇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서 조금 진도를 뺐어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천천히 또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야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지만요ㅠㅠ
항상 연재 늦어도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저는 또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님들 너무나도 사랑합니다ㅠㅠ
아! 그리고 궁금한 것 있으면 항상 질문해주시고, 암호닉 신청도 항상 받고 있으니까 부담갖지마시고 신청해주세요~
♡핑슙/루이비/혬/오전정국/앰플/꽃길/민트/오호라/방소/라온하제/030901/짐짐/계피/나의별/0103/윤기꽃/망개쿵떡집/비림/모찜모찜해/분홍빛/몽총이덜/밀짚모자/맴매때찌/크슷/랄랄랄랄랄/태태마망/설레임/골드빈/망고마이쩡/내사랑꾸기♥/배고프다/의대생/우유/비림/후니/둥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