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 - 우주를 건너
05
우리는 사랑을 할 거야.
나는 아주 짧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상처받았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할 거라고.
너랑,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사랑을 할 거라고.
눈물 날 정도로 예쁜 이야기들만 나누고,
가슴이 찡-하고 떨릴만한 손길을 건네고,
서로 웃는 얼굴로 처음과 끝을 함께 하는,
그런 사랑을.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들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
차학연의 목소리에는 별 가루 같은 반짝임이 있었다.
부드럽게 손 틈을 파고드는 그 아름다움이 어느새 내 소매 끝에도 묻어있곤 했다.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그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모로 보나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
그와 나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기도 했고,
또 생각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서로의 말을 주고받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거나 답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아주 좋은 공부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관한 공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런 동떨어짐이 우리 사이에서 꽤나 큰 작용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피울 필요가 없었고
그는 내게 억지로라도 가벼운 집착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딱 적당하고, 또 퍽 간편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 착각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
"타이밍이 중요한 거라니까요?!"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마음이 중요한 거라니까-"
그가 하얀 수건에 손을 닦으며 자리로 걸어왔다.
"마음도 중요한데 타이밍이 맞아야 그게 전해지는 거 아니겠어요?"
자리에 앉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콧등을 찡그렸다.
"진짜 사랑하면 그깟 타이밍 안 맞아도 다 통해요"
그가 수건을 테이블에 가지런히 접어놓으며 내게 말했다.
"그게 안일한 생각이라니 까요-"
가방을 뒤적거리며 괜한 핀잔을 줬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데요-"
"무슨 통계조사 한 듯 얘기하네"
그가 입술을 삐쭉댔다.
"통계 조사했으면 분명히 내가 이겼을 거예요"
내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하냐면요..."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내며 내가 중얼거렸다.
학연은 턱을 괴고 앉아서는 가만히 그런 내 손을 바라봤다.
향긋한 라일락 향기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레몬티의 상큼함과 섞여 꽤나 근사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골고루 손등에 크림을 바르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학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학연은 물음표 그려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손이요"
내가 말했다.
그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적당한 양의 크림을 그의 손에 짜고는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잠깐 하얀 그 크림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
"건조하겠어요"
"고마워"
그가 제 손을 부드럽게 비비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타이밍이 중요한 거라고요!"
"진심이 더 중요하다니까아-"
그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잘 들어봐요"
내가 테이블 위에 팔을 포개놓고는 이야기했다.
나의 작은 움직임에 그의 시선도 이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려 꼭 다문 입술과 동그란 눈매.
괜히 웃음이 나고 괴롭히고 싶은 건 이 사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나랑 같이 웃어줄 것만 같은 그 다정함 때문이라고.
그렇다고 그가 마냥 유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물 흐르듯 다정한 따뜻함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그 견고함은
결국에는 그가 아주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했다.
결국에는 기대고만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도 손바닥이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시너지가 생기는 거 아닐까요?
왜 드라마에서도 그러잖아요 타이밍이라고, 타이밍을 놓쳐서 너에게 닿을 수 없었다고.
너를 만나러 가는 날엔 이상하게 비가 많이 왔고, 나는 우산이 없었고.
네가 보고 싶은 날에는 더 많은 일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고.
너에게 고백하자 마음먹은 날에는 꼭 너에게 나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생기기 마련이었다고"
나는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굉장히 안타깝지 않아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글쎄..."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학연이 이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부드러운 눈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던 학연은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진심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이 아주 가득 담긴 눈이었다.
"나는 간절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심을 전하려는 간절함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나는 나를 마주 보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 이내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견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희망적인 생각 아닌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나라면 그랬을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너무 간절하다면
나는 우산이 없어도 그 사람을 보러 뛰어갔을 거예요.
오직 그 사람을 보기 위해 바쁜 일은 먼저 다 처리해 놓으려 애쓸거고
그 사람에게 고백하자 마음먹은 날에는 그 어떤 것도 제처두고 그 사람에게 달려갈 수 있어요"
나는 가만히 그런 학연을 바라봤다.
이내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나는 그래요"
하고 그가말했다.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건 아마 나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간절함이 그 순간의 타이밍을 이긴다는 것.
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별을 겪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
“진짜,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면 내가 또 감명받잖아요”
은근 장난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학연도 이내 즐거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예쁘게도 접히는 눈꼬리에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벌써 그러면 어떡해요”
하고 그가 말했다.
“반했어?”
“그럴 리가요-”
괜한 농담에 내가 콧등을 찡긋거렸다.
"계약 연애인데"
"맞아, 그러면 안 되지"
하고 그가 말했다.
"계약 연애인데"
작은 정적의 틈을 타고 음악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기타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감미로운 목소리.
"그냥,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쩌면 내가 진짜 간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요"
그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엿들은 그와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언제나 희미한 관객이 되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배경이라 할지라도.
"간절하지 않아서 헤어진 걸까요?"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잔잔한 시선으로 그런 나를 바라봤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파도가 여전히 내 눈에 차오르고 있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별을 말할 때에는 애써 숨기던 그 눈이,
택운을 피해 급하게 택시에 올라탔던 내 비겁함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간절하지 않았으면 헤어지지 않았겠지"
하고 학연은 말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간절해서 헤어진 거야"
학연의 목소리가 가을 햇살을 타고 카페 안을 채워갔다.
"간절히 사랑하고, 간절히 사랑받고 싶어서 헤어진 거야"
나는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오롯이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은 그의 눈을.
이상하게도 믿고만 싶어지는 그의 그 눈동자를.
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학연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 이내 콧등을 찡그리며 턱을 괴었다.
여전히 입술을 잘근대며 나는 조금 새초롬해진 그의 눈가를 바라봤다.
"이것도 그거 아닌가?"
으름장 놓듯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아니-!"
문득 벌떡 고개를 들며 그가 말했다.
"전 남자친구 얘기하는 것도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 중 하나 아니야?"
"어...."
나는 괜히 민망해 말을 더듬었다.
"ㄱ...그렇겠죠?"
학연은 이겼다는 듯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도 올라갔다.
"윤지우 지금 스크라이크네-"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룰은 알고 있죠?"
"네에- 네- 누가 만들었는데요-"
내가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느새 카운터 뒤로 돌아간 학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충 벗어놓은 앞치마를 접어 서랍에 넣으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외투를 챙기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그가 물었다.
"그게 룰이잖아요-"
나는 말꼬리를 늘리며 겉옷을 걸쳤다.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
하고 학연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어디 안 갑니다-"
"하하-"
*
Rule # 1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들 하지 않기
Strike I
[어길 시 그날 하루는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일 같이 해주기!]
*
"도대체 누가 극복을 못 한 건지 모르겠네-"
탈의실에 들어온 학연은 문에 등을 대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문득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너나 나나 참..."
걸어서 천년이 걸리는 길을
빗물에 쓸려가는게 사랑이지.
허 연, 사랑詩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