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않게 뚱해져있는 날이 많아졌다. 감정의 동요를 읽어내린 하늘은 내 심정을 고스란히 닮은 겨울 바람을 선사해주었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방황하던 겨울 바람은 얼마안가 잠잠해지고, 곧이어 사라졌다. 휘몰아치던 바람이 사라진 길가에는 흰 눈이 내려 환히 세상을 비추었고, 포근해진 세상에 모두가 들뜬 분위기였다. 또, 크리스마스가 되기 일주일 전. 한창 으슬 으슬했던 그 때에 그 남자가 내게 먼저 연락이 왔다.
ㅡ ...오늘, 만나뵈어야할 것 같습니다.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이에 데이트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실웃음이 흘렀다. 말도 트지않은 주제에, 밥도 같이 먹었다. 그것도 한식당, 창가자리에서. 대놓고 사진에 찍히려고. 대놓고 사진이 찍힐 걸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말 한번 꺼내질 않았다. 아, 존나 불편해. 미친.. 전날 저녁에 대판 싸우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는 부부마냥 우리는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어떻게 말 한번을 섞지를 못 했다. 아... 뭐하자는 거지. 아무리 이게 연기라지만, 뭐. 하다못해 자기 소개라도 해야되는 거 아닌가? 이 기세라면 집에 갈 때까지 저 표정없이 밥풀떼기만 깨작대는 얼굴만 볼 것 같아서 입을 뗐다.
“그, 저기..”
“….”
“정혜랑 되게 많이 닮으신 것 같아요.”
“..아, 예.”
;? 저게 끝이야?
“..워, 원래. 말이 없으신 편인가봐요.”
“..네. 원래 말이 좀 짧습니다.”
“아, 아.. 그러시구나.”
아, 존나 뭔 걸려도 하필 숫기없고 말도 없는 애야.. 존나 이러니까 정혜가 나한테 놀아달라고 그렇게 찡찡대지. 어떻게 남매 성격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냐.. 나 혼자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을 해도 자꾸만 남자가 초를 치고 있었다. 일부러 벽을 두는 게 틀림이 없었다. 아, 존나 비참해. 나 여배우 맞지? 그치, 그럼... 여배우다. 나는 존나 개썅 도도한 여배우다.
존나 가시방석같은 그와의 약속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약속했듯이 그의 차로 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가 차 안이 아닌가. 거기에 사진도 찍히기 쉬우니. 그의 차에 타면서 알게 모르게 찍히는 사진들을 보며 사람들은 뭐라할까. 진짜 사귀는 줄로 알겠지, 그것도 반 년 전부터 사귀게 된 사이라고. 웃기고 있네. 말 섞은 지 합하면 한 시간도 안될 사람이랑 사귀긴 뭘 사귀어. 차라리 정혜랑 동성 연애를 한다고 기사가 나면 신뢰가 가겠다. 아무 말없이 시간은 지나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히터에 의해 조금씩 데워지고, 찬 날씨에 꽁꽁 얼었던 내 손은 그 열기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말없이 휴대폰을 하던 그가, 띵동. 울리는 알람 소리에 얼마 안 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휴대폰에서 난 알람음 소리였다.
“..무슨 일 있어요?”
“기자들에게 문자가 와서요.”
“뭐라고 왔는데요?”
내게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와 더욱 더 가까이 몸을 밀착한다. 저, 저기. 잠시만요. 뭔데요..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내게로 전진하며. 자동차 기어 하나를 간격에 두고 조수석 자리를 침범해 얼굴을 들이민 그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위험한 질주를 멈춘다.
“가까이 좀 붙으래요.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
“하여튼, 기자들 장단 맞추는 것도 얼마나 좆같은지.”
“….”
“이렇게 가까우면, 기자들이 알아서 잘 찍어주겠죠.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아. 짧은 탄식. 띵동. 다시 울리는 알람. 휴대폰을 확인한 그가, 문자를 확인하고는 약속이라도 했듯이 내게서 떨어진다. 감독의 오케이 싸인, 종료되는 가상 세계. 아, 아마도 그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겠구나. 이리도 태연한 것을 보니.
아아. 그는, 나보다 더 고된 경력을 가진 배우는 아닐까. 기업가들 판에 놀아나는 호두깎이 인형. 그리고 난? 그와, 나는. 대체 다를 게 뭘까. 태어나고 얻은 신분적 위치가 다른 것? 가지고 있는 재산? 사회적 배경이 다른 것을 제외, 우리는 그저. 누군가의 제의를 받고 움직여야만 했다. 기업가의, 연예계의 현실.
그의 결혼. 그리고 파혼. 그의 결혼 상대였던 D회사 외동딸과의 관계. 아마 사랑이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정략 결혼. 아니, 분명 사랑이 아니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참 우습게도, 그의 할아버지에게, 혹은 아버지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단 하나의 도구로 쓰여질 그를 보며 애탄했다.
*
쇼윈도 드라마 02 :: 묘하게 다른 동질감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성탄절, 꼬마들의 잔칫날. 어쩌면 어린이날보다 더욱 큰 행복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회의 날. 꼬마의 부모들은 있지도 않은 산타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려 아이의 침대맡에 선물을 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다시금 산타의 존재에 맹신을 하게 된다. 허나 커가면서 알게 된다. 산타는 원체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콩순이 냉장고는 엄마가 사줬구나. 그래, 내 이야기다. 어렸을 때 부터 티비를 볼 때면 항상 나오는 콩순이 냉장고가 왜 그렇게 갖고 싶었는지. 울망한 눈으로 광고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혹여나 아빠 손을 잡고 마트에 가는 날이면 장난감 코너에 콩순이 냉장고가 있을까 몇 번을 두리번 거리고. 그러다 찾으면 그게 존나게 갖고싶어서 몇 십분동안 그것만 쳐다봤다. 존나 끈질기게.
근데 그걸 존나 신기하게 유치원에서 얻게 됐다. 빨간 모자에, 빨간 옷을 입고 온 젊은 산타는 큰 보자기를 들고 오더니 유치원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는 것이었다. 이여주 어린이. 하는 목소리에 헐레벌떡 뛰어나가니 내 손에 쥐어진 건 내가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콩순이 냉장고였다. 근데 집으로 돌아와 포장지를 뜯었을 때만큼 존나게 허무했던 적이 없다. 광고에는 냉장고에 갖가지 과일에, 조미료에, 음료수까지 두둑히 들어있었는데.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연 냉장고에는 어떻게 된 게 존나 맛없어보이는 내 새끼손가락만한 양배추에, 가지에, 마요네즈가 끝인게 아닌가. 콸콸콸 흐르던 홈바의 정수기는 애초에 CG였던건지 존나 꽉 막혀서 이걸 어따 써먹으라는 건지도 몰랐다. 그 날 집에서 존나 억울해서 집이 떠나갈 듯 울었다. 산타가 이딴 걸 다 줬다고 철없는 마음에 존나 울었는데, 커보니까 그걸 산 사람이 산타가 아니고 우리 엄마였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나한테 선물을 준 산타는 유치원 원장님이였고. 결국 나이가 차고는 다 찌그러진 마요네즈 통에, 존나 맛없는 식재료가 들어있는 장난감 냉장고는 집 창고에서 연명하다가 결국엔 버려졌다. 내가 그토록 고대했던 산타 할아버지도, 루돌프도, 단지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구였다.
사실 그 이후로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거의 없다. 학창 시절의 크리스마스면 그냥 애들 다같이 모여서 피자를 먹거나, 아니면 집에서 나홀로 집에를 보거나. 성인이 되고서는 술을 마신다거나. 그게 전부였다. 잊어질만한 추억은 아니지만서도 특별히 기억될만한 추억도 아니고. 사실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함도 딱히 못 느끼는 것도 한 몫 했다. 근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내 생에 가장 스펙타클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
‘[단독] 여배우 이여주, K그룹 장남과 열애?’
‘[단독] 이여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애인과...’
크리스마스. 우리는 강제 공개 연인이 되었다.
전날 저녁, 내일 아침에 기사가 터질 것이라는 대표님의 연락에 미리 휴대폰을 다 꺼두고 잠에 들었다. 전부터 동료들이 크리스마스에 나오라며 부추겨도 피곤하다며 내뺐는데, 터진 열애설을 보고 요망한 년이 애인 만나려고 비싼 척을 해댔구나, 하며 생각을 하겠지. 씨벌, 애인은 지랄. 겨우 다섯마디는 한 사람보고 애인은. 눈을 떠보니 그동안의 피로 때문이였는지 오후 한 시를 향해 시계가 달려가고 있었다. 창 밖에는 존나 짜증나게도 눈이 내리고 있었고. 와, 씨발!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킬까, 말까. 아, 시발... 키지말 걸. 내 주변 사람들이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았는 지 처음 알았다. 연락이 평소보다야 많이 올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동료들한테까지 축하한다며 환영을 받으니 내가 뭔가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 몇 시간 내내 온 연락은 다 내용이 똑같았다. 축하해, 여주야.
대체 뭘 축하해. 당신들이 속고 있는 이 사실을? 헛웃음이 나온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이여주. 2위 K그룹. 3위, 이여주 열애. 크리스마스 낮부터 포털 사이트가 후끈 후끈했다. 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뜬 내 이름을 검색해보니, 자극적인 요소의 제목들이 판을 쳤다. 열애, 데이트, 전정국. 세 단어가 만들어낸 속보는 순식간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기사에는 그 남자와 내가 거리낌없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더불어, 입술이 닿지않은 키스신까지. 완벽한 연출이였다. 스크롤을 쭉 내린다. 다행히 우리 둘의 사이를 의심할만한 댓글은 보이지않는다. 오래 가라, 축하한다.완벽한 드라마를 위해 당연시 받아야 될 축하임에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문 커튼을 젖히니 서울 한복판이 눈으로 덮혀있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몰아치는 바람. 얼 것만 같은 날씨에도 사람들은 근 10년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설레여했다. 마치 오늘만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모든 걱정을 잊고, 행복하게. 왜냐,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허나 나는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가짜 열애설이 터진 날에는. 성인이 되고 나서는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로망도 사라져있었고, 애인도, 친구도 없었고, 그러기에 그 날의 특별함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데뷔를 한 이후로는 더 더욱. 직업상 크리스마스에 여기 저기 쏘다니며 놀러다닐 여건도 되지 못했기에. 데뷔 연차가 늘어날수록, 허한 느낌이 들어섰다. 가슴이 뻥ㅡ 하고 뚫리질 못해 꽉 막히는 느낌. 의욕없이 억지로 뛰어대는 심장을 누군가 막아서는 기분.
ㅡ 언니, 뭐해요?
꾹 내담았던 말들을 끄집어내게 해주고, 처음으로 내 말에 경청을 해줬던 그의 동생이 아니였다면, 나는 더 작아질 것이였다.
그러므로, 난 그에게 감사했다.
*
“네, 오늘은 요즘 한창 장안의 화제이신 여배우 이여주씨를 모셔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여주입니다.”
화보 촬영 후에 이어진 인터뷰. 열애설이 터지고나서 처음으로 갖는 공식적인 스케줄이었다. 사장님의 부탁대로 여기에서의 난 철저히 연기를 해야했다. 미리 짜맞춰진 틀대로. 나는 여주인공이였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지도 않는 사실을 실제처럼 부풀려 말을 했어야했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척을 했어야했다. 적어도 이 촬영장 안 에서는. 또한 대중들의 눈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아직 작품 활동 계획은 없으신가봐요. 스크린으로 컴백하실 계획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 가요?”
“이제 곧 영화 촬영 준비 중에 있어요. 다음주에 아마 첫 촬영을 시작할 것 같은데, 맡아보지 않은 배역이라서 너무 설레요.”
“아, 그.. 김태형씨랑 동반으로 캐스팅 된 영화 말씀하시는 거죠? 캐스팅 목록이 뜨고 나서 많은 관심이 있었잖아요. 그거 말씀하시는 구나.”
“네. 저도 제 상대 배우가 누군지는 잘 몰랐는데, 김태형씨가 남 주인공으로 확정 되었다고 해서 굉장히 놀랐었어요. 한창 경력이 높으신 분이라서, 제가 잘할 수 있을 지 걱정도 되고..”
“에이, 여주씨가 무슨 걱정이에요. 여주씨도 얼마나 탄탄하신데.”
몇 달 전에, 새로 찍게 될 영화의 캐스팅 명단이 뜨고 하루동안 인터넷이 아주 난리가 났었다. 그 이유는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맡은 김태형 때문이였는데, 캐스팅 명단이 떴을 당시에 막 드라마에서 인기 몰이를 하던 중이라 반응이 뜨거울 수 밖에. 여자 주인공 - 이여주, 남자 주인공 - 김태형. 영화를 총 책임지게 할 감독도 꽤나 유명했어서, 사람들의 기대치는 한껏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에 내가 부담이 되었을 수 밖에. 그리고 얼마 후에, 영화에 나올 배우들의 얼굴도 볼 겸해서 약속 된 대본 리딩 현장에 나왔었을 때 처음 본 김태형의 위압감에 눌려 저도 모르게 쭈구리가 된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안면을 트지 않았던 배우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인사하니, 무섭다고 느낄만큼 무표정을 지우고 헤실 헤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방금 내가 존나 분위기에 지릴 뻔한 남자가 맞나싶을 정도로 갭 차이가 커서 혼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초면에 말만 몇 번 주고 받다 시작한 대본 리딩에서도 역할에 몰입하여 읊어주듯 읽는 대사에 또 속으로 감탄을 했던 기억도. 아역배우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괜히 그 커리어가 있는 건 아니구나, 하고 또 감탄. 그냥 그 날 김태형한테 입덕을 했다고 하는 게 가장 옳은 표현일지도.
“아, 그리고 또 여주씨에 관해서 좋은 소식이 하나 있잖아요?”
몇 번이고 영화 이야기를 주고 받다 리포터가 본격적인 소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이 이야기를 하려고 날 찾아왔으면서, 안 했으면 섭섭할 뻔 했다.
귓가에 감독의 지시 사인이 울려퍼진다. 큐! 드라마가 시작됐다.
“어떻게 알게 되신 사이인 거에요? 접점이 없으신 것 처럼 보였는데, 되게 의외였어요.”
“그 분께서 여동생이 있거든요. 제가 데뷔 초부터 알게 되었던 되게 친한 여동생인데, 그 친구 덕이 컸다고 보면 되겠죠?”
“아, 그럼 두 분한테 참 고마우신 분이겠네요.”
“네, 그런 셈이죠.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있어요.”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는다. 내가 내뱉은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뱉게 될 씨앗이 되었고, 흩뿌려진 씨앗은 무럭 무럭 자라나 나무가 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큼 크기를 더해간다. 거짓을 먹고 자라난 나무. 이름부터 참 황홀했다.
“기사가 뜬 것을 보고 되게 놀라셨겠어요. 크리스마스 날 열애설이 터진 걸로 아는데, 두 분은 무슨 연락을 하셨어요?”
안 했는데요.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고요,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지인들한테 연락이 온 것을 보고 그 때야 알았어요. 사진이 생각보다 되게 많이 찍혀서 놀랐는데, 그 분께서 제 걱정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아무래도 저는 연예인이다보니까, 이미지가 실추가 되면 어떡하냐면서. 제 걱정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 분께서.”
악의 씨앗이 아무데나 흩뿌려진다. 씨앗에 균열이 일어나 자라나기 위한 발돋움을 한다. 움찔거리고, 갈라지며. 나는 큰 나무가 될 그것에 물이 되고 햇빛이 될 거짓말을 뱉는다. 씨앗이 나무가 될 준비를 끝 마친다.
“그 때는 특별한 날이였어서 만나셨던 거에요?”
네. 당신들 뒷통수 치려고 작당모의한 존나게 특별한 날이죠.
“딱히 뭐 그런 건 아니구요. 얼굴을 안 본지 꽤 되었던 때였고, 그 분께서도 업무로 바쁘셨다가 잠깐 여유가 생기셔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한 날이였어요. 저도 그 때 마침 스케줄이 없었고, 들 뜬 마음에 그 분을 만나러 나갔다가 사진이 찍혔죠.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어요.”
새싹이 트인다. 거짓의 새싹. 힘찬 뿌리를 가진 새싹에게서는 나약했던 씨앗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를 않는다. 잎을 가진 새싹은 무럭 무럭 자란다. 내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과, 수줍은 표정연기와, 누군가의 지시. 하나였던 잎은 두 개, 세 개, 네 개가 되고, 무성한 잎을 가진 꽃이 된다. 봉우리가 터지고, 열매가 열린다. 빛 좋은 개살구. 거짓의 열매.
“스캔들 전문 기자로 유명하시잖아요, 그 기자분이. 그래도 애인 분이 든든하게 위로해주셨을 것 같아요. 여주씨 말 들어보니까, 되게 서로를 아껴주는 것 같아요.”
애인의 위로. 전정국. 우리 서로. 아껴주다. 우리 둘에게 그런 단어가 붙을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친밀했을까? 아니다. 전혀.
“하하, 사랑의 힘이 크긴 큰 것 같아요. 저도 남자는 관심 없다고 여기 저기서 말을 하고 다녔는데, 어쩌다가 그 분을 만났는 지 참 신기해요. 항상 저를 배려해주셔서 저도 너무 감사하는 마음이죠. “
나무에 열매가 주렁 주렁 달린다. 겉 보기엔 좋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진. 내 속마음을 대신 나타내는 거짓의 열매. 탐스러운 열매는 썩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 열매가 주렁 주렁 달린 나무는 점차 완성이 되어간다. 여느 나무와 같아보이는 행색이지만서도 썩고, 부패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기능을 가진 채로. 썩은 가지를 도려낼 시행조차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나무를 키운, 그 정원의 주인이다. 온전히 나무를 둘러싼 울타리의 수가 하나 둘 씩 늘어난다. 비밀의 화원. 또한 거짓의 열매를 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나 조차도. 나무는 누군가의 보살핌없이 자라난다. 크기를 키우고, 열매를 맺어가며.
나는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척을 해야만 하는 역할이였다.
*
ㅡ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잘 돌아갈 것 같네요. 언제 한 번, 식사 대접 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식사는 무슨. 제 역할을 한 것 뿐인데요. 그럼 잘 들어가세요, 네. 네.
가장 막중한 장면을 맡은 촬영이 끝이 났고, 막 리포터와 했던 인터뷰가 전파를 타 전국에 내보내졌다. 열애설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비추어지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이였다. 수줍은 표정과, 작게 터지는 웃음. 성공적인 표정 연기.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말투. 무뚝뚝하기만 했던 내 얼굴에 미소가 퍼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그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겠지. 고맙게도 덕분에 난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에 올랐다.
방송에 내보내진 내 모습을 보고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방송 조차 찾아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에하나 아주 만약에. 그가 이 영상을 본다면, 그는 아마 날 비웃지않을까. 없던 일을 새로 지어내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는 그 표정을 짓는 날 보며 그는 아마 비웃을지도 모르겠지. 그 비웃음은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 기업가 판에 놀아나는 여배우에 대한 연민? 명예와 부에 미친 천박함이라고 단정을 지으려나? 차라리 전자였으면 훨씬 좋겠다. 너도 나와 같은 처지잖아, 정국아.
*
“안녕하세요.”
“잘 오셨어요. 두 번째 뵙는 건가.”
“아, 네.. 그렇죠.”
“여주씨께서 해주신 역할에 대해 저희가 보상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어요. 약속대로 아버님 회사에 지원을 해드렸습니다.”
내 말 한 마디의 아빠의 사업이 움직인다. 돈, 나의 말 한 마디에 아빠의 회사는 대기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내 덕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감정이 동요친다.
아, 나만 입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하면 모든게 잘 되는구나.
“…감사합니다.”
비록 내가 행복하게는 못 하지만, 내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서.
*
“저… 그, 방송. 보셨어요?”
“네. 티비로 이여주씨 인터뷰 하는 것 봤습니다.”
“어, 그니까.. 아시다시피 진짜 있던 일도 아니고, 그러니까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잘 알죠. 저도 신경 안 씁니다.”
“….”
“이여주씨가 한 말로 제가 혼자 스트레스 받고 그러실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설레발 치지마세요. 그 쪽이 뭐라 하던 저는 신경 안 씁니다. 서로 지원받고 움직이는 주제에 무슨 여유가 있다고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는 지 잘 모르겠네요. ”
내 모든 예상이 틀렸다. 내 인터뷰를 보고 비웃음을 치거나, 동정심을 느낄 거라는 그 병신같은 내 예상을 뒤집어엎고는 예상 밖의 돌직구를 던졌다. 멍청한 나를 조롱하는 듯이. 인터뷰가 방송을 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후에 그도 봤을 거라 짐작하고, 그 상황에서 한 내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들였을까봐 사과의 말을 전한답시고 애인이라는 명목으로 찾아왔는데, 이게 웬 걸. 오물조물거리는 입술 새로 나아가는 말 주변에 그가 내 입을 꾹 다물게 했다. 아, 저 말의 결론은 내가, 병신이라는 구나.
“할 말 다 끝난 것 같은데,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업무 중에 손님은 되도록이면 안 받으려고 하고 있어서요.”
그렇지, 그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 아무리 언론에서 우리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언급을 해도, 그의 눈에는 우리의 관계는 그저 비즈니스일뿐. 그의 업무시간에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나는 그에게는 그저 제 업무를 방해하는 눈엣가시이자, 그저 저를 만나러 온 손님이였다. 남들이 생각하는 애틋한 연인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실제 연인도 아닌 주제에 주제 넘게 행동하고 있었네, 내가. 헛웃음이 터졌다. 제가 나가길 바라는 듯 아예 다시 수많은 서류에 고개를 파묻는 그를 보고는 아무 말을 할 수도 없이 막막한 공기를 채우는 사무실을 나섰다. 어둑해진 하늘에 몰아치는 바람이 일었다. 자신감이 떨어진만큼 크게 제 몸을 웅크리었다.
여러분 2주만이네요ㅠㅠ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온 만큼 독자님들이 마음에 드시도록 조금 길게 썼는데 어째 맘에 드시려는 지 모르겠어요.
이번 편에는 태형이의 출연 예고도 나왔고, 냉미남 정국이의 모습도 나왔는데 좋아하실지...하하ㅠㅠ
대입을 앞둔 나이가 되니까 확실히 글을 쓸 여유가 너무 없네요. 그래도 책임지고 글을 쓰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처럼 잘 안되지만요..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가는 바람에 연재는 주로 일요일이 될 것 같아요. 주말은 턱도 없고ㅠㅠ 너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늦은 연재텀만큼 길게 길게 쓰려고 노력중이니까요, 조금만 예쁘게 봐주세요...♡
아 그리고, 한 독자님이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어요. 그러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뭐가 있지.
그래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꼽아보자면 대부류로는 아마 일본 소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싶어요. 일본 작품을 찾아보는 편입니다.
매니아틱한 애니메이션에 입문은 하지 못 했지만, 저는 주로 지브리 에니매이션을 좋아합니다. ㅜㅜ 그 스튜디오의 영화는 거의 다 봤어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도 좋아해요. 태형이의 추천으로 늑대아이를 본 적도 있고요.
그 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 영화는 한 서른번도 넘게 돌려본 것 같아요.
이 영화에 실린 ost인 '어느 여름 날'도 굉장히 좋아합니다ㅜㅜ 그 아련한 비지엠에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느꼈어요.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를 꼽자면 인셉션이요. 몇 번이고 봐도 진짜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정도로 너무 천재같은 영화라서 계속 돌려보고 있어요.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면서 그 장벽을 허무도록 느끼게하는 발상이 너무 천재적이라서 박수를 치면서 봤던 기억이 나요 ㅋㅋㅋ
보고싶은 영화도 굉장히 많아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위대한 개츠비, 되게 많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ㅠㅠ 아예 리스트에 따로 적어야겠어요.
또 좋아하는 소설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을 굉장히 좋아해요.
제가 이걸 한 2~3년 전에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신작이라는 홍보를 듣고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났는데, 그 때까지만해도 입 소문을 타기 전의 소설이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하고는 했는데, 역시 유명 작가의 글이라 그런지 바로 여기 저기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ㅋㅋ 이 책 정말로 추천해요.
과거과 현재가 이어지는 낡은 잡화점에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생겨나는 에피소드를 쓴 소설인데 진짜 재밌어요.
일본 소설의 매력에 빠져서 이것 저것 찾아봤는데, 추리 소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 가장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누가 읽어도 좋을듯해요.
그 외에 공허한 십자가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도 지금 읽는 중에 있고요. 괜히 추리 소설의 대부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소재에 참신함이 굉장한 것 같아요.
여러분 일본 소설 진짜 재밌어요 ㅋㅋ 한국 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게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일본 특유의 그 잘 정돈되고, 청량한 분위기가 소설 속에 잘 녹여있어서 저는 굉장히 추천합니다 ㅠㅠ
그리고, 요즘 추천받은 소설책은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라는 한국 소설인데 얼마전에 추천을 받았어요.
저희 어머님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친구가 빌려준 걸 옆에서 몇 번 보고, 선뜻 빌려준 책을 어머니께서 읽고 계세요.
다음 타자는 제가 될 것 같은데 얼른 읽고 싶어요ㅠㅠ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상황을 가감없이 묘사한 부분에 마음이 찡한 부분이 되게 많아요. 교훈도 있는 글이라서 저도 빨리 읽고 싶습니다! 너무 기대돼요.
질문은 계속 받아서 이렇게 글이 끝난 후에 사담으로 올려드릴 테니까요, 궁금하신 점들은 다 댓글에 남겨주세요.
어.. 그리고 사실 말하자면, 댓글 보면서 힘을 낼 때가 굉장히 많아서 모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려요. 그래도 조금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제 글이 독자님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지만서도, 저는 자음이 연속으로 쓰여지는 댓글보다는 독자님의 진심어린 코멘트가 듣고 싶을 때가 더 많아요.
물론 어느 댓글이 좋은 댓글이고, 나쁜 댓글이고 이렇다는 거는 아니지만, 제가 이 글 한 편을 쓰면서 소요하는 시간에 비해 조금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을만큼의 댓글이 몇 개씩 보여서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뭐라할 자격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저를 배려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너무 죄송합니다ㅠㅠ 댓글은 작가의 원동력이 되니까요. 독자님의 진심어린 댓글을 전 항상 원하고 있어요!
저번 편에 암호닉 신청 댓글이 많이 보여서 너무 좋았어요ㅠㅠ 암호닉 신청은 항상 받고 있으니 댓글에 신청해주세요! 너무 감사합니다ㅜㅜ
♡핑슙/루이비/혬/오전정국/앰플/꽃길/민트/오호라/방소/라온하제/030901/짐짐/계피/나의별/0103/윤기꽃/망개쿵떡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