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준면편
[10]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 재단의 대학 병원 안이었다.
수술실의 불이 켜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절규하거나 혹은 울분을 토해내는 소리만이 난잡하게 준면의 귓전을 울렸다.
문득 차갑게 질린 손을 내려다 보는데 온통 피로 물들어있다. 준면은 질겁을 하며 떨리는 손을 허겁지겁 셔츠자락에 북북 닦아냈다. 하지만 손끝에 물든 검붉은 선혈은 지우려 할 수록 더욱 선명해져가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준면이 굼뜨게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본다.
셔츠에도 붉은 꽃이 잔뜩 피어 올라 있었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라도 한 듯한 꼬락서니였다.
아니, 어쩌면 죽인 걸지도.
그래 맞아, 죽였다.
준면의 모든 시간은 그 기억을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문 준면이 제 앞에 선 자신의 연인을 향해 되묻는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그만 하자 이제, 더이상 오빠 그림자 안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아."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외진 콘크리트 건물 구석에 서서 꽤 좋지 않은 방식으로 이별을 논하는 남녀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거짓말."
준면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던 준면이 곧 담배를 발로 짓이겨 끄곤 은재의 눈을 마주한다.
"오빠 정신차려."
"…"
"오빠 와이프가 이런 모습 보면 어떻겠어."
"…"
"나 간다."
준면의 재단 보육원의 후원으로 유명 대학병원의 레지던트로 자란 그녀와, 커다란 기업의 차남인 준면. 태어난 환경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둘은 늘 다른사람의 눈을 속여가며 연애를 했다. 자그마치 6년동안 사랑을 속삭였지만 끝은 이렇게 단순하고 쉽다. 허무한 마음에 텁텁한 한숨과 함께 코웃음이 나왔다. 전부 거짓말 같았다. 다 저를 밀쳐내려고 꾸며낸 상황일 거라고 자꾸만 믿게 된다. 빨간 구두를 또각이며 걸어가는 은재의 팔을 붙잡은 준면이 다급하게 말한다.
"은재야 내 말 들어."
"…"
"너한테 다시 돌아갈게, 약속 할게, 몇 년만 눈 꼭 감고 기다려 주면…, 그럼 내가…."
"그만 해 이제!!!!!!!"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를 버럭 지른 은재가 숨을 고르고는 빠르게 뒤를 돌아 골목을 나선다. 잠시 멍청하게 서있던 준면도 곧 은재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골목을 나서니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미친듯이 사람밭을 헤치고 달렸다. 이렇게 끝일까, 우리의 끝은 과연 이렇게 최악이어도 되는 걸까. 이대로 널놓치고 마는 걸까, 준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참을 달려서 결국 은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김은재…."
은재가 울고 있다. 그 갸날픈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설움을 토해내며 울고 있다. 잠시 당황한 준면의 손이 은재의 어깨에 닿기 무섭게 은재가 커다란 대로의 빨간불인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평소같으면 미쳤냐며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딴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이내 준면또한 망설이다가는 은재를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순간이었을까, 커다란 트럭 한 대가 클랙션소리를 크게 울리며 준면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겁의 시간을 견뎌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던 은재의 얼굴…, 자신에게로 헐레벌떡 뛰어오던 은재의 얼굴…, 그리곤 자신을 밀쳐내던 은재의 얼굴…. 모두 생생한데, 마지막 그녀의 표정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밟은 트럭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일은 면할 수 있었지만 은재의 온 몸에선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아스팔트 바닥에 흐르는 까만 색 무언가가 과연 피일까 의심케 만들었던 준면의 동공이 흐르는 피를 향해 움직인다. 하얀 준면의 신발에 닿은 검붉은 색 무언가가 준면의 신발을 빨갛게 물들여놓고 있었다. 잠시동안 멍하니 서있던 준면은 그제서야 풀린 다리로 삐끗거리며 은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은재야…, 은재야….
초록불이 되자마자 사방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생명의 불이 다 꺼져가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안고 절규하는 남자를 둘러쌌다.
준면은 피로 적셔진 은재의 몸을 소중히 끌어안고 우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차갑게 굳어가는 은재의 온몸을 보듬고는 오열했다.
*
그 후로 며칠이고 날 찾아오는 악몽에 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죄인처럼 물을 마시지도, 무언가를 먹지도, 편히 잠도 이룰 수 없는 생활을 반복했다.
하루는 그여자와 함께 사는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현관에 왜 네가 있나 헀다. 순간적으로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널 껴안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러니까 네가 아니어서, 난 다시 웃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몇 번이고 그여자를 통해 넌 내게 찾아 왔었다.
그럴때마다 난 신께 기도했다. 부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그 여자를 통해서라도, 은재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세요.
그 여자는 내게 매일 상냥하고 다정했다. 왜냐하면 그여자는 나와 반대로 날 많이 사랑했거든. 나도 그 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자가 날 사랑하고 사랑하면 할 수록, 더 싫어지고, 미워졌다. 그여자가 내게 사랑을 속삭일때마다, 그게 너였으면 했고, 그 여자와 매일 한 침대에서 잠들고 깰때마다 내 옆자리에 네가 있었으면 했다.
난 그녀를 통해서 너를 찾으려 할 수록 너를 잃어갔다.
이젠 나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얼굴, 성격, 미련함까지 너와 닮아가는 그 여자가 싫었다. 그래서 난 더욱 엉망으로 행동했다. 매일같이 다른 여자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고, 잠자리를 가졌고, 웃어줬다.
싫었다. 내가 그렇게 그여자의 속을 상하게 할 때마다 그 여자는 혼자 울었다. 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꼭 너처럼 행동했다. 상당 부분이 너와 많이 닮아있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여자의 속을 상하게하고 울렸다. 너와 똑 닮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여자가 너무 가엾어서, 불쌍해서. 가끔씩 다정하게 굴어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그 여자를 울리고 괴롭힐수록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난 그제서야 알았다.
아, 난 그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널 죽게만든 그 여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내가 싫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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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드디어...!!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열심히 달려보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