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7
햇살이 가득 들어선 카페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셨다. 이미 풀어 버린 지 오래인 목걸이를 나는 버리지도 못하고 꼭 쥐고만 있는다. 남편의 불륜을 목격했다. 분노에 치밀어서 온갖 상상을 다 했던 나였고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차분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애초부터 분노에 몸을 떨어가는 나만 제외하면 달라질 것들은 없었으니까. 역겨운 사람. 하루하루씩 당신 옆에서 여자로 죽어가는 날 보기나 했을까, 당신을 향한 내 온갖 감정들이 얼마나 커져 있는지 당신은 알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항상 나를 던지고 죽인다. 답도 없는 위험한 물음들에 수도없이.
"웬 일이야, 회사 앞까지?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시간 나서 얼굴 보러 왔어."
손가락을 움켰다 풀었다 떨리는 손을 주체 할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을때야 비로소 찬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미소를 띈 채로 의자에 앉는 찬열은 차를 시키는 내내 계속해서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느냐고.
"너 무슨 일 있잖아, 자꾸 그런 미운 표정 하지 말고 말 해."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숨을 쉴 때 마다 수백개의 바늘이 내게로 겨눠지는 것 마냥 답답하다.
"남편이…, 지 여자 데리고 백화점에 갔더라, 근데 마주쳤어."
찬열은 차를 마시다 말고 인상을 찌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본디 말이 험하지 않은 찬열이인데, 이러는 걸 보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가슴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는지 반증해주는 것 같다.
"미친 새끼…."
"그동안 나 없이도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얼마나 많은 눈들이 그 여자를 보고 있었을까. 내가 아닌 그 사람 옆자리에 있는 그 여자."
말들도 많았을 거다, 아마. 김준면사장 세컨드, 밥먹듯이 하는 외도. 그렇게 나 혼자 숨죽여왔던 세월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가슴에 먼지만 흩날린다.
"나는 네가 그냥 이혼 했으면 좋겠어, 근데 그게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회사 상황으로나 네가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일에나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지 알아."
"…."
"근데 너 그런 표정 볼 때마다 안아주고싶어.
"…."
"…그러니까."
"…."
"그냥 그 인간 품에 안기고 싶은 날엔 이렇게 나한테 와."
"…."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찬열이 되려 미간을 구기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미 난 너라는 따뜻한 존재만으로도 헐뜯긴 마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걸까. 구긴 손에 있던 목걸이를 매만지기 시작한다. 배 고플 텐데 나가서 밥먹자. 찬열이 내 손을 잡고 일으킨다. 펄럭이는 코트 자락에서 향기가 난다. 바깥사람의 향수냄새. 코를 타고 들어와 내 뇌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숨을 멈췄다. 나는 어디서든 김준면을 찾고 있다. 그게 어디던.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나는 오늘도 양 손으로 당신의 와이셔츠 어깻단을 털어내며 맵시를 정돈해준다. 그리고는 셔츠 색에 맞춰 가장 어울리는 넥타이를 골라 당신에게 매 주지. 아마 누군가가 이 꼴을 보고 있다면 분명 미쳤다며 경악을 할 테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죽었다 깨어 나도 당신은 내 남편이자 나와 함께 사는 내 반려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텐데.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당신의 낯선 행동에 나는 픽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 탔다. 뒤늦게 당신이 타고 나서야 자동차는 시동이 걸림과 동시에 이 지겹고 한적한 동네를 빠져 나간다. 계속해서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들 속에서도 여전한 건, 말이 없는 당신과 나 둘 뿐이겠지.
"오늘 봉사활동 예정 되어 있어요, 자주 가던 보육원에서 내려 주면 돼."
당신은 바람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담배를 문다. 이내 담뱃불을 붙이는 당신은 우습다는 눈초리로 내게 말한다.
"교양있는 척 하는데에 참 일가견 있어, 넌. 어제까지만 해도 불쌍한 애들 나오는 다큐 재미 없다면서 채널 돌려 버렸는데."
"그런 애들 하루이틀 보나, 당신이나 나나. 보여주기식도 이젠 귀찮고 하찮아."
김준면은 핸들에 제 손가락을 툭툭툭 두들기며 썩 좋지만은 않은 웃음을 띠곤 나를 바라 본다. 그 눈빛에 복잡한 감정과 함께 오묘함이 밀려 들어 온다.
"그런 애들 보면, 무슨 생각 들어, 넌."
"그러게.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은데?"
"애는 죽어도 안 낳겠다던 사람이 이러는 거 보기가 여간 드문가, 해서."
나는 하찮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아이가 싫은 게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태어 날 그 어린 존재가 가여워서 그래, 내가 살아 숨쉬기도 벅찬 그 집에서 그 애는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생각하는 게 너무 골치가 아프고 싫증이 나서 그래. 그만큼…. 내가 여자로서의 인생을 포기 할만큼…, 당신이란 사람은 날 독하고 악랄하게 만들어. 김준면에게는 죽어도 닿지 않을 이야기를 거울을 꺼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곱씹는다. 이제는 비참함이라는 통각이 무뎌질 정도로 무던하게도 내성이 강해졌나보다.
"어머님이 애 낳으라고 독촉하셔?"
"…."
"왜 이렇게 티가 나지, 당신."
"너무 상투적이고 촌스러웠나."
나는 피식피식 웃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걸까. 당신이란 사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애 낳자, 우리. 고집 그만 부릴 때 됐잖아."
"싫다니까 정말."
당신과 사는 그 숨막히는 시간 동안 충분히 짓밟혔다. 완벽하고 철저하게.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이미 될대로 너덜너덜해진 스스로를 해하려 들고 있다. 위험하고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당신 나 사랑해?"
당신은 앞 유리창만 주시하며 내 물음을 피하려 들고 있다. 왜 대답이 없어? 색색 그의 숨소리만이 내 귀에 와닿을 뿐 그 익숙한 목소리는 여태 들리질 않는다.
"당신 나 안 사랑 하잖아, 그러면서 애는 뭐 하러 낳자고 해."
"우리가 꼭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널 죽일만큼 증오하잖아. 날 사랑하지 않는 널 사랑한만큼. 매일 잠든 당신 뒤에서 울고 있는 날 당신은 왜 못 봐. 속으로만 꾹꾹 눌러담아야 하는 이 이야기들이 한없이 서럽기만 하다. 그 이야기들이 여태 내 마음에 피로 상처로 맺혀 곪아 터질 때까지, 그는 이런 내 마음을 한치라도 못 들여다 보는 사람이다. 김준면은 그런 사람이다. 벼랑 끝까지 몰아진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게 하는, 그런 사람.
"그럼 어머님께 잘 말씀 드려, 자꾸 나 종용하지 말고."
당신은 담배를 차창 밖으로 툭 떨구며 날 바라 본다. 그리곤 가지런히 올려 놓은 내 손을 슬쩍 포개어 왔다.
"자기야."
"손 치워."
손을 치우라는 내 말에 당신은 더욱 손에 힘을 쥐어 손아귀에 내 손을 넣는다. 당신이란 사람은 꼭 양보 한 번 한 적도 없고 의견이란 걸 굽혀 본 적도 없지. 항상 기대도 상처도 미움도 모두 내 몫이다. 나는 꾹 깨문 입술이 파르르 떨려 올 때까지 내 치맛단을 꾹 붙잡으며 화를 삭혀야만 했다. 너를 향한 내 증오와 분노를 온전한 내 몸으로 담고 있기엔 너무 위태롭다. 생각치도 못 할 감정들의 늪에 빠져 자꾸만 허우적 거리게 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준면씨, 나 오늘 조금 늦어.
"알았어."
-밥은 먹었어?
"그게 궁금했으면 진작에 왔어야지, 늦게 올 거면 그런 거 묻지 말자 우리."
-그래 알았어, 먼저 자.
준면은 침대헤드에 몸을 기대 아까부터 멀쩡한 핸드폰만 주시하고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계속해서 핸드폰만 주시한다. 여전히 한결같은 침실의 달빛은 항상 준면을 깨운다. 아내의 귀가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아내와의 통화가 끝난 뒤 두어시간 즈음 뒤 발코니에 가 보면 마당 중간 쯤에 서서 자신의 체취를 정리하려 향수 냄새를 뿌리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가 보면 아내와 계속해서 만나고 있던 그 남자와의 작별이 길어지는 정도. 그 적지않은 시간을 준면은 항상 술로 채웠다. 똑같은 언더락 잔에 똑같은 얼음볼, 그리고 다른 게 있다면 매번 독해지는 양주.
고요히 앉아 술을 홀짝이며 자리를 지키던 준면은 가디건을 걸치고 발코니로 향한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난간에 팔짱을 끼고 기대 휘황찬란하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는 두 남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준면은 미처 풀지 못한 시계를 문득 들여다 봤다. 새벽 2시 10분. 어제보다 한 시간 늦은 시간이었다. 준면은 가디건을 벗으며 침실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남은 술을 마저 홀짝이는가 싶던 준면은 갑작스레 언더락 잔을 테이블에 쳤다. 쨍그랑 미친 듯 파열음이 났고 준면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문득 실의 문으로 향했다. 조금 있으면 아내는 저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준면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손가락이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후두둑 쏟아지는 피들이 식탁 위를 물들였다. 준면은 제 손을 덤덤하게 한 번 털어내며 침실로 향했다. 눈을 감은 준면은 곧 멀리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주먹을 더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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