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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거리

w.앵





11.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렀다. 연습생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회사를 오가기 몇 주, 종현은 그 짧은 시간동안 제 데뷔곡까지 확정받는 이례적인 결과를 이루어냈다. 모두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아낌없는 찬사를 했다. 종현은 이미 어느정도 탄탄한 입지를 다져놓은 준비된 신예였고 몇번의 특별무대 참여로 그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연습생치고는 꽤 큰 성과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종현은 이제 빛날 일만 남은 것이었다. 


"형."
"으응, 왜."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작은 목소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묻어나 종현은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흰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창백하다. 내가, 네가 이지경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구나. 죄책감에 아랫입술을 꽉 문 종현이 그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항상 네 옆에 있어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안쓰러워 꼭 쥔다. 아, 기범의 눈이 천천히 흐려지다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형이 잘 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를 버리는 건 싫어. 기범의 말에 종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는 내 일부야. 범아. 나는 너를 절대 떠나지 않아. 단단하게 쥔 손을 들어올려 가슴께에 닿게한다. 약속할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진다. 기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핏 웃어보였다. 약속이 깨질 것임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항상 안좋은 예감은 맞아 떨어진다. 기범은 천천히 마음을 추스리기로 결정했다. 나를 떠나 훨훨 날아. 네 족쇄는 썩어 문드러져 더이상 너를 구속할 힘이 없으니까, 이제는 부수어버려. 눈물은 금방 멎었지만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12.

작게 바르작 거리는 몸짓을 품에 안는다.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흰 볼에 반사되어 저 멀리 벽으로 쫓겨나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기범은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듯 남자의 모든것을 눈에 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걱정이되어 작은 목소리로 아프기라도 하냐 묻지만 남자는 대답이 없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잠시 남자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깜빡이는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쳐다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되게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기범은 남자를 향해 말했다. 흩날리는 머리를 정리하고있던 남자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벙벙한 흰 셔츠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민호야, 왜 아무말이 없어.


이유없이 메이는 목을 가다듬으며 기범이 말했다. 민호라 불린 남자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약간은 거친 뺨을 쓰다듬는다. 잘 정리된 손톱이 뺨을 스쳐지나가는 감각을 기범은 눈을 감고 느꼈다. 분명 매일같이 붙어있던 그들이었는데 그린운 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찡그리지 마.


처음으로 입을 연 민호가 기범의 주름진 미간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그대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쭉 뻗은 콧대를 지나 깊은 인중과 입술의 굴곡을 훑고 가슴께에서 멈추었다. 쿵쿵 뛰는 심장이 손가락끝에서부터 전해져왔다.


범아.
응.
내 가슴은 너처럼 소리를 내질 못해.


고개를 숙인 바람에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동자가 공허하여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킨다. 입술 사이에서 새오나올 다음 말을 기범은 듣고싶지 않았다. 무슨말이 나올지는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그냥 듣고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범아, 나는…


기범은 민호의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격정으로 치닫은 숨소리가 방안을 쾅쾅 울리고 미친듯이 뛰는 심장에 기범의 갸녀린 몸이 주체할수 없이 흔들렸다. 민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공에서 부서져 유리조각처럼 기범의 몸을 파고들었다. 분수처럼 솟은 피는 그들이 앉아있던 침대위를 적시고 바닥까지 전부 빨간색으로 채워버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색채에 눈이 부셔 눈물이 터졌다.


나는 죽었잖아.


아아, 기범은 허공을 끌어안고 울음을 토해냈다. 맞다, 너는 이제 내 옆에 없지. 뒤늦게 쏟아지는 현실을 받아내기에 그의 세상속에서 민호가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흘러내리던 결 좋은 머리카락은 이제 없다. 손을 뻗으면 마주 잡아주던 그 단단한 손도 이제 없다. 웃을때 반달처럼 휘어지던 깊은 눈도, 잘생긴 코도, 자신의 말 하나하나에 다정하게 대답해주던 입술도 이제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허공만이 남았다. 기범은 웃었다. 울며 웃었다. 웃으며 울었다. 온몸을 관통한 말은 힘을 줄 때마다 더 깊게 그를 찔러왔다. 







13.

너는 결국 손가락 사이로 가닥가닥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좀 더 세게 쥐었어야 했는데. 좀 더 꽉 쥐었어야 했는데. 왜 항상 모든 것은 지난 후에 깨닫는 걸까.






14.

"안녕하세요."


깜빡,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떠도 보이는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범은 어젯밤 현관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랐어요."
"네에, 놀래켜주려고 했어요."


다행이다, 먹혀서. 손뼉을 마주치며 꺄르르 웃는 잘생긴 얼굴에 기범은 헛웃음을 뱉었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겪을수록 이상한 사람이다. 기범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빙글빙글 웃고있는 태민을 응시했다. 용건이 있어 찾아온 모양새는 아닌 것이, 태민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기범의 하는 양을 바라보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놀라게 하고 싶었어요."
"네?"


기범이형, 놀라면 막 눈이 커져서 귀엽거든요. 기범은 태민의 장난기 없는 표정에 어쩐지 아파오는 머리를 짚었다. 


"종현이형 집에 없어요. 요즘 바빠서 잘 들어오지도 않고."
"알아요."


나 종현 형 보러 온 거 아니에요. 태민이 웃는다. 기범은 저도 모르게 쿨럭 기침을 했다. 그는 첫만남 이후로도 종종 집으로 불쑥 찾아오며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으로 다 보였는지 태민이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문득 아주 살짝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여 기범은 무어라고 말하려던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저런 눈빛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우리 데이트해요."
"네?"
"아아, 말도 편하게 하구요."


멋대로 말하며 제 어깨를 잡아끄는 행동에 당황한 기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민이 그 얼굴에 또 웃더니 기범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뜨러버린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듯 하는 손길에 기범은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할 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종현이형보다 내가 더 잘생기지 않았나."


그죠? 어느모로 보나 내가 더 잘났는데.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랑 놀아요.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한다. 신나보이는 표정에 기범이 잠깐 고민하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냥 시간이나 때워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태민은 그런 기범을 보며 좋아 죽겠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루종일 웃고있네. 그렇게 생각하며 태민이 건네는 셔츠를 받아들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조금 어울려 줘도 나쁜 건 없겠지.


"뮤지컬 볼래요? 나 초대권 있는데."
"싫어요!"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에 저가 더 당황한 기범이 눈을 껌뻑이며 태민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우물우물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기범은 태민의 말에 도로 입을 닫았다.


"말 놓으라니까요. 형이잖아요."


그럼 우리 그냥 걸어요. 카페나 가고, 뭐. 아님 영화라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으며 방 문을 연다. 태민은 나가자는 제스쳐를 취하며 앞장 서서 걸어 나갔다. 작게 울리는 발소리가 쿵, 쿵, 제 가슴도 울려놓는 듯 했다.


"형. 근데요."
"네, 아, 으응."


돌아서서 마주친 얼굴이 오묘한 모양새다. 


"내가 손 내밀면 잡아 줄래요?"






15.

얼른 잡아.


내밀어진 손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네 앞에서 울고싶지 않은데. 망설이고 있자 단단한 손이 내려와 제 팔을 잡아 일으킨다. 


안좋은 소리 좀 들었다고 이러면 어떡해. 


올려다 본 얼굴이 자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담고 있어 기범은 결국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너도 아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니. 빈틈없이  맞물린 몸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뜨겁다. 걷어차인 다리도 뜨겁고 연인과 닿은 피부도 뜨겁고 차마 식힐 수 없는 이 시간이 뜨겁다. 그래서 울었다.


우리가 잘못 된 걸까?


아니. 절대로. 우리는 옳아. 평소대로라면 그렇게 말해주며 더 세게 끌어안아 주었을텐데. 제 물음에 팔을 늘어뜨리고 큰 눈을 감아버리는 민호가 낯설었다.


범아.
응.
미안해.


그 날 기범은 처음으로 민호의 눈물을 보았다. 






16.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끔찍한 기분이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17.

그 다음은 항상 같은 결말이었다. 너는 죽고 나는 부서졌다. 모든 것이 다 일그러지고 색체를 빼앗긴 흑백의 세상에서 홀로 유령처럼 헤매인다. 긴긴 상념의 끝에서 두 인영이 저를 바라보고 서 있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한 남자, 그리고 항상 걱정하는 얼굴을 한 남자. 내밀었던 손을 결국에는 거두어 간 한명은 천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굳어가는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며 기범은 심장을 움켜쥐고 웃어보였다. 괜찮아.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구석에서 울기만 하던 날들은 더 이상 없어.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다.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서. 네가 나를 떠난다. 평생 곁에 있어 줄 것처럼 다가와서 영원을 약속하고 다 주겠다며 제게 기댈 것을 강요하더니, 결국 나를 쓰러지게 내버려 둔 채로 떠나버린다. 그러나 너를 원망하지 않기로 한다.

기범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웃음을 그렸다. 상처받기 싫어. 아프기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는, 이제는 마음 주지 않을래. 

그리고 다가온 다른 한 사람의 손을 잡지 않았다. 너도 나를 아프게 할 거잖아. 그렇지? 너도 다른 두 명처럼 나만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거잖아.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는 내가 오지 않은 거라며 나를 탓하겠지. 천천히 억지로 그려낸 입가의 호선이 사라진다. 아래로 쳐진 입술 사이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데려가. 네가 가야 한다면, 나도 갈래. 훌쩍이던 그의 어깨를 천천히 누군가가 친다. 따스한 손길. 익숙한 체취. 

아아, 너구나.

기범은 그의 얼굴을 보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웃음소리를 냈다. 저를 끌어안는 양 팔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그리고 검은 장막이 내려 앉았다.











* * *
갑자기 요 글이 재밌어지기 시작했어영
곧 진기도 나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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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콰지모도에요!!앵님 진짜 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2
레몬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오랜만이에요ㅠㅠㅠ 전에 과거의 밍키와 미래의 현유 그리고 현재의 쫑키가 나오는 글이라 해서
미래의 기범이는 어떻게 되는건가 했었는데 기범이 옆에는 태민이가 있어줄까요?ㅠㅠㅠㅠ아 정말 좋네요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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