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III
III
#1
'건들지 마시오.'
매직으로 쓴 종이를 방문 앞에 붙였다. 며칠 뒤면 학부모 참관 수업이다. 안 그래도 긴장을 엄청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부감 선생님... 하여튼 높으신 분들은 다 오실 수 있다는 말에 결심했다. 뭘? 수업을 외우기로. 수업 연습도 벌써 34번째다. 수업종 치기 2분 전에 교실에 들어가서, 교탁 위에 교과서를 펼쳐놓고 - 물론 페이지는 87쪽이다. - 컴퓨터에 내 영혼을 갈아 넣은 ppt를 띄운다. 종 치면 17초 동안 수업 시작 인사를 하고, 21초 동안 학습 목표 설명하고... 하여튼 그렇게.
35번째 연습을 마치고 시계를 봤다. 39분 40초. 실제 수업 시간은 40분이니까 이 정도면 여유로울 거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부엌에 나가 냉장고에서 커피 우유를 꺼냈다. 잠 빼면 시체인 내가 새벽 3시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스누피가 그려진 이 우유 덕분이다. 전에 전정국이 잠 많은 나를 보고 미녀는 잠꾸러기라던데, 했었다.
'그래서 내가 잠이 많았던 거네.'
'아니. 넌 일단 여자가 아니잖아.'
'.......'
...그랬었다. 전정국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우유곽을 오픈하는데, 아슬하게 누군가가 우유를 뺏어든다. 뒤를 돌아보니 민윤기다.
"안 돼!"
"......."
"절대 안 돼!"
눈을 크게 뜨고 위협해 봐도 민윤기는 우유를 들고 팔을 높이 뻗는다. 나도 따라 팔을 뻗고 제자리에서 몇 번 뛰어 봤지만 우유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별수 없다.
"자기야."
"... 하지 마라."
"왜. 난 우리 자기 좋은데."
저번 야동 사건 이후로 민윤기를 놀리고 싶을 때마다 '자기야' 하고 부르면 - 그 동영상에서 나왔던 대사다. - 효과가 직방이었다. 민윤기가 입을 꾹 다물고 길게 한숨을 쉰다. 개빡쳤다는 거다. 나도 질 수 없어 팔짱을 끼다가 민윤기의 무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눈을 아래로 깐다. 일진이다, 아주.
"... 알겠으니까 마시지만 마."
"?"
"나는 몰라도 넌 이거 절대 마시면 안 된단 말이야."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인상을 팍 쓰는 민윤기에 이 때다 하고 우유를 뺏어 냉장고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아직도 인상을 쓰고 나를 쳐다보는 민윤기에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여기 들어있는 카페인이 핫식스의 6배래."
"그걸 알고도 마시냐고."
"근데 핫식스는 정자 킬러잖아. 이거 마시고 너 정자 파탄 나서 애 못 낳으면 어떡해."
민윤기는 이번엔 짧은 한숨을 쉰다. 이건 좀 다른 의미의 한숨이다. 난 원래 애 못 낳아. 아하.
"내 걱정하기 전에 네 몸부터 챙겨."
민윤기는 주머니에서 비타민 C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더니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계단으로 올라간다. 방금 오글거려서 아파트 뽑을 뻔했다. 그래도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2 : 김태형 시점
잘 자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들리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태형아, 자? 그녀의 목소리입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입니다. 환장하겠네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알아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밉니다.
"...뭔데."
"악몽 꿨어."
아직 잠이 덜 깨서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는 총 들고 '꼼짝 마!' 할 때 손드는 것처럼 양손을 머리 옆으로 들면서 방으로 들어옵니다. 어깨에는 이불을 슈퍼맨처럼 두른 것도 보입니다. 아무래도 오늘밤 그녀는 내 방에서 잘 모양인가 봅니다.
"걱정 마. 너 안 잡아먹어."
잡아먹다니요. 저게 할 소립니까.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니까 진심이니 걱정 말라며 손을 휘젓습니다. 혼자 있으니까 잠이 안 와서 그래. 그녀는 방바닥에 자기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눕습니다. 이불의 끝자락에 누운 그녀는 방을 구르며 김밥 말이를 합니다. 나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구경합니다. 그녀는 요즘 많이 힘든가 봅니다.
그저께 우리를 거실에 불러 기계치인 애가 한 시간이나 걸려서 자신의 노트북과 티비를 연결하는 수고까지 들여 ppt를 티비에 띄우고 수업 시뮬레이션을 했었는데,
'글자 크기는 13보다 14가 나을 것 같은데.'
'.......'
'그리고 네 번째 슬라이드에 띄어쓰기 안 한 거 하나 있더라.'
'.......'
'너 그때도 손 그렇게 떨 거 아니지?'
김남준이 눈치 없이 온갖 지적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눈을 꼭 감으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가 눈을 깊게 감으면 그건 뒈지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그날 밤 그녀는 모든 걸 갈아엎었습니다. 그동안 김남준은 우리한테 밟혔고요. 그 자식은 물건도 많이 파괴하지만 그녀의 멘탈을 가장 잘 파괴해요.
"이러면 됐지? 나 이불에 팔 갇혀서 손가락 하나도 못 빼."
"......."
아직도 바닥에 누워있는 그녀는 보란 듯이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말을 멈춥니다. ... 나 침대 위로 올려주라. 참 가지가지 합니다. 그녀는 이불에 말린 채로 저를 간절하게 쳐다봅니다. 참관 수업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김남준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전정국은 잘 때 문 잠그고 자고, 민윤기는 잠버릇 심하고."
"......."
"...김남준은 입 냄새난단 말이야."
김남준이 잘못했네요. 이건 무조건 김남준 잘못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며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침대 위로 올렸습니다. 만족한 얼굴의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벌떡 뜹니다.
"노래 잘해?"
"못해."
"자장가 불러주라."
이렇게 시킬 거면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고 기침을 합니다. 오늘의 선곡은 방탄소년단의 Butterfly입니다. 그녀는 '대체 뷔의 어디가 잘생겼다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어.' 라고 한 정확히 일주일 뒤에 방문에 뷔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그것도 겁나 큰 걸로요. 잠시 뒤척이던 그녀는 입을 달싹입니다. 잘만 부르면서.
"......."
"......."
어느새 고른 숨소리가 색색 들리고, 난 그제야 이불 틈으로 내 옷을 꼭 쥔 그녀의 손을 발견합니다. 오늘밤 자기는 글렀습니다.
#3
"그 남자랑은 잘 돼가?"
방문 앞에 '건들지 마시오'라고 붙여놨는데도 민윤기는 내 방에 들어와 내 뒷모습만 쳐다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저거다. 어이가 없다.
"그 남자가 누군데."
"지난 주에 네가 말했던 그,"
"아, 걔?"
잘 넘어간 것 같아. 내 대답에 민윤기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래? 하고 물었다. 민윤기의 그 남자는 지난주에 내가 '짜증 나 뒤지겠다'고 한 남자를 말한 거였다.
"응. 새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던데."
"뭐? 벌써!!!"
"......."
"......."
순간 방문이 열리고 김태형이 처들어왔다. 밖에서 나랑 민윤기가 하는 말을 엿듣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방 앞에 붙인 '건들지 마시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옷처럼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게 해둔 것도 아닌데 안 보이는 모양이다. 나랑 민윤기가 빤히 쳐다보자 김태형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눈을 부라렸다. 너 좋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갈아타.
"진지하게 좋아한 게 아니었나 보지."
"뭐야. 그럼 너 갖고 논 거네?"
"뭐? 갖고 놀았다고!!!"
... 이거 데자뷰 같다. 김태형처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전정국은 내가 아무리 지를 째려봐도 '그저 눈 찢어진다.' 하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런 놈들은 국가가 나서서 격리조치 시켜야 한다고도 중얼거리면서. 이러다 김남준도 튀어나오겠다.
"갖고 놀긴 뭘 갖고 놀아. 그냥 잠깐 반짝 한 거지, 뭐."
"그 인간 당장 데려와. 지금 어디래?"
왜인지 모르게 약간 흥분한 듯한 얼굴로 묻는 김태형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만 보자... 지금 시간이면... 두뇌 회전을 마친 나는 대답한다. 지금 아마 학원 가 있을걸.
"...학원? 무슨 학원."
"아, 학원 안 가고 구몬 하려나? 해찬이가 저번에는 구몬쌤보다 내가 예쁘다고 했었는데."
"......."
"씨발, 초딩이면 초딩이라고 했어야지!"
나왔다, 김남준.
#4
"마침 잘 왔다, 너네. 나 내일 입을 옷 좀 봐줘."
이왕 집중 깨진 거. 하며 넷을 거실로 밀었다. 그중 김태형의 손에 신문지를 쥐여주며 '내 방에서 거실까지 레드 카펫 깔아줘.'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며칠 전에 새로 산 에나멜 로퍼 힐까지 와안-벽하게 맞춰 입고 방문을 열었다. 김태형이 깔아준 신문 카펫을 밟고 오니 다들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존나 이럴 때만 대동단결이다. 전정국이 다른 옷 입고 나오라며 등을 떠민다. 할머니 같다나.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둔 2번 코디에 3번 코디까지 입고 나왔지만 반응이 다 별로다.
"옷장이 뭔 헌옷 수거함이냐? 어떻게 옷 같은 옷이 없어."
"옷이 문제겠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야."
"넌 평생 완성 못하겠네."
"... 싸우자고?"
... 내가 얘들한테 뭘 바랬을까. 그냥 말없이 방에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나오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던 넷은 나를 보더니 일제히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친다.
"이거다."
"그래. 이거야."
"왜 이런 옷을 두고 딴 옷만 입었어?"
집을 폭파시키고 싶다. 심지어는 감동받은 얼굴인 전정국의 뒤통수를 대표로 갈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을 여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김남준이 고개만 쏙 내민다.
"두 번째로 입은 거 예뻤어."
김남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갔다. 침대에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을 보며 두 번째가 뭐였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아. 기억 안 나는데.
#5
"이제 일어나자."
"으응... 지금 몇 시야?"
"여섯 시."
"... 아직이자나......."
"그래도 일어나. 얼른 준비해야지."
아침부터 김태형이 징그럽게 엉덩이를 토닥이며 깨우더니, 내가 꿈쩍도 않자 나를 그대로 들쳐매고 화장실 데려가서 세수까지 시켜주고 샤워하라면서 나갔다. 씻고 나가니까 전정국이 드라이기를 들고 있더라. 침대에 앉아 머리 말리고 있으면 김남준이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 접시에 담아왔다. 가서 고기 값은 하고 오라며 주먹을 불끈 쥔다. 존나 수업하는 건 난데 지들이 호들갑이다. 그런데 민윤기가 안 보인다. '민윤기는?' 하고 묻는 내 말에 전정국이 대답한다.
"나갔어. 너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니까 바쁘다고 건들지 말래. 많이 바쁜가 봐."
"그래. 너네도 적응 안 되니까 그렇게 꺼져줄래?"
"해 줘도 지랄이야."
"... 고맙다고."
그렇게 셋의 배웅을 받으며 어젯밤에 선보였던 에나멜 로퍼를 신는데 문득 이질감이 들어 다시 벗었다. 뭐 하는 거냐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셋에 당황해서 신발을 보니까 반창고가 양쪽에 하나씩 들어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발꿈치 아프지 말라고 그런 거 아냐?"
"어제 넣어두고 깜빡했냐?"
"어? 어... 그랬네."
...민윤기다. 나는 반창고 같은 거 안 넣어뒀다. 이런 세심한 거 챙길 사람은 민윤기뿐이다. 어제 패션 - 쌩 - 쇼를 하면서 신었을 때 신발에 자꾸 발뒤꿈치가 까져서 아파하던 걸 다 본 거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오늘 수업은 내가 다 작살내고 올 거다.
#6
... 그래서 진짜 작살나게 생겼다. 학교에 김남준이 왔다. 아니, 말이 되냐고. '학부모' 참관 수업에 자기도 참관하시겠단다. 학부모 아니면 안 된다니까 학부모 맞다고 바락바락 우기며 나를 가리켰다. 내가 마음으로 낳은 딸 여기 있잖아. 하여튼 존나 뻐킹이다.
마음으로 낳은 동갑내기 딸이 있는 애 아빠 김남준은 쉬는 시간에 와서는 얼마 전에 정체를 들킨 옆 반 해찬이도 보고 왔다. 자기 말로는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줬다는데, 자기도 모르면서 뭘 말했나 모르겠다. 일단 칭찬해 달라는 눈으로 쳐다보길래 잘했다고는 했다.
"... 발표해 볼 사람 손들어 볼까?"
"......."
"......."
손들어 볼까?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남준이 손을 든다. 왼손으로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킨다. 콕콕. 미칠 것 같다. 저렇게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손을 번쩍 든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네! 하고 대답도 존나 잘한다. 구석에서 어머니들께서 눈치를 보며 수군댄다. 누구 아빠래? 애는 어딨어?
...세상 씨발....
자기 혼자 하면 또 모른다. 자기 앞에 앉은 애를 툭툭 건들면서 수업 들어야지, 하기도 하고 그 옆에 애한테는 선생님 뻘쭘하지 않게 대답 잘 해, 하고 눈을 부라린다. 진짜 부지런하게 미친놈이다. 내 수업을 망치려고 온 게 분명하다. 교감 선생님께서 들어오신 이후로는 그 옆에 찰싹 붙어 얼마나 귓속말을 하던지.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누가 읽어볼까요? 내 말에 번쩍 손을 든 김남준을 무시한 채 우리 반 반장이 읽도록 부탁했다. 진심으로 시무룩해진 김남준을 보며 나는 조용히 눈을 꼭 감는다. 조만간 저 새끼 내가 죽일 거다. 진짜 죽일 거다.
#7
참관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있던 길고 긴 학부모 상담도 모두 끝났다.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풀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정문 앞에 익숙한 차가 보인다. 전정국이다. 나를 보자마자 클락션을 광광 울려주는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나랑은 모르는 인간이다, 생각하면서 집 반대 방향으로 걷는데 전정국은 내 옆으로 바짝 차를 대고 창문을 내린다.
"거기 집 가는 방향 아니거든."
"......."
"... 그만하고 타라."
끝까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전정국의 정색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손을 곱게 모으고 조수석에 타기로 한다. 차에는 전정국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독수리 오형제 다 있다. 차 안에서 뜻밖의 정모가 벌어졌다.
"잘했어?"
"교감이 나한테 쟤 칭찬했다니까. 그거면 말 다한 거 아니냐?"
"떨지는 않았고?"
"어. 얘 존나 죽여줬,"
"네가 얘냐! 왜 네가 대답하냐고! 애 목소리 좀 듣자!"
전정국이 터졌다. 길 가던 사람들이 차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무슨 일 있나 하고 우리 차 쪽을 쳐다본다. 아, 진짜 살기 싫다. 두 눈을 꼭 감았다. 앞만 보며 운전하고 앞만 보며 소리치던 전정국은 몇 번 숨을 고르다 저녁 뭐 먹을까, 한다.
"우리 수고했으니까 고기 먹자! 고기!"
"수고한 건 쟨데 왜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어."
"내가 마음으로 낳은 딸, 저녁 뭐 먹고 싶어."
"... 말하면 사줘?"
"어. 오늘 전정국이 쏜대."
놀라서 전정국을 쳐다보니 전정국은 여전히 앞만 보면서 감동받은 얼굴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총으로 막 쏘는 거 말고 진짜 사주는 거 맞냐고 물어보니까 전정국은 진짜 쏘기 전에 닥치라고 했다. 나는 입을 꼭 깨물었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언어유희였는데. 유머를 모른다, 유머를.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진짜 다 말해?"
"고기 먹자! 고기! 고기! 고기!"
"겁나 비싼 거 불러."
진짜 다 말하라고 했다? 하고 물으니 갑자기 전정국 다급해졌다. 야, 야, 너무 비싼 건 안 돼. 진짜 안 돼. 뒤늦게 수습을 하려고 하지만 다 소용없다. 난 그동안 밤새운 거, 고생한 거 다 보상받을 거다.
"나 자몽 워터 먹고 싶어!"
"......."
"......."
분명 진짜 다 말하라 했다.
#8
결국 우리의 도착지는 뷔페였다. 전정국은 자몽워터를 외친 내 말에 길 한가운데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진심이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전정국은 진짜 쏴 죽이고 싶다는 어마무시한 말을 하더니 그냥 자기가 알아서 가겠다고 했다.
"몇 분이세요?"
"5명이요."
"여기 정신 연령이 7살인 사람이 있는데 얘는 미취학 안 되나요?"
"너 진짜 미쳤냐?"
"거, 말이 너무 심하시네! 그럼 넌 가슴이 7살이니까 미취학이냐!"
"......."
"너 말 다했냐? 자기는 뽀로로 보면서 우는 주제에!"
"너네 둘 다 저기 구석에서 손들고 있어."
존나 짜증 난다. 나는 그저 이 호화로운 뷔페에 전정국 등골이 휘지 않을까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사람들 다 지나가면서 쳐다보는데 김태형이랑 나란히 벽 보고 손들고 섰다. 뽀로로를 보면서 우는 애랑 나란히 서 있는 건 내 인생에 수치다. 물론 나도 글썽이긴 했지만, 난 적어도 울지는 않았다.
김남준이 피자에 마음을 뺏겨 정신 놓고 거의 한 판을 접시에 담아놓는 동안 민윤기가 와서 그만 팔 내리고 먹으라고 한다. 팔을 광광 때리면서 접시를 들고 돌아다니는데,
"뭘 봐. 그러다 너 눈 찢어진다."
전정국이 내가 먹을 거마다 집게를 가져가 스틸 하는 거다. 아까 기분이 아주 나빴다면 지금은 기분이 아주 족친다. 두 바퀴쯤 런닝맨 마냥 추격 레이스를 돌다가 먼저 지친 나는 빈 접시로 레몬수나 떠서 테이블로 갔다. 내 자리에는 아까는 없던 접시가 있었다. 전정국 접시다. 그러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모아놓은 접시. 감동받은 얼굴로 전정국을 보니까 아, 잘못 놨다. 하면서 옆으로 옮긴다. 홱 째려보니까 내 빈 접시를 들고 가며 웃는다. 맛있게 먹어.
#9
뷔페를 쓸고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자몽 워터를 사러, 아니, 모시러 간다. 오늘 날 잡고 지갑 오픈한 전정국과 편의점에 들어갔다.
"자몽이 그렇게 좋냐? 입이 찢어진다, 찢어져."
"너보다는 좋아."
사실 아까도 뷔페에서 구운 꿀 자몽만 두 접시 가져와서 먹었다. 자몽은 그냥 내 인생의 이유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전정국이 묻는다. 자몽이야, 나야. 나는 못 들은 척 냉장고 문을 열고 자몽 워터를 꺼낸다. 뭐 저딴 걸 질문이라고 한담. 유치하게.
"... 뭐 하냐? 몇 개를 꺼내는 거야. 편의점 털 일 있어?"
"2+1라고 여기 써 있...."
"......."
"... 그래도 이건 너무 많지? 그래. 너무했다."
전정국의 눈치를 보며 하나씩 냉장고 안으로 다시 넣었다. 잘 가... 아기들아... 언니가 다음에 와서 데려가 줄게...! 슬픈 작별 인사를 하다가 품에 세 개만 남았을 때 전정국의 눈치를 한 번 더 보니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가져 와."
"사랑해."
전정국이 안면 근육이란 근육은 다 찌푸리고 쳐다본다. 진짜 못생겼다. 아랑곳 않고 세 아가들을 계산대 위로 올려놨다. 전정국은 지갑을 손에 쥐고 꿈쩍도 안 한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고 말을 번복한다.
"... 나 허언증 있어."
"그래야지."
그제야 전정국은 표정을 풀고 지갑을 연다. 얼마예요? 계산을 마친 편의점 알바생은 봉투 담아드릴까요, 한다.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본 전정국은 봉투 안 담았다가 쏟으면 얘 울지도 모른다며 담아달라고 한다.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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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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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에피소드만 쏟아놓은 것 같아 오늘은 이어지게 써봤습니다. 읽는 데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사실 억지로 끼워 넣은 감이 없잖아 있어서 수업 하나에 뭐 이리 유난이냐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자신감 하락) 하지만 독수리 오형제는 츤데레데레들이니까요! 여러분 일이면 얼마든 유난쯤이야 떨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억지)
그리고, 저기 위에 자몽이들이 뭔가 싶으셨죠! 사실 그동안 저와 독자님 사이에 애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문득 자몽이 보였슴다. 제가 자몽 덕후거든요. 그리고 또 독자님들 덕후니까,
자몽=독자님=♡.
이렇게. 좋지 않나요? 지금 고개 끄덕이는 거 들켰어요. 고개 아니어도 마음으로 끄덕였으니까 된 겁니다. 제가 모든 댓글에 답은 못 남겨도 다 읽고 있습니다. 여러 번 읽어요. 기억해 두려고. 저 쫑알쫑알 얘기하는 거 되게 되게 좋아하니까 시답잖은 말도 다 하고 가세요. 다! 'ㅇ'
지금이 시험 기간이라고 들었습니다! 또 감기가 많이 돌고, 태풍의 피해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자몽이들 잘 지내려나 걱정됩니다. 중요한 때에 아프거나 다치는 자몽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독감 예방 주사도 놔준다니까 꼭 맞고, 밤에도 이불 잘 여미고 자셔요. 말이 되게 길어졌는데, 결국 다 같은 말입니다. 사랑한다고요!
구럼 우리 자몽이들, 구빰!
BGM : Midnight moon
+)아... 저 글 한 번 날렸어요... 진짜 뒤지고 싶습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