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론 06 "아니야,하자!" 나는 거절 할 수 없었다.아니,거절해서는 안될 만큼 순진하고 명량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해왔다.마치 머릿 속 한가득 이미 나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것 까지 상상을 끝낸 사람처럼. 나는 차마 노래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정국이의 그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정국이의 그 아름다운 음성을 내가 더럽힐 수는 없었다.그래서 정국이와 타협을 했다.너는 노래를 불러라,나는 기타를 칠테니. "다음은 영화 동아리의 무대입니다.박수!" 무대가 떠나갈 듯한 함성,그리고 박수 갈채.그 환호가 커져 가면 커져 나갈 수록 점점 나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이 모든 아이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무대에 환호하는 이유는 단 하나,정국이였기에. "저희는 영화 동아리에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저희는 영화 상영과 카페를 운영 중인데요,많이 찾아와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홍보 차원에서 오르게 되었습니다." "큰 호응 부탁드립니다." 하나도 안떠는 것 봐,천생 무대 체질이다.전교생에 동네 주민들까지,이렇게나 수많은 사람 앞에 이렇게 서 있는 것도 나는 두 다리가 후들거려 미치겠는데 정국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멘트를 여유 넘치게 술술 뱉어 냈다. 멘트를 마치고 나에게 눈짓으로 말하듯 신호를 주었고 우리는 마련된 의자에 걸터 앉아 노래가 흘러 나오길 기다렸다.정국이는 떨지 말라는 듯이 나를 지긋이 쳐다 보았고 나 또한 내가 떠는 모습에 그 아이가 걱정할까 어렵게 웃어 보였다. "아-,아주 달달하니 이 날씨에 참 잘어울리는 무대였습니다.그렇죠?" 무대를 끝내고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두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정국이는 미친듯이 노래를 잘해주었다.나는 정국이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내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기타 하나를 들고 앉아 오로지 무대 위에서 나를 바라 보며 노래를 불러 주는 그 아이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내내 손이 바들 바들 거렸었다. 줄은 끊어지지 않을까,혹시나 코드를 틀리지 않을까.나의 수많은 걱정들과는 달리 무대를 잘 끝냈지만 참았던 그 긴장감들이 풀리며 두다리의 힘마저 풀리고 말았던 것 같다. "괜찮아?" "하-,괜찮아." "업어 줄까?" "아니야,지금 동아리실에 사람 많아서 바쁠텐데 너 먼저 가서 애들 도와줘.나는 잠깐 스탠드 앉아서 쉬다가 갈게." "아니야,기다렸다가 같이 가자." "정국아,나 잠깐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어." "...알겠어.그럼 나 가서 얼른 도와 주고 사람 없으면 너 데리러 올테니까 괜찮아질 때까지 꼼짝도 말고 여기 있어." "알았어,알았으니까 얼른 가봐." "...응." 정국이는 쏜살같이 310호로 뛰어 올라갔다.나는 스탠드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며 다음 무대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 바라 보았다.나도 친구들과 어울렸다면 저 아이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잘 섞여 들었을 수 있었을까. "저기," "...네?" "아까 무대 했던 학생 맞죠?" "네,그런데요..." "혹시 같이 무대 선 남학생은 어디에..." "정국이는 왜..." "같이 있던 게 아닌가보네요.영화동아리실이 어디죠?" "외부인은 교내 출입은 안되는데요..." "아,저는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뜬금 없이 앉아 있는 나에게 찾아와 말을 걸어 온 누가 보아도 타지인 처럼 보이는 남자는 정국이의 행방을 찾더니 명함 한장을 내게 건냈다. 빅 엔터테인먼트.요즘 한창 뜨는 걸그룹 소속사였다.명함에는 빅 엔터테인먼트의 신인개발팀 김남준 실장이라고 적혀 있었으니 아마 정국이를 캐스팅하려는 거겠지.명함을 받아 든 직후부터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 속엔 엄청난 많은 생각들이 지나쳤다. "정국 학생 만나면 이 명함 전해 줄 수 있을까요.전화 한통만 달라고." "...네." "고마워요,꼭 전해줘요." "네." 우리 학교의 축제가 워낙 크고 유난스럽게 하기로 유명했고 이 학교 출신 연예인도 두세명은 되었다.그렇기에 매해 축제 마다 소속사 직원들이 방문하기도 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게 사실이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나는 이걸 꼭 정국이에게 전해 주어야만 할까. "하-,하-.아직도 많이 힘들어?뛰어 오긴 했는데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뭐하고 있었어?애들 노래 잘하지." "그래도 니가 제일 잘해,요즘 어떤 아이돌 보다." "에이,그건 아니다.아,근데 나 손 잡고 싶다." "안 돼,참아." "우리 조금만 돌아서 갈까?" "이렇게 사람 없을 때 잠깐 잡고 얼른 애들 도와 주러 가자,정국아." "너무 짧은데...알았어." 정국이는 아마 어떤 자리에 오르던 나를 항상 똑같이 좋아해주겠지.그럼에도 명함 한장을 전해주기가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더 이상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너를 마주하기가 힘들어진다해도 너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는게 맞겠지,정국아. * 요란스럽던 축제가 끝나고 체육대회의 아침이 밝아왔다.반티를 맞추어서는 안된다는 교장의 학칙 탓에 아이들은 조금 실망한 듯 했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해도 좋았고 바람도 좋았으니 그냥 가만히 스탠드에 앉아만 있던 나도 기분은 좋았던 것 같다. "오늘 뭐 나가는 거 있어?" "나는 그냥 다같이 하는 줄다리기만 해." "그럼 줄다리기 할 때 너 열심히 찾아야겠다." "너는 어떤거 나가는데?운동 잘하니까 이것 저것 많이 나가겠다." "규칙 때문에 단체전 말고는 두개 이상 못나가서 많이는 안나가고 단체전 축구랑 줄다리기 나가고 개인은 계주." "우와,역시 이과반이라 그런지 축구도 결승 올랐나 보네,너 몇번이야?" "나 31번.애들 사이에서 나 찾을 수 있겠어?너 어디 앉아?" "제일 잘생긴 애 찾는게 뭐가 어렵다구.우리반 조회대 바로 옆이야. "나도 너희 반 줄다리기 할 때 제일 예쁜 애 찾으면 돼?" "장난치지 말구,어서 가.축구 연습 있다며." "어,틈 나면 문자할게." 항상 등하교 때나 제대로 만나니 교복을 입은 모습만을 마주하다가 이렇게 체육복을 입고 보니 되게 새로운 기분이였다.뭘 입어도 테가 나는 정국이였지만 확실히 체육복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다.마치 이제야 제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우리반의 줄다리기 순서가 되었을 때,나는 줄을 잡고도 정국이의 반을 찾아 한참을 찾아 해매었다.정국이의 반의 자리를 보았을 때에 그 자리는 휑했고 나는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뭐야-!왜 말 안해줬어." "너 귀여운 모습 봐서 나는 너무 좋았는데.두리번 거리면서 우리반 자리 빈거 보고 놀라고,나 보고 입 삐죽 대면서 줄은 엄청 열심히 당기더라." "진짜 전정국." "근데 우리반이 이겨 버렸네." "이왕 이긴거 일등해서 맛있는 거 먹던가!"
"헤-,받아서 너 줄게!" "아주 잘생겨서는 말도 잘해.너희 반 이제 축구한데 얼른 가자." "왜 벌써한데-.끙차,너 볼 때 한번 멋지게 골 넣어 줘야겠다." "안넣어도 되니까 다치지만 마." "응원해줘." "나 이미 충분히 응원해준거 아냐?" "아니,그거 말고." "아자아자?" "그게 뭐야,귀엽기만 하고." "돌리지 말고 말해." "요기." 줄다리기가 끝나고 우리는 학교 뒷편에서 둘만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아무리 애들이 발야구에 정신 팔려 있을 때라 볼 사람이 아무리 없어도 이 아이가 아주 무서울게 없어졌다.볼을 톡톡 치며 나를 바라보는 정국이를 보고 있자니 안해주기도 뭐하고.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정국이의 볼로 향했다. "아,전정국!" "잘하고 올게-.꼭 거기 있어 줘야 돼.어디 가지 말고." "......" "좀 있다 보자." 나의 입이 정국이의 볼로 향하는 순간 정국이는 그대로 얼굴을 돌려 입을 맞추었고 내가 당황해 소리를 키우자 그대로 꼭 안아 그 자리에 있어 달라며 나의 귀에 한껏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 말이 덜컹 내 마음 한켠에 꽂혔다.어디 갈 것만 같은 건 당연히 너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그래서 그 명함을 전해주고 싶지 않았고.허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너에 대한 믿음이 생겨 전해 주기로 다짐했던 것 같다.끝까지 내가 이 자리를 떠나리라고는 의심 조차 못했으니까. "와,진짜 저 안에서도 확실히 눈에 띈다.그치." "그니까,진짜 잘생기긴 했어.여기 있을 애가 아니야.근데 왜..." 아이들의 입에 정국이가 오르내릴 때 마다 감탄 뒤에 붙는 말이다.근데 왜.항상 감탄을 하고 뒤에 근데 왜,이 말을 붙였다. "근데 왜 연애를 안하지?" "맞아,여태 한번도 누구랑 사귀네 이런 소리 한번도 안나왔어." "소문에는 연기자 되겠다고 이미지 관리한다더라.그래서 여자애들이 먼저 고백해도 좋은 친구네 뭐네 하면서 어장친다고." "하긴,저 얼굴이 여기서 우리 같은 수준 만나면서 흑과거 만들 이유 없지.괜히 데뷔해서 터져봐,여친이랑 이랬네 저랬네 과거에 어땠네.저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내가 정국이의 미래에 좋지 못한 존재로 남는 걸까.아,나는 왜 벌써 내가 미래에 정국이의 전여친으로 남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야,미친 전정국 넘어졌다!" "어디,어디 다친거 아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레 멍을 때리던 나는 그 아이들의 고성에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혼자 조용히 두눈을 열심히 굴리며 정국이를 찾아 해매었다.정국이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우리반의 자리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쪽으로 향해 걸었다.그대로 선수교체를 했고 정국이가 학교 건물 내부가 아닌 뒷편으로 홀로 걸음을 옮기는게 보였고 나는 급히 뒤를 따랐다.
"......" "하-,하.전정국!" "...왜 왔어." "양호실 안가고 어디가!" "안다쳤어." "여기 피 나잖아!" "...아니야,괜찮으니까 가봐.나 좀 쉬다가 들어갈게." "...무슨 일 있지." "무슨 일은 무슨 일.아무 것도 없어." "얼른 말해."
"하," 정국이는 안좋은 표정을 짓다 말고 내게 보인적 없는 평소와는 다른 웃음을 가볍게 지었다. "너 왜 말 안해줬어." "...뭘?"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가장 잘 알잖아,근데 왜!" "...너 직원 만났어?" "경기 들어가다가 마주쳤어,직원.어제 너한테 명함 주고 꼭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더라.근데 연락이 없어서 나 설득하러 왔데." "...미안해." "너,나 좋아하는 마음 없는거지."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독자님들ㅠㅁㅜ 이런 저런 겨울 준비를 하다 보니 업로드가 하루 늦어져버렸네요... 대신 다음주는 주말이 아닌 일주일 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꼬박꼬박 업로드하려합니다!!!그러니 봐주세요...엉엉엉... 학생분들 시험을 잘 마무리하셨나요!많은 분들이 이번주에 2학기 1차 지필 고사를 마무리하시고 뒤늦게 글을 읽어주신 것 같은데 좋은 결과 있길 함께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05화의 곡도 그렇지만 오늘 BGM은 05화 보다 더 제가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좋아하는 곡이니 꼭 꼭 꼭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인데...들어주실거죠...? (기타가 기본적으로 깔린 음악에 꿀보컬 두남녀의 잔잔한 듀엣을 참 좋아합니다 엉엉엉) 그럼 이만 어제 DMC 방송을 보고 심장이 아팠고 오늘 부로 컴백이 하루 남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바론은 뒤늦게 잠을 청하러 가보겠습니다 독자님들도 꿀잠하시길 바랍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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