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일이야
w. 체리상
(부제: 다정하게, 안녕히)
새 학기에 들어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불볕의 더위도 한 풀 꺾였고, 하늘은 더 파랗고 더 높았다. 또 한 번의 시작이었다. 9월의 시작이라 자리도 바꿨다.
새로 바뀐 짝지는 우리 학교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친구였는데 걱정과는 달리 무성한 소문만큼이나 재밌는 친구였다. 다들 경험해 봤겠지만, 교실에서의 자리란 로피탈의 정리만큼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를 제외한 앞뒤 대각선까지 내 짝지 무리였고, 나 역시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배정받은 자리를 보고 선생님과 그들을 제외한 반 친구들까지 안타까움의 눈빛을 보냈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너무 깊게 사귀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그냥 노는 걸 많이 좋아할 뿐이다. 좀 심하게.
권순영 역시 바뀐 자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공교롭게도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재미를 보고 있을 때 내가 권순영에게 느낀 감정은 권태였다.
연인 사이에는 애정의 그래프라는 게 있다. 같은 시기에 좋아해도 개인에 따라 그래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내가 권순영을 먼저 좋아했고 권순영은 연애에 있어 불같이 급하게 타오르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다를 만도 했다. 내가 그래프의 절정을 찍었을 때 권순영은 이제 시작이었다. 사랑은 끓고 있는 물과 마찬가지다.
끓는점을 넘기면 증발하기 마련이다.
예전과 같은 설렘은 이제 없다. 평생 이 두근거림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냥 음.. 그냥 그렇다. 같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아파트 다 부술 것 같던 권순영의 애교도 이젠 찡찡거림으로 느껴질 뿐이다. 잠을 줄여가며 하던 통화도 이제는 정적이 흐르기 일쑤였고 매일 피곤해, 잘래 라며 빨리 끊기 마련이었다. 데이트를 해도 할 말이 없었고 권순영을 앞에 두고도 핸드폰만 보는 일이 잦았다. 멘토링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끝내고 싶어 했고 권순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끌고 싶어 했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OOO 너 걔네랑 놀지마"
"내 친구들이야. 니가 뭔데 그렇게 말해"
대화에는 날이 섰고, 이렇게나 변했는데도 권순영은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놓으려 쉬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왔다. 또, 매일같이 예쁜 말을 해줬다. 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알려주신 시라며 읽자마자 내 생각이 났다며 포스트잇에 써 책상 유리 밑에 붙여놓고 갔다. 권순영이 나가자 얼른 포스트잇을 떼서 공책에 붙였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다. 권순영이 교실로 나를 찾아올 때에도 내 관심은 권순영이 아닌 친구들이었다.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는 권순영이 부담스러웠다.
"OO야"
"왜"
"예쁜아"
"아, 오글거리게 왜 그래"
왜긴, 예뻐서 그러지. 그래, 딱 이런 대화의 반복이었다. 권순영은 입으로만 웃었고, 변한건 나 혼자였다.
짝지 무리는 본성은 착했으나 행실은 착하지 않았는데, 일례로 흡연과 음주를 일삼았다. 권순영은 미성년자의 흡연과 음주를 극도로 싫어했다. 수학여행, 호기심에 한 잔쯤 마셔볼만했으나 나중에 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하는데 왜 벌써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몸 상하는 일 왜 스스로 자처하냐고 유스호스텔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권순영이었다. 그때는 나도 동의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사람이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거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시험공부는 뒷전이었고 매주 공원에서, 혹은 뚫리는데 가 있다며 짝지 무리가 알아온 술집에서 어울렸다. 자습시간에도 떠들기 바빴고,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짜릿함에 정신 차릴 줄 몰랐다. 권순영은 신경도 안 쓰였다. 나는 그때 철이 없었고 먼 미래를 볼 줄 몰랐다. 딱 열여덟 다운 방황이었고 딱 그 나이의 허세였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 그 날도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권순영에게는 짝지무리와 수행평가를 한다며 둘러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
권순영에게 전화가 왔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많은 연락이 와 있었고, 이번 전화는 진짜 받아야 했다.
"OOO 어디야"
"응 순영아~ 나 수행평가 하고 있지"
꼬인 혀를 들키지 않으려 한글자 한글자 집중했다.
"넌 수행평가를 거기서 하냐"
차갑디 차가운 말투였다.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저 앞에서 권순영이 나를 굳은채 응시하고 있었다.
권순영이 다가왔다.
"OOO. 내가 쟤네랑 어울리지 말랬지. 넌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 홍지수가 너 봤단다. 지나가면서. 네 짝지한테 물어봐.
혹시나 싶어서 오늘 너네 노는데 나도 가도 되냐고 물으니까 너도 있다면서 좋다고 가르쳐주더라.
눈 감아 주니까 내가 모르는 줄 알지. 놀 거면 좀 똑똑한 애들이랑 놀던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권순영이었다.
권순영이 가게로 들어가 내 짐들을 낚아채듯 들고 나와 늦었다며 집앞까지 데려다준단다.
여전히 착해 빠진 권순영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묘한 어색함이 흘렀고 아파트에 도착하자 권순영이 나를 보며 긴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OO야. 내가, 내가 널 어떡하면 좋을까. 내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너는...진짜 정이고 뭐고 다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이래도 좋은걸 보면 미쳤나보다."
용서해주는가 싶어 고양이 눈망울을 하고 올려다 보자 권순영은 차갑게 뒤로 돌아 등을 보인다.
사실 그 때도 정신 못 차렸었다. 그 날의 흥을 망친 권순영한테 짜증만 날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권순영은 아침 저녁으로 일어났어, 잘자 라는 카톡뿐이었고, 나 역시 더 이상의 답장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걱정보다는 짜증부터 났다. 이런사이는 딱 질색이었다. 뭔가 딱딱 떨어져야했다.
그날 새벽 권순영에게 전화가 왔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긴 침묵이 흐르고
"응, 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요즘 너 이상해 너도 알지?"
"응."
또 다시 정적이 흘렀고.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었다.
"OO야"
"나 좀 힘든데"
"빨리 예쁜 OO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코 끝에 새벽공기가 닿고,
"사람이라는게 참 마음대로 안된다 그치? 그래서 말인데"
담담하게 내뱉는 권순영의 목소리가 떨린다.
"우리 그만 만날까"
그만 만나자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권순영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내게 삼각함수보다 짜릿한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준 권순영을 처음봤던 축제, 급식소에서 몰래 훔쳐본 순영, 딸기우유 놔두러 몰래 찾아간 문과반,
그러다 들키고, 첫 멘토링 첫 카톡 첫 데이트 수학여행 체육대회 첫 통화 그리고 오늘.
"아니야 순영아, 아니야. 내가... 내가 다 미안해"
"그러면 우리 시간을 좀 갖자"
"서로의 소중함도 느끼고. 딱 한달만. 멘토링도 좀 미루고 한달만 그렇게 하자"
"이건 내가 내리는 벌이야."
"응? 한달만. 할 수 있지 OO야?"
다정하지만 단호한 권순영의 목소리에 알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카톡)
예쁜아
아프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나쁜짓 하지 말고
사랑해
끝까지 나만 생각하는 권순영이었다.
10월에 들어서자 다시 자리를 바꿨다. 짝지 무리와는 최대한 안 마주치려 노력했고, 그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권순영과 시간을 가지기로 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자 권순영과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환각과도 같은 쾌락에서 벗어나니 현실에 치였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껏 밀렸던 공부를 하려면 잠도 더 줄여야 했다. 커피를 갖다 놓고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고 공책을 폈는데 포스트잇이 떨어진다. 권순영이 예쁜 시라며 읽을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며, 꼭 내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써준 시였다.
북극으로
이정하
북극에 가면,
'희다' 라는 뜻의 단어가
열일곱 개나 있다고 한다
눈과 얼음을 뒤덮여
온통 흰 것 뿐인 세상
그대와 나 사이엔
'사랑한다' 라는 뜻의 단어가 몇 개나 있을까
북극에 가서 살면 좋겠다
날고기를 먹더라도
그대와 나, 둘만 살았으면 좋겠다
'희다' 와 '사랑한다' 만 있는
그런 꿈의 세상
권순영이 너무 보고 싶은 밤이었다.
사실 이 편을 쓰기 위해 이제껏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려 2주 전에 써놓은 글이에요ㅠㅠ
여주의 탈선과 지켜보는 순영
여러분 달달할줄 아셨죠? 헷
저 요새 감떨어졌나봐요
왜 쓰고 나니 별로죠ㅠㅜㅠㅠ
다음화는 더 열심히 준비 해 올게요❤
내 딸기우유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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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당분간 받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