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의 역사
01
w. 체리상
내 연애사의 8할은 김민규였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어려서부터 김민규한테 코 꿰인 거다. 중학교 1학년, 엄마가 골라주던 옷이 아닌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에 벌써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14살의 허세와 착각이었지만. 중학교 입학 첫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다. '아, 우리 반 비주얼은 나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제일 예뻤다. 중학생이 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남자친구도 사귀고, 학예회와는 다른 축제에 대한 기대와, 동아리 로맨스 정도? 남자친구는 개뿔. 우리 반 남자애들과는 인연이 아니구나 싶을 때, 김민규가 등장했다. 등장이라고 표현하니 웅장하게 나타난 것 같지만, 그냥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때 김민규의 아우라를 느꼈다. 심상치 않은 외모와 평균 이상의 신장. 그리고 김민규는 내 대각선 뒷자리가 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친해졌고, 어느새 '썸'이라는 것도 타고 있었다. 그래봤자 열넷의 풋사랑이었지만. 그러고 얼마 있다가 사귀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로맨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톡으로 -야 사귀자. 그래. 이게 끝이었다. 내 연애사의 오점이 되었고, 내 인생의 흑 역사였다. 김민규와는 꽤 잘 맞았던 것 같다. 열넷부터 열다섯 열여섯까지. 사실 열여덟까지 사귀긴 했다. 중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함께 한 거다. 2차 성징도 함께 했다. 입학할 때 통나무 같았던 내 몸에는 부드러운 라인이 생겼고, 김민규는 변성기를 겪고 180에 이르는 신장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집 근처의 여고에, 김민규는 집과 조금 떨어진 남학교에 배정받았다. 생각해보니 여기서부터 위기였던 것 같다. 각자의 학교 옆에는 바로 남학교와 여학교가 붙어있었다. 뭐, 새로운 애들 만나고 싶었겠지. 입학과 동시에 우리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겼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한 달쯤 있으니 김민규한테 먼저 연락이 왔다. 역시 나는 마성의 OO다. 그렇게 세 달을 사귀다가 또 헤어졌다. 하도 많이 헤어졌다 만나서 이유는 기억도 안 난다. 좀 슬펐던 기억은 난다. 너무 울어서 눈이 붕어가 되어 학교에 갔던 것도, 주변의 위로를 받은 것도.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온갖 청승은 다 떨었던 것도. 김민규와 함께했던 날들에 흑 역사가 너무 많아서 부끄럽다. 생각하기도 싫다. 육 개월 있다가 내가 먼저 연락했다. 아 씨발 왜 그랬지.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겠지만, 또 헤어졌다.이번엔 김민규가 청승을 떨었다. 미친새끼. 수학여행가서 술마시고 전화왔다. 수학여행갔으면 좀 늦게 마시던가. 이른 야자시간에 전화를 받았는데,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페북에 녹음본을 올리려다 말았다. 아직도 그 녹음 된 음성은 내 공기계에 있다. 그 후에 별 다른 일은 없었다. 반창회에 나가면 간간히 김민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고, 가끔 업데이트 되는 김민규의 SNS를 보기도 했지만 그 마저도 공부한다고 지워버렸다.
새내기가 되자 마자 미친 것처럼 과팅만 했다. 3년 동안 공부에 바친 내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사실 김민규의 8할을 줄여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주로 체대만 노렸다. 섹시하잖아. 오늘은 경영학과라고 해서 별로였는데, 진짜 별로였다.
"너 우리학교였냐"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이네 OOO"
"공부 열심히 했나봐. 우리학교 올 정도면"
내 말에 김민규가 씩 웃으며 답한다.
"죽을 뻔 했지. 나 안보고 싶었어?"
"아니. 전혀?"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지랄.
얼마 안 되는 다행 중에서 다행인 점은 오늘 화장이 꽤 잘 먹었다는 점,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나왔다는 점. 운동복 입고 학교를 거닐다가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김민규와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지만, 아련하고 예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무수한 흑역사를 남겼다. 또 원래 구 남친이라는 게 그런 존재 아니겠는가. 딱히 미련이 있는게 아니라면 '난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라는 걸 보여줘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존재. 나만 그런가.
주변에서 보기에도 김민규와 내 사이가 보통은 아니었나 보다. 동기들이 아는 사이였냐며 호들갑을 떨자, 이름 모를 경영학과 남자가 분위기를 정리했다.
랜덤 게임 랜덤 게임 OO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게임 스타트! 나를 시작으로 랜덤 게임, 술 게임과 부어라 마셔라가 시작되었다.
오늘 진짜 언니한테 욕을 먹는 한이 있었어도 펑크를 내야 했다. 아까 기숙사에서 나올 때부터 알아봤다. 갑자기 스타킹 올이 나가질 않나,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오다가 미쳐 씻기지 못한 비눗물을 밟아 뇌진탕 걸릴뻔했다. 끝이 아니다. 나오기 직전에 침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찍혀 그 어마어마한 통증에 한참 동안 발을 잡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늦을 것 같아서 힐을 신고 뛰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기분 좋게 나온(사실 좋지는 않았다.) 과팅에는 구남친이 앉아 있질 않나. 인생...
입시가 끝나고, 할 일이 없었던 우리반은 술게임이나 연습하자며 하루종일 랜덤게임만 했다. 오랜 연습으로 다진 결과, 고백점프나 홍삼게임 같은 건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안걸렸다. 문제는 손 쓸 수 없는, 그러니까 손병호 게임이나, 죽음의 게임, 아파트 이런 종류의 게임에는 쥐약이었다. 하늘이 내린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만 걸렸다. 술을 못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요구하는 원샷과 쏘오오오맥인지 쏘매애애액인지 어쨌든, 자꾸 말아주는 바람에 한모금 마시고 멈칫하자 김민규가 컵을 낚아채 흑기사를 자처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쏟아지고, 김민규는 빈 잔을 머리 위에 터는 시늉까지 했다.
새로운 인연은 개뿔.
술자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옆에 앉은 동기에게 카드를 쥐어 주곤, 먼저 나가서 술 깨고 있을게요~ 하고 나왔다. 계산은 알아서 하겠지 뭐. 찬바람을 쐬니 취기에 볼이 화끈거린다. 카운터에서 집어온 박하사탕을 까서 입에 넣자, 박하향이 입안에 돈다. 짤랑-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김민규 였다.
김민규도 바로 나왔나 보다. 핸드폰을 보면서 묻는다. 번호 안 바꿨네, 내 번호 가지고 있지? 하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곧 내 전화가 울렸다. 지운지 오래 ㅈㅅ... 번호만 뜬 내 핸드폰을 쓱 본 김민규가 저장하라고 나를 재촉한다. 김민규의 8할을 지우긴 커녕 늘리게 생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둘 다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동기들과 경영학과가 우르르 나왔다. 더 있어 봤자 뭐하겠는가. 과음했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간다고 하고 왔다.
기숙사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아, 화장 지우기 귀찮다. 누가 화장 지우는 기계 좀 만들어라. 술기운에 두뇌회전이 더뎌진 건지 멍청하게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장도 안지우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카톡! 하는 알림음이 울린다. 누구야. 인상을 쓰고 핸드폰을 들어 카톡창을 확인하니,
16 경영 김민규
-잘 들어갔어?
김민규였다.
내가 좀 마성의 캐릭터이긴 하다. 누구든지 내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지. 그런데 김민규는 도대체 내 어디 가 좋은 걸까... 김민규는 과팅 이후로 흑기사 핑계를 대며 연락을 이어왔다. 연락만 하면 말도 안 한다. 김민규는 나한테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마시고... 흑기사 두 번 부탁했다간 장기 하나 떼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둘 다 가난한 대학생 주제에... 다시 생각해보니까 부탁한 것도 아니었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김민규에게 이를 꽉 물고 물었다. "언제까지 얻어먹을 거니. 네가 생각해도 심하지 않니. 너네 아버지 S사 부장님 아니셨니"라고 또박또박 쏘아대자, 그럼 오늘은 내가 계산하지 뭐.라며 계산서를 들고 일어선다. 농락 당한 기분이다.
하여튼,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여러분 체리입니다!
글 섞이는 거 싫어한다고 저번에 말씀 드렸는데 이건 너무 쓰고 싶어서ㅠㅠ
많이 좋아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