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님들의 예쁜 댓글과 추천은 뿌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세븐틴/최승철] 단심가 - 300일 이벤트 with 꼬솜
w. 뿌존뿌존
아침부터 요란한 꿈을 꿨다. 난 난생 처음 보는 궁전에서 한 사내의 손을 잡고 뛰고 있었고, 그 뒤를 검은 무리들이 빠르게 쫒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사내의 입은 내게 그리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의 처소라고. 그럼 우린 안전해질거라고.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난 사내의 손을 놓쳐버렸고 긴 치마자락을 밟으며 고꾸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나버렸다. 넘어진 나를 보던 사내의 표정이 아직도 이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듯한 그런 표정.
착잡한 마음을 가득 안고 주섬주섬 와이셔츠를 입고 주섬주섬 조끼를 입었다. 급박했던 꿈 속의 상황과 제 손을 절대 놓지말라던 사내의 목소리와 따뜻했던 손 모두가 기억이 났지만 얼굴만은 도통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 기억이 난다면 좋을텐데. 얼굴이 기억이 나면, 그 사내와의 기억을 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난 이미 가방을 메고 학교로 걸어가는 중이었고, 그냥 뒤숭숭했던 꿈자리,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아침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옷깃을 더 단단히 여몄다.
쌀쌀한 날씨 탓에 목도리에 고개를 박고 빠르게 걸었다. 입김이 눈 앞을 가리고 미끄러운 빙판길에 휘청거렸지만 일단은 끔찍한 학교라도 어서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학교 안엔 히터가 틀어져있을거야. 히터 생각을 하자 언 몸이 녹는 듯한 기분에 더 빨리 걸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세봉아..! 세봉이 아니더냐..?"
".......예?"
"세봉아...! 아, 네가 왜 이 흉물스러운 곳에 있는 것이냐!"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내 어깨를 누군가가 잡아챘다. 그에 몸이 휘청, 하고 넘어질 뻔했지만 가끔 친구와 등굣길에 마주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뒤통수를 후려치리라, 다짐하며 뒤를 돌았다.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익숙한 친구의 얼굴이 아닌 웬 처음보는 사내가 한 명 서있었다. 게다가, 우리학교 교복을 입고 하늘색 명찰을 단. 하늘색 명찰이면 우리 학년인데, 왜 저런 말투를 쓰는걸까? 게다가 김세봉이라니, 언제적 이름이야. 사내를 이상한 눈으로 대충 흘기곤 누구세요? 라고 묻자 남자가 제 얼굴의 모든 구멍을 크게 벌리곤 제 손가락으로 저를 쿡쿡 찌르며 나? 나? 연신 묻는다.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말했겠어. 머리를 딩하고 울리는 것 같은 사내의 행동에 그냥 다시 한번 흘기곤 걸음을 재촉했다. 등교 시간까지 10여분 밖에 남지 않았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부는데 저 이상한 사내때문에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렸다. 사내가 뒤에서 세봉아! 라며 자꾸 이상한 이름을 불러댔지만 무시했다. 그저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오늘 시작이 이런거구나, 몸 사려야지. 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
수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영어 수행평가를 보면서도 온통 그 사내 생각 뿐이었다. 왜 날 그런 이름으로 부른건지, 우리 학년인 것 같던데 난 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건지.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박았다. 짝꿍이 샤프 뒤꽁무니로 내 팔을 가만히 찔러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런 작은 자극에 정신을 차리기엔 오늘 받은 자극이 내겐 너무나 컸다. 당연히, 그냥 뒤숭숭한 꿈자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너무나 큰 자극이었다.
"아니, 김세봉이라는 애는 1학년에 없다니까?"
"아니, 글쎄! 내가 오늘 봤어!!"
"아니 첫 날 부터 왜 행패야?"
점심시간. 정오를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한 날씨에 옷을 목 끝까지 올려입고 급식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 그 사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작은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그 사내를 본다하더라도 내가 뭘 할 수 있는 용기 같은건 애초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급식실의 찬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좌석에 그 사내가 앉아있었다. 갑자기 달아오르는 듯한 얼굴에 고개를 획 돌렸다. 어디 아프냐는 친구의 물음에 으응, 그냥 갑자기 좀 덥네. 라며 둘러댔다. 글쎄, 나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그런데 자꾸만 궁금해. 저 사내가 누군지 궁금하고 김세봉이 누군지 궁금해.
느릿느릿 수저를 꺼내고 느릿느릿 젓가락을 집었다. 찬 쇠의 촉감에 꽁꽁 싸맨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사내 쪽의 테이블이 부산스러운 소리를 낸다. 궁금해진다.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제 친구에게 아까 봤던 그 표정으로 묻던 사내가 맞잖아! 저기 있어! 라며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순식간에 내게 시선이 집중되어버렸다. 또 달아오르는 듯한 얼굴에 수저와 젓가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곤 얼굴을 짚었다. 친구가 아픈거 맞네! 라며 내 이마에 손을 짚어왔지만 친구의 뜨거운 손은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워, 너무 덥다. 사내가 식판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 쪽으로 걸어온다. 수저를 주우려던 내 손길이 옅게 떨렸다. 친구가 괜찮냐며 내 어깨를 짚었지만 뿌리쳤다. 사내가 점점 가까워진다. 부정하려고 하면 할 수록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고 온 몸은 점점 더 찬 공기를 원한다. 급식실을 박차고 나간다. 어디가! 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
"잠깐만 세봉아"
불덩이 처럼 달아올라 버린 몸을 식히기 위해 운동장을 정신없이 뛰었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는 이미 풀려 나풀댄지 오래였고,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도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그 사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무서웠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무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쉽게 지쳐버린 몸에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얼른 교실로 들어가서 엎드려 있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그렇지만 턱, 하고 붙잡힌 손은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사내가 날 붙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이거 왜 이러세요, 이상한 느낌에 손을 비틀어 빼내려고 하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더 꽉 붙잡아온다. 온몸을 휘감는 이상한 느낌에 사내의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안돼, 어디 가지 마. 이 손 놓지 마 세봉아. 아이가 엄마에게 떼쓰듯,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칭얼대고 있었다. 가지말라고, 이 손 놓지말라고. 저는 김세봉이 아니라 김세봉이에요. 또박또박, 내 이름을 얘기해주자 사내의 눈이 잠시 떨렸지만 그래, 하는 낮은 목소리가 귀를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그래, 이름이 바뀌었을거란거 정돈 예상했어. 놀랍진 않네"
남자가 손을 꽉 쥐며 말한다. 어느새 주위는 어둡게 변해버렸다. 게다가 내 옷차림도. 이게, 무, 무슨. 말을 더듬으며 남자에게 묻자 사내가 미소 짓는다. 찌르르르- 하며 우는 풀벌레의 울음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꿈 속 그 장소다. 내 앞의 이 사내도 꿈 속의 그 사내다. 사내가 다시 손을 꼭 쥔다. 한참 찾았어, 네 손을 놓치고, 네가 넘어지고. 남자의 목소리가 옅게 떨린다. 마치 내가 그랬듯이.
"널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여기로 와버린거야. 갑자기 내겐 부모가 생겼고, 학교라는 곳에 가야한다며 날 질책했어.
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그냥 부모가 하라는 대로 했어. 일단 난 내가 어디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
"근데 널 본거야. 그래서 네 손을 잡았어.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어느새 저 멀리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불긋불긋한 등의 빛과 타박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 꿈 속과 오버랩되는 지금의 상황. 난 이 사내의 손을 붙잡고 뛸거고, 곧 손을 놓칠거고, 넘어질거다. 그러면 관군들이 날 붙잡겠지. 뻔히 보이는 앞으로의 상황이 두려워져 고개를 가만히 젓자 사내가 또 씩 웃는다. 괜찮아, 괜찮아. 사내의 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안 놓으면 되니까.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사내가 내 손을 깍지 껴 힘주어 잡는다. 또 다시 달린다. 긴 한복 자락이 내 걸음을 방해하지 않게 잔뜩 말아올려 품에 쥐고 뛴다. 이젠 놓지 않을거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귓가에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눈물이 나는건 왜일까, 이유는 처소에 가 묻기로 했다. 아무래도, 난 이 사내를 사랑했던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