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러블리즈 - 인형
그와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곳.
그 곳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은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사이지만 우습게도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너무나 건전하게도.
집착의 끝
01
w. 목요일 밤
그는 독서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도서관에 갈 때마다 그는 사서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이었더라. 그거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책이 꽤나 두꺼웠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나 역시도 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강의시간이 모두 끝나면 나는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고 그는 늘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와 내가 서로 나누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나에게 별 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건네는 쪽은 내 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은 또 아니었다.
안녕히 계세요.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그 한 마디 뿐이었으니까.
"무슨 과에요?"
그러던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한 마디였다.
나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늘 책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영어영문학과요."
"거짓말."
"..."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담담했다.
내 목소리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말없이 들고 있던 책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실 거짓말이 맞았다.
"아닌데."
"그것도 거짓말."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내 말에 그는 푸스스 웃으며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내 간단한 정보들이 나와있었다. 내 학번이라던가 내 과라던가 그런 간단한 정보들.
아. 맞다.
그는 매일같이 내 학생증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무슨 과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바보였네.
"왜 거짓말 했어요?"
"그거까지 말해야 해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되고."
"..."
그건 이름씨 마음이니까.
그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는 내 이름을 내 나이를 그리고 내 과가 무슨 과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 생긴 승부욕인걸까.
원래 나는 승부욕은 커녕 물욕조차도 없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었다.
그정도로 승부에 집착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기면 이기고 지면 지는 것.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마음 편히 살자.
이것이 내 신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나는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출할게요."
"..."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비어있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빨리 바코드를 찍으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말없이 내가 내민 책과 학생증을 받아들었다.
삑. 나와 그 단 둘만 있는 도서관에 기계음이 울려퍼졌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대출 처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내고 말거야.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때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 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던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봤던 것을 보면 말이다.
-
"무슨 생각해?"
나에게 죽을 떠먹여주던 그가 물었다.
나는 입 안에 있는 죽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복죽이 담겨있는 그릇이 들려있었다.
내가 죽 먹고 싶다고 말을 했었던가. 직접 말을 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죽 중에서 전복죽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입맛이 없을 때는 대충 죽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것을.
"아무 생각도 안해요."
"거짓말."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목소리는 참 차분했다.
감정에 변화라도 있기는 한걸까.
나는 한참동안 오물거리던 전복죽을 꿀꺽 삼켰다. 고개를 숙여 죽그릇을 바라보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 거짓말하면 되게 티나는 거 알아?"
"아니요."
"지금은 진짜."
"..."
"그 때도 그랬잖아. 대놓고 나 거짓말해요. 라고 써있고."
"..."
선배.
응?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이 한 층 더 가까워졌다.
그는 그런 나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학생증 보고."
"그거만 가지고?"
"이름아."
"..."
"내가 모르는 게 어디있겠어."
나는 이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이렇게 둥그스름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 왜 그렇게 대답을 하냐고 물어보자 돌아오는 대답은
별로 너는 몰랐으면 하니까.
이 한 마디였지.
하긴... 내가 그 때 그의 이름과 과 나이 등등을 알아내기 위해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별로 유쾌한 장면은 아니니까.
"항상 이런 식."
"너도 좋잖아."
"아닌데."
"정말?"
그가 허리를 숙여 내 발목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내 발을 올렸다.
아직도 내 발목에는 쇠사슬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매달려있었다.
슬슬 발목이 족쇄로 인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내 발목을 쓸어내렸다.
"아프지?"
"네."
"풀어줄까?"
"풀어달라고 하면 풀어줄 거에요?"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봤대...
나는 작게 웅얼거리며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는 그런 내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내 발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따가 약 발라줄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감았다.
뭐... 어차피 풀어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내 발목에 족쇄가 있는 한 그는 절대로 내 옆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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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검은여우 요로시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