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그자리에 항상머물지만, 함부로 그 따스함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며 지독히도 외로웠던 저를 끌어안아 주지 않을까요?
바로, 희망병원 303호에서,
"부모님은.. 오늘도 진단서만 떼서는 그냥 가시더라.. 따님 얼굴 한번만 보고가래도, 나 원 참.."
"죄송해요..."
"니가 죄송할건 또 뭐야, 표정 펴고! 웃어야 나쁜 세포들이 달아나지!"
작고 습기찬 창 밖으로 비추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괜시 시큰시큰거리는 눈가를 무릎에 꾸욱 누른다.
바람에 팔랑이는 엄마의 손에 쥐인 흰 종이는, 아마도 제 병명이 빼곡히 적힌 진단서겠지, 죄없는 입술을 꾸욱 물곤 서러운 맘을 꼭꼭 숨겨 넣는다, 아무도 모르게.
"탄소야.. 간호사 하는 말들 너무 신경쓰지말고.. 그래, 우리 정국이나 좀 잘 부탁해. 녀석이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아주그냥 내 속이 썩어간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내 머리를 크고 듬직한 손으로 쓰담아 주는 의사선생님의 손길을 느끼며, 서러운 마음을 간신히 꾹 참아낸다.
몇개월째 진단서만 떼어내곤, 그 차디찬 뒷모습만 보이며 사라지는 부모님의 뒷모습만 보고 있는게, 이제는 조금 지치고 무서워도
우리 고마운 선생님 덕분에, 그래도 이만큼이나 버텼는 걸
-
"아줌마 그거라며? 나이롱 환자, 우리 아버지 돈 긁어먹는 재미가 쏠쏠하겠다 그치?"
'아줌마' 라고 불리기엔 23살이란 나이가 좀 적지않나, 아니 내가 병원에 있는 새에 아줌마라는 호칭의 범위가 바뀐건가 생각하며 머쓱하게 미소를 머금곤, 의사선생님이 부탁하신 아들래미를 내려다 보길 몇분, 이름이.. 그래 전정국이랬나?
"뭐 먹을거 없어요? 뭔놈의 병실이 이렇게 휑- 해"
간이침대를 꺼내 최대한 멀찍이 띄워놓곤 팔자좋게 누워 휴대폰게임을 하고있는 전정국이 눈에 비췄다.
어색한 손길로 서랍 속 깊숙이 간호사가 뺐어갈까 숨겨놓은 초코파이 두어개를 꺼내 들이밀며,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는 목소리가 불안불안하게 마냥 떨려왔다.
"교복.. 예쁘다 어느학ㄱ..."
"저기요 아줌마,
나 여기 아줌마랑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누자고 앉아있는거 아니에요. 응? 서로 조용히 할일하다가, 시간되면 그냥 '안녕~' 하고 가는 거에요,
내말알아듣죠?"
"아...응.."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보나 싶었는데, 역시나 글렀구나 싶어 괜한 손톱의 거스름을 뜯어내며 병원복의 패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래도, 병실에 내가아닌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게
어딘가 모르게,
간질간질 퍼석퍼석하게 외로움을 타던 마음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는 느낌이라 그게 또 싫지만은 않아, 혼자 헤실헤실 웃음을 펼친다.
-
"우욱.. 욱...."
앞전에 같은 병실을 쓰던 아주머니가, 출출할때마다 먹으라고 두고가신 작은 컵라면 몇개중 하나를 뜯어 먹은게 화근이었나.
괜찮던 속이 다시금 뒤집어지며 의미없는 토악질을 시작했다, 먹은 컵라면은 이미 다 게워낸 듯 한데 자꾸만 헛구역질이 올라 괴로웠다.
"그러게, 자극적인 음식 그렇게 먹지 말래도 말을 안듣지, 하긴 니 식도가 헐든 녹아없어지든 내 알빠는 아니다만."
화장실 구석 변기에 지쳐 기댄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내뱉는 간호사 언니의 말이 오늘따라 가시가 돋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미움받는 기분.
나도, 남들사는대로 남들 먹는대로 똑같이, 그렇게 평범하게만 살고싶은데
평범함이란게 가장 큰 욕심이란걸 매일, 매 순간 깨닫게된다.
-
하루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뽑자면, 정국이가 학교를 마치고 휑한 나의 병실로 들어서는 그 찰나의 순간,
그냥, 별다른 대화가 오가는것도 아니지만, 그냥 교복을 입은 여느 또래와 다름없는 정국이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순간만으로도 가슴이 자꾸만 벅차서,
'내가 딱 저 나이때,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갔더라면.....' 하는 실없는 상상에 빠져 한없이 기쁜 순간.
"가만보면 교복 되게 좋아해, 아줌마 교복 페티쉬있어?"
가만가만 정국의 교복을 찬찬히 뜯어보던 내 눈빛을 눈치챘는지, 놀리듯 비아냥대는 말에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는게 느껴졌다. 부끄러운 맘에 습관처럼 애매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오늘따라 더욱 애처로웠다.
"아니, 어...그냥, 잘어울려서.."
"그래도 아줌마, 그렇게 몰래 훔쳐보면서 웃지마요. 기분 좆같으니까."
귀를 의심하게 되는 날카론 말투에 조심스레 시선을 거두곤 또 애매한 웃음, 정국이가 봤다면 또 기분이 나빴겠지 싶어 빠르게 입꼬리를 내렸다.
이렇게라도,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외로움이 가시는데,
제 어줍잖은 태도 하나때문에, 다시는 안오면 어떡하지, 전전긍긍 하는태도가 자꾸만 몸으로 표현되었다.
시끄러운 게임소리만이 병실안을 가득 채우듯 퍼지고, 손목에 달린 환자태그를 괜히 못살게 굴다 나른하게 퍼지는 약기운에 무거운 눈커풀을 내려감았다.
일어나면 병실안엔 또 혼자남게 되려나, 병실을 나설 정국이에게 인사라도 해주고싶은데
꿈벅이는 눈커풀이 야속했다, 병실밖으론 어둠이 천천히 노을을 삼키며 밤을 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