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말짱해지는 정신에 결국 잠에 드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당장 몸져누워도 이상하지 않으리만치 피곤한데, 눈을 감을 때 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두 사람에 저도 모르게 애써 감았던 눈을 뜨는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여자의 등장 이후로, 생명체의 존재를 실감한 이후로 비어버린 가슴에 조금씩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주 속을 헤엄치고 있는 생명체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면, 자칫하면 그와 나의 비밀스런 관계 또한 세상 밖으로 나올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사 제목과 우리 둘의 사진, 누군가의 실루엣. 연예인에게 들이미는 잣대가 심한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내가 말짱히 누군가의 동정을 얻기나 할까. 전혀. 후에 나는 대기업 자제의 연인 노릇하며 돈 떼어간 년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히겠지. 이름도 모를 누군가들의 손가락질을 받겠지.
여자의 처연했던 표정이 떠올랐다. 짙은 눈동자 안에서 그녀는 애처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21세기에 홍길동도 아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될 상황에 놓인 제 자식을 얼마나 가엽게 여길지. 애초에 끝이 정해져있는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여자의 아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을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막연함이 앞섰다. 이제 막 그를 좋아하게 된 나는, 곧 다가올 광활한 비애를 감당해낼수나 있을까.
그는 내 앞에서 그의 실제 연인을 ‘사업 건으로 만난 여자’라고 칭했다. 사업 건으로 만난 여자와의 관계. 그에게 립스틱을 쥐어줬던 여자는 사실 그의 연인이었고, 그는 그러한 사실을 내게 꼭꼭 숨겨왔다. 언젠가 둘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밝혀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차라리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제 멋대로 부풀려진 애틋한 감정이지만서도, 그에게 들켜버리어 그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는 것보단 저 혼자서 가슴 앓이 하는 편이 더 나았으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9개월. 그의 2세가 세상으로 나오기 까지의 시간, 혹은 이 드라마의 완결까지 남은 골든 타임. 그 말인 즉슨, 반 년 넘게 남은 그 기간동안 우리는 다시 또 유연하게 연기를 할 의무가 생겼다. 관심이 서서히 사라지며,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그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사진에 찍혀야할 역할이 생긴 것이다. 그는 그저 평소대로 날 바라보면 되는 간단하면서도 사소한 일이었으나 정작 나는 그러지 못하는 게 골칫거리였다. 나는 아직도, 내게 모진 말을 그를 보면서도 가슴 설레여하는데.
…그래. 잊어서는 안되었다. 나는 배우였으니까. 컨트롤 되지 않는 제 감정을 억눌러가며 연기를 하는 것이 제 재주껏 할 수 있는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중을 속이며 촬영하는 이 드라마의 완결까지 제게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 감정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첫째. 그를 열렬히 사모하던 감정을 서서히 죽여나는 것.
둘째. 애써 그를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것.
마지막, 그의 결혼과 2세의 탄생을 멀리서나마 응원해주는 것.
그리고, 태형과 찍은 영화가 개봉한다면. 또한 그의 결혼이 성공적으로 치뤄진다면. 저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잠시 접을 생각이었다.
*
쇼윈도 드라마 09 :: 감정선의 터닝포인트
깊이 아래로
엄마, 엄마. 끝내 뒷모습을 보인 고운 여인에게 소리쳐 울부짖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양 손 가득 짐을 싸들고, 궁전같이 커다란 저택에서 부리나케 도망쳐나가는 여인. 자줏빛 원피스. 흰 피부에 이질적이도록 고독함을 담은 색이었다. 어린 정국은 때때로 자주색 원피스를 입은 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렇게나 좋아라했다. 차창 너머로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멀어져만가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의 자줏빛 원피스를 보며 정국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열두살, 정국의 하굣길이었다.
하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마다 항상 꾸던 악몽이었다. 어찌된 게 이십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서우리만치 똑같은 꿈만 꾸는지. 이 악몽의 후유증으로 인해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이젠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어머니가 떠나던 날,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저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사라졌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던 흉터라면 흉터였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어머니를 태우고 닿을 수 없는 어딘 가에 데려다주었던 기사의 발에 매달려 엄마를 데려와달라며 생떼를 피우며 울었지만, 돌아온 것은 한 장의 편지지뿐이었다. 어머니의 글씨. 도망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무색할만큼 차분한 말투. 어릴 적의 나는 그 편지를 보며 무너져내렸다.
나는 단순히 제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비천적이라 여겨 도망을 친 줄 알았다. ‘나를 낳고, 제 여동생을 낳은 것은 어머니 자신이면서. 왜 우리를 두고 갔어요.’ 라며 이미 사라진 그녀를 속으로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녀가 선택한 최후의 도망이 어찌하여 최선의 선택이 되었는 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비웃음, 조롱, 폭언.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이유없는 비난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힘들어할 때마다 제 손을 꼭 잡아왔지만, 애석하게도 장남은 어머니의 슬픔 하나 조차 인지하지 못 할만큼 어리고, 또 어렸다. 아주 어렸을 적, 얼굴이 푹 젖을 만큼 울며 저를 안던 저의 어머니의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최대의 불효라 여겼다.
그녀가 택한 것은 도망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도망이 아닌 피신이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비난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최선책.
‘너는 가업을 이끌어갈 장남이란다. 엄마가 없는 그 곳에서, 더욱 성숙한 아들이 되길 기도할테니 부디 슬퍼하지마렴. 아버지와, 정혜의 곁에서 더욱 단단해지기를 엄마가 바란다.’
그녀는 가업을 이끌어갈 제 아들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 홀로 떠나는 것을 택했다. 가족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지금은… 행방조차 알 수 없다.
어머니를 찾지 않으려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친가에서 막기도 했다. ‘합의 하 이혼’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에, K그룹의 장남이 제 어머니를 찾고 있다더라. 하는 찌라시가 나돌기 시작하면 언론사든 어디든 제 기업을 뒷조사 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친가들은 사라진 어미에게 애착을 가진 저를 보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라진 어머니를 찾으려는 저를 저지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어머니를 닮아가서는 회사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폭언과 조롱을 일삼으며.
정혜는 티는 안 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듯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정혜에게 어딘지 모르게 미안함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급격히 무뚝뚝 해진 탓에 정혜에게 괜찮냐는 말 하나 건네지 못하는 오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아는 아버지가, 정혜에게 ##이여주를 소개시켜준 것이고. 내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외로움의 빈칸을 그녀가 채워주고 있다는 것에 처음은 안도함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없이 스캔들에 연루되어 온 나로써는 그녀와의 공개연애가 탐탁치 않아 그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미워할 방향은 그녀가 아닌 제 가족들인데도 불구하고. 망나니 같은 모습을 보이면 친가는 또 근거없는 비난을 늘어놓기 바빴다. ‘네 어미를 닮아서 너가ㅡ.’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는 했지만, 보여지는 이미지가 최우선인 저희 가족에게 그 말은 사치와도 같았다. 부, 명예. 이 둘 중 어느 하나 가지지 못한 제 어머니를 욕하는 친가들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질 못했다. 왜냐, 그의 위치 또한 부와 명예에 굴복해야만 하는 자리였으니까. 아버지를 책망하는 저 또한,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받아야하는 힘없는 장남일 뿐이었느까.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핑계라면 핑계였다. 우리는 같은 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있지만서도, 서로를 경계하고 물어뜯기에 전념하여 애정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구석이 없던 것이고. 한 번 삐끗하면 영영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에 이어, 모든 비난의 화살이 제게 돌아오게 되어있는 상속자의 위치.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위치에서 태어나‘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2세가 생겼다니.
*
“아비 말은 말로도 듣지를 않는구나.”
“…죄송합니다.”
“그렇게 품위를 지키라고 말을 했건만은.”
“….”
“ 몇 번이고 말해야 알아들을 거냐. 자기 본능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자식이 무슨 기업을 물려받겠다고.”
사랑마저 외면하고 부와 명예에 굴복한 아버지 당신이 무슨 이유로 저에게 훈계를 하는건지.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
“친가에 퍼지기 전에 알아서 잘 조율하도록 해라. 나가 봐.”
제가 서있는 쪽 조차 쳐다보지도 않던 아버지는 그저 손짓으로 저를 내보냈다. 꾸벅, 예의상 고개를 숙이며 문을 나서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터지는 한숨에 문 앞에서 기다리던 비서가 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고상한 아버지는 언제나 항상, 체면 구기는 것에 탐탁치않아 하셨다. 떠나버린 어머니를 찾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았던 것도, 비밀을 유지하며 ##이여주와 저를 공개연인으로 내세운 것 모두 차세대 회장을 맡을 아버지 자신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국내를 좌지우지하는 기업 대표의 체통. 그게 다였다. 부와 명예,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쯤이야.
제 모든 인연 또한 한낱 지폐로 맺어진 협력의 대상일 뿐. 친밀과 경계의 기준은 모두 지폐 장 수가 결정하는 지극히도 자본주의적인 생일 뿐인데, 연인이라고 어떠한들. 동물의 왕국에서의 결혼은 협력의 또다른 일컫음이었다. 축적된 자본만 있으면 사랑하는 아내가 생기고, 2세가 생기는 불공정하면서도 불가피한 법칙.
진정성있는 사랑은 돈으로 얻을 수 없겠지만, 명예와 부에 굴복한 내가 무슨 사랑은. 오만한 생각일 뿐이었다.
*
“오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어, 제가 그랬어요? 딱히 그래보이려고 한 건 아닌데…. 자신없이 얼버무리는 말에 김태형이 그새 뚱한 표정으로 날 지켜본다. 이거 봐. 밥도 깨작깨작 먹고. 턱짓으로 제 앞에 놓인 밥그릇을 가리키다 콧소리로 불만을 표하며 입을 꾹 다물어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취한다. 어제 혼자 술 깠어요?
“예?”
“아니 그냥, 여주씨 뚱할 때마다 집에서 혼자 술 까는 버릇 있잖아요. 나한테 술꼬장 부리고.”
“…그 얘기는 좀 접어둬요. 들을 때마다 창피해죽을 것 같으니까.”
“전혀 창피해하는 얼굴이 아닌데? 아무튼, 왜 그래요. 또 적응 안되게.”
그냥. 조금 심란해서 그래요. 계절타서 그런가보죠. 말없이 저를 쳐다보기만하던 김태형이 내 말 한마디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김태형은 유독 내 낯빛에 예민하게 굴었는데, 그것이 자기 사람들을 챙기는 그의 방식의 하나인 듯 했다. 이러한 그의 방식에 처음에야 당연히 적응이 안되어 되도않는 거짓말을 친다거나, 저도 모르게 그에게 상처주는 일이 몇 번이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진실하지 못함은 예의도 아닐 뿐더러, 상대가 김태형이라면야 그러할 마음 조차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만큼 김태형은 대인관계에 있어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확확 바뀌는 내 낯빛에 특유의 분위기를 달리하고, 말투를 달리해 내 상태를 살피는 것을 보면. 그렇기에 내가 감춰야할 비밀을 이미 알아버린 그에게 더 이상 무엇인가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니까.
“태형씨. 그럼 오늘 같이 술 깔래요?”
.
.
.
촬영이 끝나고 두 남녀 주인공이 갖는 술자리란. 연예인이라고 또 그새 분위기 좋은 술집을 찾아 날 데려와 준 김태형의 배려에 감동, 또 자신의 SNS에 미리 예고하듯 저와 사진을 찍어올려 친구임을 알렸기에 괜히 의심을 살 이유도 줄어들었다. 룸형으로 되어있는 가게 덕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었고. 가볍게 제안한 나의 말에도 하나 하나 세심하게 신경써주는 김태형의 모습에 2차 감동. 역시, 김태형이 연예계에서 추대받는 것에는 다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룸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테이블에 속속히 올려지는 갖은 양주와 안주에 괜히 또 부담스러워지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를 꼬드겼던 건 나인데, 어째 김태형이 더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어주려고 하는 게 다 보이니까. 나는 그냥 포장마차같이 누추한 곳에서 소주나 마시자는 이야기였는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태형에게 괜히 민망함을 내비치자 그에 답하듯 또 샐죽 샐죽 웃는다.
“나는 이렇게 고급진 곳에서 마시자고 한 거 아니였는데….”
“에이, 우리 술친구 된 기념으로 거하게 마셔야죠.”
“그래도….”
“다 내 성의니까 봐줘요. 다음엔 여주씨가 사주면 되지.”
…뭐, 알겠어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생글 생글 웃는 김태형에 내심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은 무게를 비워가는 것 같다. 룸을 오갔던 직원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것에 맞춰 짧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문이 닫히고, 순간의 정적이 둘을 감싸 분위기를 형성했다. 노랗지만 밝은 빛이 김태형과 내 두 얼굴을 환히 비추고, 우리는 그렇게 애매하고도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입을 트여갔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못하는 순간.
“근데, 임신을 하게 되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분 애인 께서요?”
“네. 이제 막 4주차라고 ….”
알코올은 생각보다 큰 대담함을 전해다준다. 내가 술을 진창 마시고 김태형에게 꼬장을 부렸던 것도, 지금 제가 놓인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내뱉는 것도 그 대담함이 낳은 결과였다. 응어리져 제 가슴을 짓눌렀던 마음의 무게는 알코올 섭취 몇 번에 김태형과 무게를 나눠갖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 구나. 작게 탄식하며 벌어진 입술에 눈동자는 갈피를 못 잡고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밝혀졌던 첫 비밀에 비해, 자의로 들춰내는 두번째 비밀에 순간의 아찔함을 느꼈다. 비밀은 신비성이 사라진 순간 더 이상 비밀이 될 수가 없다. 하나의 사실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과도 같은데, 온전히 그와 나, 또 누군가와 연루된 두 번째 비밀을 내 자의로 밝힌다는 것은 어릴 적 친구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해주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정국씨말고, 사장님께 따로 말씀 드리려구요.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 분한테는 말씀 안 드리려는 이유가 있어요?”
“따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저번에도 한 번 말씀 드렸는데, 단칼에 거절을 하셔서.”
거절을 했다구요? 그렇게, 마음 고생을 시켜놓고? 꼿꼿했던 균형을 잃어가는 눈썹에 대충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할 말이 더욱 없었다. 이유는 저도 몰라요, 그냥 싫다고 하셨던 게 끝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잔에 담긴 알코올을 입에다 한 번 더 털어넣었다. 저도 답답해요. 나한테 왜 그러는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아니,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직접 나를 밀어낼 기회를 줬는데도 날 밀어내지 않았던 건지.”
“….”
“그리도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으면서 왜….”
“….”
“이제 유부남이 될 사람이라 내가 사라져야 되니까, 빨리 헤어져야하는 게 맞는건데.”
“….”
“그 사람이 거절했던 것을 핑계로, 자꾸만 미루고 싶어요. 언젠가는 끝나야할 관계이라해도….”
*
연예계는 추악하다. 추악한 곳에 신성한 것 하나 있어봤자 얼마안가 그 마저도 추악해지기 쉬운게 연예계였고, 저는 그 연예계에 몸 담고 있는 추악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끝없는 스폰, 남녀 무관한 늙은 배우들의 더러운 접대. 그 추악한 것을 보며 자란 저에게 깨끗한 순결함이 남아있을리가. 남들이 알고 있는 천사같은 성격 조차 그렇게 온순하지도 못 했다. 치기를 가득담고 욕심을 부풀린 채로 연기에 몰입했어야하는 제게 주어진 삶에서 온순함은 그리 필요한 미덕이 되지 못 했던게 그 이유였다. 어느 인터넷 소설 남자 주인공처럼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철없는 욕심이 아니었다. 제게 있어 욕심은 연기에 대한 사명감과 비스무리 한 것이었다. 좋은 배역은 다 제가 해야했고, 내 연기력이 인정받을 만큼 욕심을 갖고 연습해야했고. 긍정적으로 작용할 자리가 큰 욕심이었다. 욕심이 컸던만큼 포기한 것도 많았던 삶이다. 아역배우라는 이미지 때문에, 학교 하나 제대로 다녀보지 못하고 제 또래들이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울 시간에 저는 촬영장에서 대본을 외웠다. 저에게 예쁘다며 머리를 쓰담던 감독도, 늙은 배우들도 하나같이 검고 더러웠다. 그들을 보며 자란 내가 결코 순수할 수 있을까.
연예계의 추악함에 혀를 내두르던 사람들과 어찌저찌 뜻이 맞아 친목을 했던 것이 퍼져 사람들은 저를 인성이 좋다며 추대해줬다. 인성까지 겸비된 배우, 김태형. 제게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은 저 자신을 채찍질하게, 제 자신을 저만의 CCTV 안에 가두게까지 했다. 그만큼 남을 의식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미지로 높여진 저의 이름값이 어리석은 행동 하나로 물거품이 되게 하긴 싫었다. 그래서 더 밝게 웃고, 더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결코 난 그리 천사같은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순결하며 순진한 사람은 내 앞에서 종알대는 이 여자가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지금같은 시대에 쇼윈도 커플로 보여지면서도 자괴감을 갖는 사람이 있구나. 티비를 틀면 어디에서나 나오는 쇼윈도 커플들 중 그녀도 하나일텐데 왜 저렇게까지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감정만큼은 쇼윈도가 아니거든. 근데, 상대는 완전한 쇼윈도거든.
제게 자신이 쇼윈도 커플이라고 말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이여주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코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눈빛을 수차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얻게 된 능력 중 하나였는데, 지금과 같이 생각보다 유용하게 쓰이는 곳이 많았다. 눈은 마음의 거울. 그녀의 눈은 한치의 거짓없이, 오롯이, 제 감정을 거울처럼 깨끗히 담아냈다. 영롱한 이여주의 눈은 그녀의 순수함의 지표를 찾아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영롱함을 담은 눈을 서서히 탐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른 이에게 품은 감정을 잘 알고 있다. 애정의 화살이 설령 나에게 온다고 해도, 제게 도달하기 까지의 시간은 내 예상보다 훨씬 길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모든 연인이 그러한 확률을 따져가며 연애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거늘. 또한, 전정국의 2세가 태어남과 동시에 저 자신을 우주 끝까지 깊은 곳으로 몰아갈 이여주를 알기 때문에 나는 끓는 점에 도달하려하는 제 감정을 숨길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했다.
“…태형씨. 제가, 먼저 이 관계를 끊는 게 답이겠죠?”
추악함에서 자라난 꽃이 아무리 아리따워보여도 추악함이 배경이었던 곳이다. 언젠가는 검게 시들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 가슴 아프지만 현실로 돌아가야하잖아요.”
다른 이들이 아는 만큼 순수하며 순결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자라고 내가 눈을 감을 곳은 영원히 추악할테니.
열분,, 안뇽..^^ (숙연)
마지막글이 자그마치.. 3개월전.. 광복절에 올렸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눼.. 수능 끝나면 오겠다고 했지만 그 전에 써돈 것도 다 지우고 다시 써서 많이 늦었어요..
대학이요? 합격했습니다! 생고생해가면서 노력했던 대학들은 다 떨어졌지만 그래도 만족해요.
수능도 잘 봤구요, 이제야 마음의 짐이 사라지는 느낌? 독자님들이 다 응원해줘서 그런 거예요!
저와 같이 수능 치르신 분들은 다 후회없이 잘 보고 오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오늘은 세명의 이야기를 각각 다른 관점으로 풀어쓰는데에 노력했어요. 그래서 조금 더 오래걸렸던 것일지도 몰라요.
오래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기억해주시고, 지금까지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더 풀 이야기들이 더 많아요. 벌써 차기작도 생각하고 있는 중이고, 그게 꼭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편도 봐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모두 감사드려요! 이제 연중만큼은 아니지만 이야기 구상하고, 좋은 문체를 연구하느라 또 많이 늦을지도 몰라요.
그 점 미리 양해드려요.. 제 자신에게 조금 더 부끄럽지 않은 글이 되려 노력하는 과정이니까!
항상 기다려달란 말만해서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지만, 제가 더 완벽한 글을 쓸 때까지 우리 함께 천천히 달립시다!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내 사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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