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세도 불안한 이 와중에 기약 없는 여행이라니, 볼만하네."
"여행이냐?"
"여행이다."
사람 좋게 웃는 박경을 한 번 흘기다가, '자세 좀 낮춰 주세요'하고 말하는 키 작은 여자 때문에 허리를 숙였다. 여자는 한참이나 내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인이어를 체크한 뒤에야 떨어졌다. 괜히 근질근질한 귀를 긁다가 다시 쪼르르 달려오는 여자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여자는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혹시 풀린 곳이 없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고, 박경은 신문만 보고 있을 뿐이다.
"이거 봐. 부산에서 폭동 일어났대."
"뭐? 왜."
"부산을 선진 도시로 만들기 위한 투자를 명목으로 걷기 시작한 세금이 너무 비싸지자 부산 시민들이 일어나셨댄다."
"뭔 놈의 선진 도시."
"제 2의 서울을 꿈꾸나 보지. 다들 대한민국의 근심거리가 해결됐다고 좋아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저 지랄들인지."
"그러다 한 번 훅가서 땅 버려야 정신 차리지. 아니, 그 전에 죽을라나."
"근데 다른 지역들도 심상치 않다 이거야."
여자가 내게서 떨어져 박경에게로 갔다. 여자의 손이 부담스럽던 나와는 달리 박경은 덤덤히 손길을 받아냈다. 하나로 묶은 머리에 똥똥한 몸. 하얀 얼굴이 굉장히 앳되었다.
"몇 살이에요."
"저요? 스물 둘이에요."
고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여자는 본디 사교적인 성격인건지 아니면 그냥 나대는 건지 묻지도 않은 말을 신나서 내뱉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조기졸업하고 들어왔어요. 아, 물론 뭐 엄청난 천재들처럼 초등학교 때 조기졸업, 그런 건 아니고. 이 년 먼저 했어요. 지금은 머리가 안 돌아가서 잔심부름이나 맡고 있는 신세인지라 저도 제가 과연 어떻게 조기졸업을 한 건지 궁금해요. 어릴 때 삼촌이 연구소 직원이셔서 한국H연구소에서 지낸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한국H연구소?"
"네. 전 원래 부산 사는데 공부도 해야하고 해서 아버지께서 삼촌 계신 연구소로 보냈거든요. 그 연구소 안이 워낙 잘되있고 하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거기서 이것저것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가 서울 사태 있을 시기에 삼촌이 집 내려가래서 부산 내려왔는데 사태가 나서 그 뒤로는 그냥 부산에서 살았어요."
"그럼 삼촌은?"
"아마, 돌아가셨겠죠."
갑자기 조용해지는 분위기. 박경이 '어, 음. 미안'하고 어색하게 말하고 여자는 살폿 웃으며 '괜찮아요'하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허리 안 쪽의 끈을 조이고 지퍼를 올린 여자가 박경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삼촌이랑은 그 날부터 연락이 두절 됐고...그래도 삼촌이 그 날 절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보내신 거 보면 뭔가 알고 계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릴 땐 이거 말하면 큰일날까봐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이젠 말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삼촌이 갑자기 널 보내신 이유가 뭔데?"
"저도 몰라요. 그냥 갑자기 저보고 내려가라고 하시더라고요...두 분하고 이태일 박사님, 그리고 그 우지호? 맞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특히 이태일 박사님. 정말 존경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분 다 무사히 탐사 성공하고 오시길 바랄게요."
맑게 웃는 여자의 볼이 생기있게 물들어있다. 어릴 때 한국H연구소에서 지냈다라. 그 때, 여자의 통통하니 동그란 얼굴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허리를 꾸벅, 그리고 돌아서서 가려는 여자를 불렀다.
"너, 이름이 뭐야?"
"저요?"
"어."
여자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풋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우미래에요. 우미래. 화이팅을 외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여자. 박경이 관심 있어? 왜 그런 걸 물어보는데?하고 장난스레 묻지만 난 고개를 젓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 씨라 이거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눈을 감았다. 그럼 진짠가. 옆에서 박경이 쫑알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엔 온통 히든 사이트에서 본 내용 뿐이었다.
"그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31일동안 동굴 안, 불순물의 위협이 사라지는 곳에서 베이스 캠프를 세우고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 다시 만나죠. 고맙습니다.]
이태일이 씨익 웃으며 군인과 악수를 했다. 뒤에서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쁜 군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먼저 동굴로 들어가기로 했다. 갑갑한 활동복 안으로 가쁜 숨이 들어차고, 박경이 수시로 불순물의 농도를 확인했다. 입구는 완만한 경사였지만 여기저기 제멋대로 튀어나와 있어 꽤 힘겹게 내려가고 있던 그 때였다.
[수치 0.]
박경의 목소리와 동시에 모두 멈춰섰다. 이태일이 가쁘게 숨을 내쉬는 소리만 흘러나오고, 박경이 묵묵히 손에 들고 있던 장대를 바닥에 꽂았다. 장대 끝에 달린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한다. 우지호가 조금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박경이 장대가 고정된 걸 확인한 후에야 등을 돌렸다.
[혹시 모르니까 활동복은 좀 더 들어가서 벗기로 하죠.]
[그래.]
천천히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그 위치에서 10분정도 더 걷고, 박경은 탐지기가 계속 0을 나타낸다며 활동복을 벗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갑갑했던 활동복을 벗고 '후아'하고 숨을 들이켰다. 조금은 습하지만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랜턴이 아니면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옆에 떠있는 빛들이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려주는 듯 해서 괜히 안심이 되었다.
"됐어,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탐사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아요."
"어, 낭떠러지다."
먼저 앞장서서 걷고 있던 박경이 멈춰서서 우릴 막았다. 어깨 너머로 힐끔 앞을 보니, 캄캄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오고 보니 앞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보기보다 안 높을 수도 있어. 동굴이야 어두워서 뭐가 되건 안 보이니까. 야, 자일 꺼내 봐."
박경의 말을 듣자마자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암벽용 자일을 꺼냈다. 랜턴을 자일로 묶은 후 아래로 천천히 내려보내기 시작한 박경. 뒤에서 박경의 어깨를 나와 이태일이 붙잡고 있고, 얼마나 지났을까 랜턴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왔다.
"얼마나 높아?"
"이정도면, 한 20미터 정도 될 것 같은데."
"박사님, 괜찮겠어요?"
이태일의 얼굴이 빛 때문에 하얗게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태일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경. 자일을 근처에 솟은 석순에 한 번 감고, 자기 몸에도 돌려 감은 뒤 '잘 보고 따라해', 그리고는 휙, 아래로 사라진다.
급경사임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줄을 조금씩 움직여가며 차근차근 내려가고 있는 박경. 랜턴을 모두 모아 길을 비춰주니 제법 잘 내려간다. 한참 후, 줄을 툭툭 당기며 '내려오세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한숨을 내쉬며 몸에 줄을 감았다. 우지호와 이태일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나는 '둘 다 잘해요'하고 내뱉은 뒤 천천히움직였다.
아, 뭐야. 생각보다 무섭잖아, 이거. 줄을 꽉 잡은 손이 조금 떨려온다. 어둡고, 높고, 발은 자꾸 이상한 곳을 딛는다. 이를 악물고 천천히 줄을 움직이며 겨우 내려가고 보니 박경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이제 내려오냐?"
"시끄러."
"네에네에. 다음, 우지호!"
우지호와 이태일이 내려올 때까지, 나는 간단한 체조를 하며 갑자기 넓어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겁나 높네, 목 부러지겠다. 건물로 치면 30층높이 정도는 될 듯한 공간이 나왔다. 이런 동굴이 생성되려면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이 걸릴텐데, X구역이 생성된 후에야 생겼을 이 동굴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역시 X구역에는 수수께끼가 너무도 많다. 그리고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
X구역의 중앙에는 무엇이 있나.
조용히 저 멀리의 거대한 석주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낯선 공간에서 약간의 기시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쿵! 이태일이 중간에 줄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거의 다 내려온 후에 놓친지라 큰 상처는 없었지만, 다리를 싸매고 있는 이태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박경이 급히 달려가 이태일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파요?"
"모르겠어, 방금 아팠어."
"신경이 살아있나? 지금까지 다리가 아픈 적은 없었잖아요. 움직일 수 있어요?"
힘겹게 일어나는 이태일의 얼굴이 땀범벅이다. 박경이 연신 괜찮냐고 묻고, 이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목을 두어번 돌렸다. 우지호는 묘한 눈으로 동굴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 엄청 큰데."
"이례적인 크기의 동굴이네."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요?"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이태일과 박경. 뭐가?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그, 뭔가 좀 낯익지 않아요, 여기?"
"낯익다고?"
"이 동굴 자체가 낯익은 건 아닌데요. 뭔가 느낌이 있어요. 되게 낯익은 느낌이."
기시감이 든다. 이태일이 저거 또 헛소리하네,하고 비웃으며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고 박경도 쯧쯧 혀를 찬 뒤 앞으로 걸어간다. 우지호가 재촉하듯 내 팔을 툭툭 당기고, 나는 그제야 걸음을 움직였다. 이상하다. 이 거대한 동굴에서 낯익은 느낌이 든다.
탐사를 시작한지 둘째날. 험난하긴 해도 의외로 평탄한 지형이 많아서 꽤 깊이 들어왔다. 주동공의 높이는 가장 짧은 게 10m 쯤. 그리고 중간중간 나오는 거대한 공간이나 광장은 대부분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굉장한 규모의 동굴이다. 사실 동굴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탐사인데 어느새 움직일 때마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고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탐사를 계속하던 순간, 주동공에서 나온 가지굴로 들어갔다. 주동공에 비해서 매우 좁은 길이라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정도의 통로라 여유롭게 앞장서서 걷고 있는데, 막장이 나왔다.
"막장이다."
"뭐? 아, 뭐야. 여기만 한참은 걸은 것 같은데 막장이라고?"
이태일이 인상을 팍 쓰며 짜증을 내고 박경이 '진짜네'하고 신기하단 눈빛으로 벽을 짚는다. 벽을 천천히 흝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틈새.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틈이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의 흙을 제거하니 구멍이 점점 커지다가, 개구멍이 나왔다.
"야, 박경. 이거 봐. 개구멍이야."
"어, 뭐야. 용케도 찾았네."
박경도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틈을 바라보았다. 비좁긴 하지만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최대한 많은 곳을 탐사하는 게 우리 목표잖아. 여기도 들어가야 되지 않아?"
"야, 설마 거길 들어간다고?"
이태일의 신경질이 귀를 후빈다. 야야, 그 좁은 데 네 명이 다 들어가? 산소 부족으로 죽을 일 있냐? 이태일의 얼굴을 보니 그냥 나는 가기 싫으니 어서 다시 돌아가 넓은 주동공으로 가자꾸나, 이거다.
"그리고 나 다리 아프단 말이야. 어? 야아. 박경, 나 다리 아프다니까? 무리하면 안 된다며."
어리광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하고 싶다고 했으면서. 나는 이태일을 보며 툴툴대고 있고, 박경은 한숨을 내쉬며 이태일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이태일의 바지를 걷어 다리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야, 박경."
"왜."
"그럼 나랑 우지호랑 둘이 먼저 들어갈게. 둘은 나중에 오던가, 아니면 여기서 우리 나올 때까지 기다려."
그 말을 들은 이태일과 박경이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본다. 가만히 고민하는가 싶더니, 박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난 박사님 조금 휴식 취하신 다음에 바로 갈게. 혹시 갈림길 나오면 어떻게 할 거야?"
"무조건 오른쪽. 갈림길 나오면 그게 몇 갈래건 무조건 오른쪽으로 갈게. 우리 먼저 가고 30분 쯤 뒤에 들어오는 거로 해. 혹시 막장 나오면 그냥 되돌아 나와야 되니까."
"오케이."
그럼 우지호, 가자. 멀뚱멀뚱 서있는 우지호에게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따라온다. 나 먼저 들어간다. 몸을 잔뜩 낮추고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코로 들어오는 흙먼지에 두어번 기침을 한 뒤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은 정말 암흑이었다. 안 그래도 캄캄한데 좁기까지 하니 정말 죽을 맛이다. 그나마 위안인건 생각했던 것 보다는 넓다는 것. 얼마나 가고 있었을까, 갈림길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지만 우지호는 내 생각보다 뒤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지호!"
"응."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약간 안도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들었지? 갈림길은 무조건 오른쪽이다!"
"어."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계속 기어갔다. 슬슬 팔꿈치와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계속 가야 했다. 뒤에선 우지호가 말없이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고 나는 중간중간 잘 따라오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산소를 아낀다는 이유로 입을 닫았다. 사실 그냥 힘들어서 말할 기운도 없었지만.
점점 가면 갈 수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낯익은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고 해야하나. 대체 어디서 나는 느낌인지 알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대체 이거 언제 끝나. 이러다가 진짜 막장이면 큰일나는데. 벌써 10m는 온 느낌이다.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던 와중에, 드디어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손을 뻗어 벌어진 틈에 손을 쑥 밀어넣고 흙을 없애자 나오는 꽤 큰 구멍.
"푸하!"
드디어 밖이다! 넓은 공간에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트인다. 흙먼지 가득 삼킨 목이 컬컬해서 가래침을 뱉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뭐야, 여긴 또.
내 눈에 들어온 건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저기 돌기둥이 있고 공간 전체가 약간 푸르스름한 느낌.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빛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어둡지만 또렷히 보인다. 내가 서 있는 바닥을 살짝 짚어보니, 와. 지금까지 만져온 돌들과는 다르다. 단단하지만 약간 부드러운 느낌.
뭐지, 이건?
(ㄸ..뜬금없이 브금 넣어서 죄송해여...그냥 쓰다가 듣게 됐는데 느므 좋아서...여기부터 나오는 글 분위기랑은..어 제가 생각했던 원래 분위기랑은 비슷한데 글이 똥망이라 글이랑 보면 매치가 될지 안될지 그리고 지금 제갛 ㅏ는 얚니는 무슨 개소릴지 저도 모릅네다 네 짜게 식을게여)
뒤에서 우지호가 불쑥 튀어 나왔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모습이 우스워서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 뒤 머리를 탁탁 털어 주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내 손이 어깨와 몸을 털어주자 그제야 눈을 뜨는 녀석.
"우지호, 여긴 어딜까."
답이 없다. 고개를 돌려 우지호를 보니, 까만 눈에 푸른 빛이 비춰, 약간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가만히 그런 우지호를 바라보다가 이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익숙한 기분. 나와 우지호가 서 있는 곳은 둥근 바위 위였다. 바위 치고는 위가 굉장히 평평하긴 했지만. 끄트머리로 가 무릎을 꿇고 아래를 살펴보니, 생각만큼 높지는 않다. 옆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턱이 있어서 조심스레 그 턱을 밟고 아래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내려가는 모습을 본 우지호도 졸졸 쫓아와 함께 내려온다.
바닥에 발을 딛었다. 바닥은 그냥 돌. 여기저기 고운 회색빛 가루가 쌓여 있는 것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동굴 들어와서 맡은 공기 중 가장 숨쉬기 편한, 아니 어쩌면 건조한 연구소 공기보다 맑고 건강한 공기를 훅 들이켰다. 내 뒤에서 가만히 색색대며 숨을 고르고 있는 우지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따뜻하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우지호를 바라보았다.
"너 손이 왜이리 따뜻해."
우지호는 말없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걸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한 쪽 어깨를 살짝 구부리고 우지호의 뒤를 따라갔다. 우지호의 동그란 머리통이 앞에서 걷고 있고, 나는 뒤에서 걷고 있고. 박경과 이태일이 뒤늦게 생각났지만, 그냥 잠시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우지호의 따뜻한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우리가 있던 원기둥 모양의 바위가 여기저기 많이 있다. 조금 푸른 빛깔이긴 했지만, 가만보니 나무 밑동이랑 모양이 비슷한 것 같기도. 아니, 나문가? 아까 손에 잠시 닿았던 그 느낌을 떠올렸다. 정말 나무인가? 나무라고, 저 커다란 게?
저게 왜 여기에?
그 때였다. 우지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더니 나온 넓은 벽. 그리고 그 한 쪽에 난 구멍. 우지호가 천천히 내 손을 당겨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묘한 느낌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
꿈인가.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그저 꿈같다. 연구소가 X구역 근처에 있어 그간 보지 못했던 햇빛이 내리쬐고 있고, 내가 밟고 있는 바닥은 흙바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고 작은 나무들과 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풀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 오래 전에 사라진 자연의 흔적. 이제는 책이나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정말 꿈인가.
"우지호."
우지호가 천천히 내 손을 놓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런 우지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햇빛 때문에 옅게 보이는 머리카락과 드러나있는 하얀 목덜미. 그 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속에서 왈칵왈칵 치솟아 올라오는 것에 놀라고 있는데, 우지호가 천천히 높은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나무를 천천히 끌어 안는다.
아.
우지호가 눈을 곱게 감고 나무를 끌어안는 모습이 순간 느리게 보였다. 나무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만히 맞댄 우지호. 그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보이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듯이 편안한 얼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풀들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사삭 소리를 낸다. 그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살짝 흔들리는 우지호의 머리카락.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천천히 나무에서 떨어져 내게로 돌아서는 우지호. 그 까만 눈과 마주쳤다.
"우지호."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지호의 이름만이 계속 속에서 올라오고 있다. 몸에 퍼져 나가는 온기와, 살짝 어지러운 머리.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정말 어렴풋이 느껴져 나조차 알 수 없던 우지호에 대한 어떠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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