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겨울
01
w. Un Bel Viso
" 와... 진짜 덥다. "
7월의 막바지, 날씨는 정말 매우 개 덥다.
흰 반팔 셔츠 소매에 하늘색 끝처리가 된 하복이 잘 어울리는 내 남자친구는
더위에 유독 약해 (그렇다고 추위에 강한 것도 아닌데...? 아무튼)
목 근처에 연신 손 부채질을 해댔다.
머리숱은 또 왜 저렇게 많아서.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재현이의 앞머리를 살짝 들어
후 후 불어가며 땀을 식혀줬다.
" 오늘 유독 덥네, 진짜. 괜찮아? 그러게 내 가방은 내가 든다니깐. "
오늘은 재현이가 남아 청소하는 날이라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며
기어코 내 가방을 자기가 들어주겠다 고집을 부린 것이다.
" 괜찮아. 가자. "
아이쭈끄림 시원한 아이쭈꾸릠 사조 남친~ 웅앵 ლ( `Д' ლ)
하며 얼굴을 들이밀자 볼이 찌부러지게 밀어내며 알았어 알았어,
하고 근처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가는 재현이었다.
" 헐 대박 시원해~ "
에어컨 빵빵한 카페에 들어서자 기분이 좋아져서 방방 뛰며 카운터로 향했다.
음음 재혀나 나 딸기빙수 먹을랭! 딸기빙수 주세요!
주문을 하며 헤실대자 알바가 남자인 것을 본 재현이는 재빨리 다가와 나를 저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가서 앉아있으라고 한 뒤 낑낑 대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했다.
나는 재현이 말은 절대 안들으니깐~ 앞뒤로 가방을 매서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주제에
알바생이나 질투하는, 세상에서 젤 귀엽고 잘생긴 남자친구를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서있었다.
진동벨을 받고 돌아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히, 하고 웃었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두 볼을 꼭 잡고 입술에 쪽,
뽀뽀를 해주는데 배에 가방이 닿는 게 느껴져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재현이도 점점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밉지 않게 나를 면박 줬다.
" 누구 여자친구라 말을 이렇게 안들어,
아주 힘들어죽겠어. "
" 안대 주그묜... "
여전히 두 볼이 큰 손에 꾹 눌려 찌부러진 채로 웅얼거렸다.
그 때 재현이 손에 들린 진동벨이 내 볼과 함께 덜덜 떨리는 바람에 또 한참을 웃다가
딸기빙수를 가지고 창가 자리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이 책가방 무거운 거 알지.
우리 못난이 책가방에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빵빵해? "
내 가방을 힘겹게 내려놓은 재현이가 갑자기 내 가방을 열었다.
헐, ㅇ...! 자리에 앉자마자 이미 딸기빙수를 두 숟가락 정도 떠먹고 있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수면안대, 베개용 무민인형과 조그만 담요까지, 재현이의 손길에 내 애장품들이 가방 밖으로 죄다 딸려 나왔다.
" ... 이름아(야), 너... 고3 맞지...? "
" 야 그거를 막... 막 다 꺼내면 어떡해...!! "
의미를 알 수 없는 재현의 표정을 보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에 숟가락으로라도 얼굴을 가려보았다.
뭔 놈의 숟가락이 이렇게 쪼끄매서는 눈 한 쪽도 제대로 안 가려져...
어쩐지 빙수 한 번 떠먹었을 때 맛도 안나더라.
아니, 이게 아니고.
재현이는 그 크고 무거운 가방 안에서 정작 책 한 권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텅 빈 책가방 안 쪽을 더 뒤적거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다
가방 앞쪽과 옆쪽에 달린 주머니들도 다 열어보기 시작했다.
저 눔 자식 뭘 기대하는거야... 필통도 학교에 놓고 와서 없을텐데.
쪼그만 단어장 하나라도 누가 실수로 넣어놨으면 좋겠다, 제발... 뭐라도...
재현이가 나를 너무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게...ㅠ
거의 울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가방 앞쪽의 큰 주머니를 뒤지던 재현이의 손길이 멈칫, 하더니
안 그래도 분홍 분홍한 귓볼부터 목과 말랑한 볼따구까지 점점 달아오르는 게 딱...
오늘 아침에 내가 저기 어디쯤에 급하게 챙겨넣은 생리대 발견했는데 지금...?
" ㅋㅋㅋ 뭐야 그 표정은? 뭔데, 뭐 있어? "
" 웅, 아니... 없어. "
그러고는 황급히 가방을 닫고 저쪽 의자로 밀어놓는 것이다.
아 진짜 귀여워서 못 살아...
" 그러게 여자 가방은 함부로 열어보는 게 아니에요 ~
아무리 궁금해도 그렇지! "
금방 전세역전이 되어 나는 쪼그만 숟가락을 휘둘러가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현이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아주 작게,
아주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리깐 채 내게 물어오는 것이다.
" 지금... 지금 해...? "
" ...??? "
" 그거 하면 많이... 많이 아픈 거 아냐...?
집에 갈 걸 일부러 나랑 있는거야...? "
아냐 그런 거... 일단 니가 너무 귀여워... ㅇ<-<
그러고보니 벌써 2년 째 사귀면서도 이런 얘기는 한번도 안나눴던 것 같다.
생리통이 그렇게 심한 편도 아니고, 생리한다고 감정기복을 막 표출하는 스타일도 아닌데다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재현이는 내심 궁금했을수도 있었겠다.
" 음, 그거 한다고 항상 아픈 거 아니구.
나는 특히 별로 안 아파.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한데. "
" 그래도 많이 힘들잖아. 막, 막 여자들 그럴 땐 기분도 안 좋고 뭐 그렇다며... "
" 그치... 요즘같은 날씨엔 진짜 최악이고. "
" 근데 왜 한 번도 티를 안내... "
" 웅?? 아니 힘들 땐 내가 알아서 말하지.
아프다고 몇 번 약속 깬 적도 있고,
먼저 집 간 적도 있고 그렇잖아. "
" 그게 아니라...
사소한 거라도 난 다 알고 싶은데...
니가 왜 아픈지, 어떨 때 심하게 아픈지,
그리고 그럴 때 내가 어떤 도움이 되는지... "
" 니가 알아야 할 게 있으면 내가 먼저 말해. "
" 몰라야 할 것도 있다는 뜻이야?
내가? 너에 관한건데도? "
얘가 왜 이래... 아무리 조근조근 달래줘도 도무지 뿅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뭔가 서운한 게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다.
" 그래서 그게 화나...? "
" 아니... 그냥 가끔 너무 허무해.
우리 2년이나 만났는데 아직도 알아갈 것 투성이라는 게... "
" 그게 왜~? 난 그래서 더 안 질리고 좋구만. "
" 거짓말... 너는 다 알잖아. 나만 모르게 하잖아. "
" ... "
" 바보같이 자꾸 나만 좋아하나, 그런 생각 하게 만들고... "
" 정재현... "
" 아냐.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지, 뭐.
나쁘지 않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깐. "
" 누가 그래? 나보다 니가 더 좋아한다고. "
" 다 그래, 다.
그리고 나도 알아... "
재현이 힘 없이 고개를 떨구자 풍성한 머리카락이 따라서 우수수 쏟아졌다.
나는 그것까지도 좋아하는데.
까맣고 숱 많은 머리카락도, 시무룩한 눈썹도, 삐죽거리는 입술, 보조개까지 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 빙수가 녹고 이써요... (*´∩`*)
사랑하는 자기, 일단 이거 좀 먹어바... "
숟가락을 애써 쥐어주니 꼭 쥐기는 하지만 여전히 온 몸으로 삐침을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 그러면 우리 배틀을 하자. "
" 무슨? "
아직도 삐죽거리는 입술과 말랑말랑한 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드디어 내 쪽을 바라봤다.
" 누가 누가 더 사랑하나 배틀! "
" 푸흐... 그건 어떻게 하는건데? "
" 서로 왜 사랑하는지 하나씩 돌아가면서 말하는거야.
먼저 말할 게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거! "
" 만약에 니가 지면 내가 진짜 슬퍼지잖아... "
" 두고봐, 진짜. 니가 지면 뭐해줄건데? "
" 후... 뽀뽀해줄게. "
" 으응...? 그거 내가 이겼을 때 말하는 거 맞지? "
" 우씨, 저거 봐. 또 저런다. 그렇게 싫어? 내 뽀뽀가? "
" ㅋㅋㅋ 아 장난이지! 근데 뽀뽀는 너무 약하고. "
" ...??? ㅁ, 뭐를 원해. 지금 눈빛 이상해, 너. "
" 됐고. 나부터 한다?
나는 재현이가 나에 대해 궁금해해주는 게 좋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줘서 좋아.
사랑해, 정재현. "
" 뭐야 이거... 완전 심쿵하게 만드는 게임이었네.
음, 나는 니가 나를 항상 쳐다봐줘서 좋아.
난 다 느끼고 있어. 내 눈이 어딜 보는지, 내 손이 뭘 만지는지,
다 알고 싶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
그래서 사랑해, 성이름. "
"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그래서 사랑해, 정재현. "
" 뭐야, 너 너무 묻어가기 아니야? "
" 빨리 또 말해줘. 듣고 싶어. "
" 니가 달달한 노래 들을 때 마다 나 떠오른다면서 톡해줘서 좋아.
사랑노래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남자친구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
" 사랑노래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
" 또 이렇게 묻어가기야? "
" 정재현,
나 쳐다봐줘서 고마워, 항상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같이 걸을 땐 내 손 꼭 잡아주고.
존재만으로도 고마운데, 남자친구까지 돼줘서 고마워.
내가 더 많이 노력할게. 너 서운하지 않게.
근데 나, 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너 좋아하거든.
그니까 우리 조바심 갖지 말고 천천히, 오래 좋아하자.
누가 더 좋아하고, 누가 덜 좋아하는 게 어딨어. 그런 건 누가 감히 측정하고 비교하는데.
그냥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좋아하면 되지. "
" 어떡하지. "
" 뭘 어떡해. 감동 받았으면 눈물이라도 짜내. "
" 사람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나? "
" 너 한정이야. "
" 무려...? 진짜 난 전생에 얼마나 대단한 성인군자였던거야... "
" 보조개 귀엽네. 뽀뽀할래? "
카페 알바분께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몇 시간을 그렇게 빙수 하나를 앞에 두고 노닥거리다
에어컨 바람이 춥게 느껴져 핫초코와 그린티라떼를 하나씩 시켜놓고 또 몇 시간을 그렇게 노닥거렸다.
*
우리는 밖으로 나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파트 주변을 계속 걸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 때 마다 느껴지는 찬기에 내가 목도리에 얼굴을 부빌 때 마다
그것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흘긋거리는 시선 외에는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 역시 묵묵히 내 옆을 걷고 있는 그에게 어디로 가는지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걸으면 걸을수록 시선만 돌리면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가득한 장소 투성이었다.
함께 자주 가던 조그만 빵집 옆에 녹슬대로 녹슨 인형뽑기 기계를 봤을 때,
이제는 새로 페인트칠을 해버려 볼 수 없게 된, 귀여운 벽화가 있던 가게를 봤을 때에도,
속으로는 몇 번이고 그에게 기억나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물으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려세워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
나는 다시금 현실을 원망하며 울고 있었다.
눈 앞에 선 그도, 어느새 그와 내 머리 위에 예쁘게 내리고 있는 눈도,
자주 걷던 거리 위에서, 그의 앞에서 결국 울고 있는 나도,
다 원망스럽고 미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여전하고 또 예뻐서, 그리고 그게 고마워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 추워, 어디라도 들어가서 따뜻한 것 좀 마시자. "
그가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거두던 손길을 멈추고 내 겉옷 소매 언저리를 당기며 근처를 둘러봤다.
그리고는 잠시 주춤거리다 카페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핫초코? 하며 묻더니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문을 하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변한 건 우리, 어쩌면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또 울컥했다.
" 나 없을 때도 여기 자주 왔어?
그린티라떼는 여기가 제일 맛있었는데,
그동안 맛이 변했으면 어쩌지? "
실없는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던 그는 멍하니 테이블만 보고 있는 나를 보다
재미없다는 듯이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의자에 등을 기대 앉았다.
" 나 테이크아웃 해서 먼저 나갈게.
추우니까 마시고 들어와. "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먼저 일어나는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굳어갔다.
" 그렇게 불편해? 뭐가 그렇게 싫어? "
" 너랑 이러고 있는 게.
너랑 마주보고 핫초코나 마시는 게 싫어,
헤어진 사이에. "
" 그럼 헤어진 사이는 뭘 어떡해야 하는데. "
" 그냥, 이렇게 정 없게, 나는 먼저 나가버리고 너는 혼자 남고. "
" 말을 참... 같이 있어, 그냥. 마시고 가. "
" 싫어. 이상해. 헤어진 애인이랑 데이트하는 기분. "
" ... "
" 먼저 갈게, 천천히 와.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갈거지? "
" 아니. 헤어진 사이에 한 집에서 자는 게 말이 되냐.
삼촌이랑 호텔 잡아서 나갈거니까 걱정도 하지마. "
" ... "
" 니 말대로 헤어진 사이에 기다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지나 마.
천천히 와, 가 뭐냐. 다정하게. "
" ... 미안.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눈물이 흐르기 전에 급하게 카페를 나와버렸다.
아, 핫초코. 여기 핫초코 내가 제일 좋아하는건데. 진짜...
다시 들어가서 가져올수도 없으니 그저 차갑게 언 손을 비벼가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만 재촉했다.
반가운 여러분! 읽어주시면 좋겠어용 (❁´▽`❁) |
안녕하세요, 감사한 독자 여러분❤‿❤ 처음 인사드리는 Un Bel Viso 입니다! 첫 회에 유비브이라 적어뒀는데, 그냥 편하신대로, 아니면 특별한 애칭을 만들어 불러주세요!(?
글 얘기를 간단히 나눠보자면, 자고로 덕질은 자급자족하는 거라구 제가 보고 싶은 재현을 탈탈 털어넣을테여요...! 부디 여러분도 함께 좋아해주신다면 정말 좋겠네요,, 사실 너무 떨립니다...ㅇ(≥ㅁ ≤; )ㅇ 왜냐면 제가 타이밍 좋게 쓰차를 일주일이나 먹는 바람에(;;) 두 편을 며칠동안 정말 공들여서 만졌거든요. 그래도 처음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을거예요, 부디 이해해주시고 재미만 극대화시켜서 받아들여주심이...
앞으로 쭉 함께 따라와주셨으면 해요!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써나갈게요. 많이 배우고 더 즐겁게 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도 꼭 뵙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