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겨울
04
w. Un Bel Viso
" 식사가 별로였어? 내내 표정이 안좋네... "
재현이는 운전을 해야해서 와인을 하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재현이가 자기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먼저 썰어 내 앞에 있는 접시와 바꿔주고,
물잔이 비기만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이 바로 바로 물을 따라주는 친절들이 어쩐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가 여전히 표정을 숨기는 능력이 많이 부족한건지, 그에게만 여전히 다 보이는건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차에 올라타며 의연하게 나를 떠보는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났다.
그는 그랬다.
나와 사귀기 전까지 그는 나에게도 이해관계가 확실했고,
뛰어나게 빠른 눈치를 이용해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것들의 싹은 가차없이 쳐냈다.
내가 처음 느낀 정재현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삭막했다. 나는 그를 소위 '개싸가지'라고 표현해댔다.
친구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완벽한 정재현을 찬양하느라 바빴다.
그는 절대 남에게 그의 기분을 티내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고 눈엣가시들을 처리했다.
나는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
확실한 건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었고 언제든지 버려지기보다는 버릴 수 있는 위치를 찾아내 서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말한 뒤부터의 재현이에게서는
단 한번도 그 때 그 첫인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그의 모습들이, 헤어지고 나자 하나 둘 떠올랐었다.
이제 나 역시 남들을 대했던 방식으로 똑같이 대하겠지.
그래, 그렇게 지레 겁을 먹고 그를 피한 건 어쩌면 처음부터 전부 나였다.
나를 더이상 찾지 않는 그를 먼저 찾지 않았던 것도,
헤어지자는 문자에 아무런 답장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이상하게 여전한 태도로 날 대하는 그에게 반감부터 드는 것도.
" 몰라, 속이 좀 안좋네. "
"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좋아하는 고기도 잘 못 먹고. "
" 나 요즘 식성이 바뀌어서. "
" ㅎ... 그렇게 말하면 좀 서운하네. "
바람 빠진 소리로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 그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벨트, 라고 나지막이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고.
한참을 달리던 차 안에서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문득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을 느꼈다.
" 어디 가는데. "
" 드라이브 좀 하다가 들어가게.
소화도 시킬 겸. "
딱히 뭐라고 대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겨울 밤의 분위기가 참을 수 없이 좋았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려 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손을 갖다댔다.
차가웠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창문을 조금 더 내려 이마까지 바람을 쐬어주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때마침 차가 어떤 다리를 건너자 바깥으로 지나가는 강의 울렁임과 도시의 불빛들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슬쩍 돌아본 그의 머리카락도 살짝씩 살랑이고 있었다. 그가 내 시선을 느끼고 기분 좋은 미소를 옅게 지었다.
" 재현아. "
" 응. "
" 나 좀 봐봐. "
" 운전하잖아. "
" 잠깐만. "
그의 얼굴이 보고싶었다. 눈이 보고싶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여전히 편안한 미소만 띄운채로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에 그냥 고개를 다시 돌렸다.
" 남자친구는 있었어? "
" 질문이 뭐 그래?
지금 있을 수도 있는건데. "
" 도발하네? "
" 왜 도발이라고 생각하는데. "
헷갈렸다.
그의 말도, 행동도, 표정도, 하나같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 그러네. 내가 질투 느껴놓고 니가 도발한거라고 표현했네. "
" ... 무슨 말 하는건지 모르겠어. "
" 여기 잠깐만 있어. "
한적해보이는 공원 주변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그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곤 내려버렸다.
당최 아까부터 우리가 하는 게 대화인지 독백인지 모를만큼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그의 화법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잠깐 휴대폰을 보니 언니에게서 언제쯤 들어올거냐는 문자가 와있었다.
언닌 집인가보네. - 저녁은 먹었어? 우리 이제 막 나왔어 차 안 막히면 금ㅂ - 까지 치고 있는데
한 손에 세븐일레븐이라고 적힌 비닐봉지를 딸랑 딸랑 흔들며 재현이가 차로 돌아왔다.
" 우리 언제 들어가?
언니는 집인가봐. "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그렇게 물어보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뭐지, 후식이라도 사온건가.
" 짠. 우리 2차로 조촐하게 여기서 맥주파티.
누나한테는 안 들어간다고 보내놔. "
그렇게 말하며 재현이가 봉지 안에서 맥주 두 캔과 허니버터칩을 꺼냈다.
뭘 또 안 들어가... 나는 궁시렁대며 짜증스럽게 문자를 마저 쳤다.
- 저녁은 먹었어? 우리 이제 막 먹기 시작했어
차도 막혔는데 맛집이라고 줄 엄청 길고ㅠㅠ 금방 갈게 -
조금 고쳐서.
" 같이 술은 처음이네. "
" 그러네. "
재현이가 시원하게 맥주를 따서 내게 건네고 건배를 했다.
한 모금을 꿀꺽 들이키니 상쾌한 탄산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 나는 안주 짠 게 좋은데. "
허니버터칩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것도 달콤짭짤하니 나쁘진 않네.
" 그래? 나는 단 게 좋더라. "
" 그리고 맥주보단 소주지... "
" 그거는... 인정. "
기분이 색달랐다. 처음으로 마시는 술은 졸업하고 꼭 같이 마시자고 그랬었는데.
그것도 잊고 있었는데 앞에서 맥주를 들이키는 재현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것이다. 맞아, 그랬었어.
그 기억에 혼자 살풋 웃으니 궁금해죽겠단 얼굴로 갸우뚱거린다.
" 아무것도 아니야. "
괜히 그런 궁상맞은 말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 술은 어느 정도 해? 잘해? "
" 아니. 한 캔 넘어가면 어느 순간 확 올라와. "
" 그 정도야? 소주는? "
" 난리나... 그래서 좋아하는데 잘 안 먹어. "
" 오늘 니 주사 보고싶은데? "
" 금방 볼 수 있을 걸.
근데 너 마셔도 돼? 진짜 집 안가려고? "
그러고 보니 이 자식은 운전해야된다고 좋아하는 와인도 마다한 마당에 여기서 왜 맥주를 까고 있어.
" 안간다니까. 몰라. 이미 마셨어. "
대체...
이런 저런 쓸모없는 얘기들을 안주 삼아 마시니 맥주 한 캔이 금방 동이 났다.
재현이는 이번엔 짠 안주도 꼭 사오겠다며 다시 나갔다.
푸우,,, 차 안이 조금 덥게 느껴졌지만 시동이 꺼져 창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고 잠깐 나가자니 아까 재현이가 차문을 열었을 때 매섭게 들어온 바람이 두려웠다.
결국 볼따구가 따끈따끈해진 채로 얌전히 재현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현이가 돌아왔고 우리는 두 번째 맥주를 땄다.
재현이는 술을 정말 잘하는 모양인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열심히 마셔댔다.
" 너무... 덥당... "
얼마 마시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말했다.
재현이가 피식 웃으며 손에 든 과자를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멀 웃냐고 발끈하며 말했지만 혀가 꼬일대로 꼬여있는데다 과자 때문에 웅얼거리는 발음이었다.
" 남자친구 있었냐고. "
" 당요나지... 한 명? 두 명?
으-음! 오만오천명...! "
이미 이성의 끈은 살짝 놓은채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고분고분 대꾸했다.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던 재현이가 다시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거짓말 말구. "
" 마쟈... 거짓말.
남자칭구는 다... 다 짜증나... "
" ... "
" 혼자 가버리면 그만이야...
헤어지자 한마디면 다 끄치라구... "
" ... 이름 "
" 진쨔 맘 다 줘봤자... 사랑한다 해봤짜...
내가 실타는거를 어떠캐. 그럼 끄친거지 머... "
내가 되게 쉽게... 싫어질 수 있는 사람인 걸 어떡해...
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 줬는데도 내가 싫다는데 어떡하냐고...
" 갠차나... 다 내 잘못이지 모.
몇몇 빼고눈 나도... 진심 아니어쓰니깐...
그냥 필요했던거니깐... 옆에 있어줄 사람... "
"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도 있었어? "
" 웅... 착한 사람... 이써써... "
" 얼마나 좋아했는데. "
" ... 아... 이제 다 잊을 수 있겠꾸나...
나도 이제... 행복해도 되는구나... "
그럴만큼...
추궁하는 듯한 재현이의 말투에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 속 한 켠에서는 미쳤냐고, 지금 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거냐고 나를 다그쳤지만
한 번 열린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 근데 다 아니어써... 나 혼자만 그래써...
나 혼자 김칫꾹 마시고... 혼자 착각했따구... "
" 나 봐봐. "
재현이가 조금 힘이 들어간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 태도에 조금 겁을 먹고 눈을 꾹 감아버렸다. 꾹 감은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성이름. 나 봐. 나 좀 봐줘. "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향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턱을 꼭 잡았던 손에서는 힘이 빠졌다.
이미 흘러내려버린 눈물을 그가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다른 한 손은 부드럽게 머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는 닿을 듯한 거리에서 한동안 서로의 눈을 마주봤다.
" 나 아직도 싫어?
얼마나 싫어? "
한 번도 싫었던 적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얼마만인지. 얼마나 보고싶었던지.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어서 눈물이 자꾸 차오르는 눈을 몇번이고 깜박였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하얀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웃었다.
" 안 시러... 하나도. "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맞췄다.
떨어져있던 시간 내내 이것만을 원했던 사람들처럼.
재현이가 나의 몸을 꼭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려고 나는 재현이에게만 집중했다.
재현이의 수트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허리를 꼭 감아안았다.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도 좋았다.
깨고 나면 영영 아프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라도 행복했다.
나는 잠깐 입술을 떼고 말했다.
" 이거 꿈이야? "
그 잠깐을 못 참겠다는 듯이 자꾸만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그가 싫지 않았다.
대답없이 맞춰오는 입술이 웃고 있는 걸 느꼈다. 나도 웃었다.
여전히 눈가는 축축했지만 입술 틈으로 웃음이 자꾸만 새어나갔다.
" 나 좋아해? "
다시 얼굴을 조금 뒤로 빼고 묻자 그가 쪽, 하고 짧게 입 맞춘 후
코를 맞댄채로 사랑해, 하고 속삭였다.
눈빛이 한참동안 얽혀있다가 다시금 입술이 부딪쳤다.
그리고 턱과 목에 짧게씩 입 맞추며 내려갈 때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사랑스런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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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색다른 도전이었는데 오늘은 어떠셨나요? (๑´ლ`๑)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용!
분량 들쑥날쑥한 거 정말 죄송해여ㅜㅜ
그리고 암호닉,, 제겐 너무 어렵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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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소중한 시간 내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금방 또 올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