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욕 0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툭, 툭-
자습을 하는데 지우개 조각들이 내 머리에 자꾸만 날아왔다. 이번에는 이민형이랑 친한 여자애들이 아닌 남자애들이 하는 짓이었다. 누가 정신연령 낮은 애들 아니랄까봐 괴롭히는 수준도 낮기만 하다. 같잖아서 모두 무시하고 문제에만 집중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꽤 둔탁한 충격이 머리에 가해졌다. 필통을 통채로 던진 것이었다. 머리가 울려왔다. 나는 내 머리에 맞고 튕겨져나가 바닥에 널부러진 필통이 쏟아낸 필기구들을 다시 주워담았다.
그리고, 그 애들에게 다가가 그 중 한 놈의 얼굴에 필통을 냅다 집어던졌다.
"악!"
"저 미친년이..!"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나는 가방을 들고 교실에서 걸어나왔다. 밥 먹듯 학교에서 무단 결과를 하니 엉망일 출결상황은 불보듯 뻔했다.
아빠와 여자는 몇 주째인지 모를 신혼여행을 간 상태여서 돌아온 집 안은 적막했다. 몇 주동안 이민형과 단둘이 집에 있었다는 소리인데, 그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민형은 외박을 밥 먹듯 하는 아이였고 그나마 돌아올 적엔 항상 저번처럼 술에 절은 상태였다.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내 방 문을 걸어잠궈서, 이민형은 하염없이 내 방 문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다가 그 상태로 쭈그려 잠들기 일쑤였다. 다음날 아침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면 그 자리에 이민형은 없었다.
그래놓고 학교에서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제 친구들을 방관했다. 더욱 짜증나는 것은 체육복이 없어진 내 사물함을 보고 나서, 찢기고 구겨진 내 교과서를 보고 나서, 책상 서랍에서 각종 패드립이 난무한 쪽지를 발견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
항상 이민형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방 밖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에 눈을 떴다. 창 밖을 보니 벌써 해가 져서 깜깜하다. 지금이 몇 시지? 핸드폰 액정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이민형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오늘 친구들 데려간다. 나가 있든지]
방문 밖에서 나는 소음의 주체는 지긋지긋한 이민형의 친구들인 듯했다. 누가 누구더러 나가래.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 새로 들어오는 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형상은 분명 만취한 이민형의 친구 중 하나였다. 인사불성이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을 보자니 웃기기 짝이 없었다.
"여기 아니야. 나가."
잔뜩 취한 그 아이는 내가 등을 떠밀자 순순히 밀려나는가 싶더니, 얼떨결에 내 얼굴을 보고는 멈추어 섰다.
"...이여주네..?"
어둠 속에서 마주친 눈동자는 바깥 복도의 불빛을 받아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는 큰 보폭으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내 목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벽 쪽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이여주, 니가 던진 필통, 맞아서 여기 멍 들었잖아, 응?, 씨발년아, 따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한 발짝, 두 발짝 밀려나다보니 나는 까치발을 든 채 목이 더 졸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자세가 되었다.
위험했다. 엄청난 악력에 목이 쥐어짜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으나 이미 눈에 초점이 없는 아이의 힘에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와달라고, 누구라도 이 방에 찾아와 달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으나 내 입에서는 자그마한 켁, 켁 소리만 간헐적으로 뱉어져 나올 뿐이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간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빠와 그 여자가 만나는 것을 막지 못한 잘못? 이 아이의 얼굴에 필통을 던진 잘못, 그것도 아니면, 그저 방문을 닫지 않은 채 잠을 청한 잘못?
눈 앞이 희뿌얘져 가는데 그 아이는 별안간 내 목을 감싸쥐었던 손을 놓았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 정신없이 숨을 들이쉬려 노력했다. 저 멀리서 누군가 얻어맞는 소리와, 그 아이의 것인 듯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어라 끊임없이 화를 내는 이민형의 목소리도.
-
토요일의 늦은 아침, 느릿느릿 1층으로 내려와 그릇에 시리얼과 우유를 붓고 조금씩 식도로 떠넘겼다. 지난밤의 일 때문에 목에는 흉한 손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그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워서 창문으로 따뜻한 봄 햇볕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목을 덮는 두꺼운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일순간 내 목덜미 근처에서 큼지막한 손이 맴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쨍그랑-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놀란 내가 휘두른 팔에 시리얼 그릇이 바닥에 엎어져 산산조각났다. 목을 내 두 손으로 감싼 채 눈을 굴리는데 내 뒤에 서 있던 것은 다름아닌 이민형이었다. 이민형은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건지, 내 목 근처를 매만졌던 손을 거둔 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었다.
"........"
그런데 이 와중에 웃긴 것은, 뒤돌아 봤을 때 서있던 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 아이가 아닌 이민형이어서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민형이 흘린 이야기가 시발점이 되었을 괴롭힘. 내가 온갖 괴롭힘을 당해온 것의 원흉이 이민형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난 이민형이 죽을 만큼 밉지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바보같은 사람이었던가.
목에 살며시 닿은 손길에 놀라서 그런건지, 이민형의 얼굴을 보고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 내 자신이 미워서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눈시울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민형은 그런 날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여주. 걔 이제 학교 안 와. 못 와."
"..너는?"
단단히 막아 두었던 무언가가 터진 듯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에 숨이 벅차 헐떡였다.
"......"
"너도 걔랑 똑같은 새끼야."
잠시나마 이민형을 보고 안심 따위를 느꼈던 내가 한심하다. 이민형 앞에서 우는 모습을 더이상 보이기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는데, 이민형이 나를 저지했다.
그리고 식탁 주변에 어지러이 흩어진 유리그릇 파편들을 맨손으로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잘게 조각난 유리 파편 서너 개가 이민형의 손날에 박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이민형."
내가 부르자 이민형은 일순간 유리를 쓸어담는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맨발이었고, 보란듯이 아직 이민형이 치우지 못한 유리조각들 위에 올라섰다.
"미쳤어?"
"이제와서 위선 떨지마. 그냥 하던대로, 유치하게 니 친구들 시켜서 나 괴롭혀."
이민형은 벙찐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뒤돌아 내 방으로 향했다. 발바닥과 차가운 대리석 바닥, 그 사이의 유리조각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날을 세웠다. 여린 발바닥 살갗이 찢기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고 나는 애써 그 고통을 무시하며 계속해 걸었다.
일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이민형이 뒤따라와 나를 들어올린 것이었다. 한 팔은 내 등과 어깨를 받치고, 한쪽 손으로 내 허벅지를 받친 채였다. 한번에 우습게 들어올려지는 나를 보면서, 내가 그간 부린 객기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목이 졸리고 들어올려질 수 있는 존재였다.
이민형은 나를 안아들고 계단 층계를 오르며 말했다.
"함부로 다치지마."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오랜만이야 여주야."
"....정재현?"
재현이 환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아빠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엄마와 함께 살던 때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내게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섯살임에도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고, 그런 내게 유일한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쪼르르 우리집으로 달려와 함께 놀던 재현이었다. 어린 재현은 지금과 달리 체구가 작고 왜소해서 그보다 두 살이 어린 나와 무리없이 잘 어울려 지냈다.
재현이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매일같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대로 함께 자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의 열다섯, 그의 열일곱 겨울에 그가 문득 유학을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되어 지금에야 만나게 되었지만 말이다.
거의 3년만에 처음 보는 재현은 첫 눈에 봐도 키가 조금 더 크고 선이 남자다워졌을 뿐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낯선 느낌이 들어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짧은 안부인사 다음에는 익숙하게 사업과 경영 얘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이제 스무살이 되었다는 재현은 그동안 계속 유학생활을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A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업가의 대화에 엄청난 흥미를 보이며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경영 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으므로 앞에 놓인 접시에 담긴 음식만 깨작깨작 비워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나로 넘어가 있었다. 이제 숙녀가 다 되었다느니, 아주 예뻐졌다느니. 아빠도 재현을 칭찬했다. 사윗감으로 딱이라고. 재현은 여주가 아깝죠, 뭘. 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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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아빠는 내게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정재현이랑 유학 가."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는 평소에도 무단결석을 밥 먹듯이 했으니 한국에서 대학교를 잘 가기에는 이미 그른 일이라, 외국에서라도 대학교를 다녀라 이 말이었다. 재현은 그때쯤 아이비리그에 편입하게 될 거라고 했다. 스무살, 성인 둘, 유학. 이건 결혼 내정자가 그로 정해졌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재현은 항상 내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러한 현실에 저항할 의지와 이유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
나는, 며칠 전부터 뼈저리게 다시금 느껴왔듯이,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아빠라는 사람과 괜한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별다른 목표도 가지지 않은 채 한국에서 무의미한 시간낭비를 계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재현은 예전부터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내게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많이 보고싶었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말해주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일단 많이 피곤할테니까]
[잘 자]
방금전 재현으로부터 온 문자를 보고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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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실로 오랜만에 오는 듯했다. 이제 목의 자국도 많이 사라져 파운데이션을 몇 번 발라주면 별로 보이지도 않아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교실은 놀랍도록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내가 들어오면 쏟아지는 나를 향한 껄끄러운 시선들, 나를 보고 저들끼리 무어라 소근거리는 이민형의 친구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항상 눈이 마주치는 이민형까지. 모든 것이 똑같았다.
다만 오늘은, 책상 서랍에 든 내 교과서가 멀쩡했다.
화장실에서 걸레 빤 물벼락을 맞지도 않았고, 내가 지나가면 대놓고 욕설을 퍼붓던 아이들도 이제는 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도 반응을 안 하니 제 풀에 죽었겠거니 싶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학교 생활을 한 듯 했다. 그래봤자 오랜만에 누군가의 괴롭힘 없이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이 다지만.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교실에서 빠르게 걸어나갔다.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껄끄러워하는 상황 속에 오래 있어봐야 내게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게 그간의 생활을 통해 얻은 내 철칙이다. 그저 빨리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져야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줄일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빠른 걸음으로 교문까지 당도하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이여주!"
어디서 난 소리인지 방향을 몰라 주변을 둘러보는데 거기엔 재현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온건지 간단한 차림새였다.
"너가 고등학교 교복 입고 있으니까 어색해."
내 마지막 기억은 단발머리를 하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너였는데. 재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재현에게서는 3년 전과 똑같이 포근한 비누향이 났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다. 재현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봐왔다 한들 몇 년만에 만나 어색할 수도 있었는데 재현은 익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내가 어떤 말을 할때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활짝 웃어본 것 같았다. 고마워, 인사하며 차에서 내리려는데 재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주야 곧 벚꽃 핀대."
"정말? 예쁘겠다."
"같이 보러갈래?"
같이 가 줄까? 장난기 섞인 물음을 던지자 재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벚꽃 피면 말해줘.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리는데, 나로부터 일곱 발짝 떨어진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누구야."
이민형이 이렇게 빨리 집에 올 리가 없는데. 오늘은 웬일로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다.
"누구냐고."
이민형이 한 발짝씩,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