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인피니트H - Crying (Inst)
그 날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산이 없었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은 탓이었다.
톡톡. 빗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대로 가면 신발이 다 젖을텐데.
우산이 없다고 부를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산을 내밀었다.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한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큰 그런 우산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코트, 검은 바지, 검은 가방. 유일하게 검지 않은 것은 머리카락뿐인 남자였다.
그 날. 나는 너를 처음 만났다.
17171771
始
w. 복숭아 향기
"전화 안받아도 괜찮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옮겨 맥주병을 그러쥐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귓가에는 계속해서 클럽 음악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밖에 이렇게 나온 게... 얼마만이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옆에서는 이름 모를 남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쇼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조금씩 눈 앞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한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알고 있는 남자였다.
나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다가왔는지 남자의 얼굴은 꽤나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
"응."
"김남준이잖아."
"맞아."
"그런데 전화를 안받는다고?"
네 애인인데?
굳이 받을 필요가 있을까. 내가 굳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너는 이미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아는데.
나는 말없이 맥주를 입에 머금었다. 씁쓸하면서도 톡 쏘는 느낌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남자의 손이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나는 눈을 내리 깐 채로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입고 있던 원피스 자락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놓고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손길이라...
네가 내 애인이라고 상기시키는 입과 다르게 손은 매우 점잖치 못했다.
나는 남자의 손목을 그러쥐며 슬쩍 밀어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허벅지 위를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뭐가?"
"김남준 전화도 안받겠다... 너도 알거는 안다고 생각하는데."
"..."
"아무 말도 안할게. 너도 나도 서로 입다물면 끝이야."
"글쎄."
"여기 있는 애들 술에 꼴아서 지금 하나도 기억 못한다니까?"
"여기 있는 애들이 문제가 아닌데."
클럽 음악을 뚫고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내게 말을 걸어오던 남자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들어오는 은색 머리카락을 이미 본 이후이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면 굳게 다물린 입과 곧은 눈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맥주 병 입구를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과 다르게 입꼬리가 절로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너였다.
-
"선배."
네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네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분노도, 질투도 없는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무엇이 담길지 몰라서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지금 이 클럽을 나가면 네 얼굴에는 분명 무언가 다른 감정이 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럼 나는 이 클럽을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굳이 그 답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핸드폰 안고장났네요."
내가 원하는 네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시끄러워서 젼화 못받았어."
"음악이 시끄러웠나요?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이 시끄러웠나요?"
"둘 다."
너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그런 네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맥주를 입 안에 머금었다.
내가 병에서 입을 떼자마자 너는 그대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맥주가 조금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맥주는 턱선을 타고 목선까지 흘러내려갔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너 역시도 눈을 감지 않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춘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방금 전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미 멍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저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는 것과 이제 좆됐다 라는 감정의 복합체겠지.
"맥주 맛없어요."
"김이 다 빠졌으니까."
"나가요."
"..."
"김 다 빠졌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눈 앞은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취하긴 취했나보네. 푸스스 웃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네 입가에는 내 입술에 있던 립스틱 자국이 조금 묻어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네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너는 그런 내 손을 바라보다 이빨로 아프지 않게 내 손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것도 없던 네 얼굴 위로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지금 너는 마치 주인을 만난 개마냥 꼬리를 마구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
너는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운전 면허가 없었다. 굳이 운전 뿐만 아니라 너는 손으로 하는 무언가에는 도통 재능이 없었다.
아무리 세기가 낳은 천재라고 하지만 이럴 때는 너도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역시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지는 않는 법이었다.
"오늘은 좀 빨랐네."
"선배가 어제 그랬잖아요. 홍대에 클럽 생겨서 가보고 싶다고."
"내가 그랬나..."
"네."
"용케 기억했네."
망각.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아무리 흠결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잊고 싶은 과거 쯤은 다들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너는 그런 망각 이라는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말들, 옷차림 하나하나까지 모두 기억해내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너였다.
그러니 어제 너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내가 내뱉은 말을 네가 기억해내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한 말인데 네가 기억을 못할 리는 전혀 없었다.
"아까 그 남자가 그러던데 너가 내 연인이래."
"..."
"웃기지?"
나는 아직 네 것이 아닌데 말이야.
나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너는 말없이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건 너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너의 것이 아니었다. 고로 너 역시 나의 것이 아니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네가 메고 있던 안전벨트가 풀렸다. 한 칸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던 네가 어느새 내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방금 전 그 남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은근이 풍겨오는 네 향수 향이 느껴졌다.
너는 손을 내밀어 내 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목선을 쓸어내렸다.
커다란 네 손이 내 목을 점점 죄어왔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숨을 쉬는데 어렵지도 않았다.
너는 그저 내 목을 그러쥔 채로 세게 조여오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아니. 매일 상상해요. 선배를 내 손으로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나만 갖고 싶은 꽃이 있을 때는 꺾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옮겨서 심어야 하는 건가."
"옮겨서 심으면?"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내 정원에 누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있어.
너는 살풋 웃어보이며 내 목을 놓아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내 목선을 쓸어내렸다.
내 목에는 아무런 자욱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너는 내 몸에 그 어떠한 너의 흔적도 남기지 않으니까.
나는 벨트를 메고 시동을 켰다. 엑셀을 밟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어느새 고개를 돌린 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를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너 역시도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
미리 말씀 드릴게요.
17171771의 남주인 남준이와 여주는 절대 상식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랍니다.
이 점은 감안하고 봐주세요.ㅎㅎㅎ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입니다. 절대 이 둘처럼 행동하면 큰 일 나요...
그리고 굳이 두 사람의 관계를 따지자면 여주가 甲인 관계입니다.
알고 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ㅎㅎ 굉장히 성질이 급해요...
그래서 머릿속에 떠오른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간이 있을 때 빨리 썼네요.
1화가 언제 올라온다! 라는 말은 할 수 없겠지만 이번주는 아마 아닐겁니다... 내일부터 진짜 바쁘거든요...
참고로 17171771은 연하와 연애하는 법 을 리뉴얼한 작품입니다. 많은 사랑 주시면 매우 감사할 거 같아요...ㅎㅎㅎㅎ
암호닉은 1화가 올라올 때까지 받겠습니다.
그럼 다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가 조금 더 맞는 표현인 거 같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