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소꿉친구 민윤기를 기록하는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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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가 지난 이 시간에 일기를 쓴다. 이틀 전에는 윤기가 많이 아팠고, 12시가 지났으니 어제 낮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윤기도 바쁜지 내게 더 이상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끝으로 답도 없었다. 덕분에 집에서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고, 조리 실습을 배우고 집에 오니 시간이 11시가 넘었다. 원래도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집은 오늘따라 나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침몰하는 배에 탄 사람의 기분이랄까. 윤기한테 답장이라도 오면 만날까 했는데, 3시쯤에 끊긴 연락에 더 이상 보낼 수가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친구들은 남자친구랑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사실 내게 친구가 많이 없다. 어릴 때는 친구가 없으면 죽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친구를 만났고, 많은 것을 사주고 먹여주고 그랬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그건 친구가 아니라 갑과 을의 관계였음을 깨닫고, 많은 지인들을 정리했다. 그래서 내게 남은 유일한 친구는 민윤기. 다른 친구들은 위에서도 적었듯이 남자친구랑 시간을 보내느라 바쁘다. 그렇게 나한테 소개를 시켜주겠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나는 꿋꿋하게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곧 다가올 봄에 벚꽃이 떨어지는 순간에 운명처럼 들어올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남들이 들으면, 특히 민윤기가 들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등이나 두드려달라는 말을 하겠지? 그래도 뭐, 이건 내 로망인데.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꼭 이룰 예정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멍해질 때쯤, 윤기한테 연락이 왔었다. 친구들과 있는 자리인데, 혹시 올 거냐고. 불편하면 안 와도 된다는 문자 두 개에 장소를 보내라고 답을 했다. 늦은 시간에 술집이면 진한 화장이 어울리겠지만, 윤기 친구들은 내가 몇 명 알고 있다. 윤기의 고등학교 후배 한 명이랑 같은 과 동기랑 있어서 가는 거라서 편하게 갔다. 가벼운 기초화장에 립을 포인트 줬다. 윤기가 제일 싫어하는 화장인데, 나는 이 화장이 너무 좋다. 윤기의 말을 빌리자면 길가는 사람이 입맞춤하고 싶어지는 화장이란다. 거의 도착했다는 문자에 전화가 왔었다. '내려서 왼쪽 보면 큰 카페 있어. 거기로 걸어와. 마중 갈게.' 취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 민윤기, 나쁜 놈. 내가 목소리에 약한 거 잘 알면서 일부러 전화 걸었나 싶었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 택시에서 내려 카페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윤기가 삐딱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 그 화장에 입술까지 내밀면서 오면 누가 뽀뽀라도 해줄 줄 알았냐. 입술 좀 지워. 박지민 환장하겠다.' '지민이?' '어. 지우라니깐, 김여주.' 누가 보면 남자친구라도 되는 줄 알겠다는 내 말에 고개를 돌리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윤기를 따라 손바닥으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가 떼어냈다. 술집에 들어가니 약간은 상기된 열기였으나 꽤 조용한 편이었다. 덕분에 우리 넷은 금세 말을 놓고, 술자리를 즐겁게 가질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 윤기의 대학 동기인 김태형의 짓궂은 장난에 내 볼을 붉어졌다. '윤기형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구였어요? 윤기형이랑 친해지는 거 되게 어려웠는데 신기해요.' '그냥 어릴 때 친해졌어요. 왜요? 윤기가 밖에서도 지랄 맞아요?' 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윤기가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살짝 쥐어박았다. '말 예쁘게 안 하냐. 내가 너 말 예쁘게 한다고, 얘들한테 단어 선택 제대로 해서 대화하라고 시켰는데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윤기의 말에 병아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뻐끔거리자 지민이가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그 표정 윤기형이 되게 많이 말해주던 건데 실제로 보니...' 지민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기가 지민이의 입에 계란말이 하나를 쑤셔 넣었다. 지민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보였으나 금세 넉살 좋게 그걸 받아먹고는 윤기에게 혀를 내보였다. 그렇게 재미있던 술자리가 끝을 향해 갔고, 지민이의 반강제로 태형이는 지민이가 데려다주고 나는 윤기와 가게 되었다. 서로 바쁜 탓에 오랜만에 같이 마신 술 때문인지 우리는 약간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걸어갔다. 늦은 새벽이라 거리에는 가로등 아래 벌레들만이 있었다. 그런 고요한 적막을 깬 건 윤기였다. '아까 낮에 좀 바빴어. 심심했냐.' '심심했으면 뭐, 지금이라도 놀아주게?' '그러려고 그랬지.'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암묵적인 분위기를 유지한 채, 자주 가던 놀이터로 향했다. 맛이 갈 만큼 취한 건 아닌지라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남녀 사이에 과한 술은 아니라는 내 신념과 윤기의 신념 덕분에 술을 사서 가지는 않았다. 대신 윤기가 가방에서 꿀물차 두 개를 꺼내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어렸을 때는 술이란 것도 몰랐는데, 우리가 이렇게 술 마시고 그네에 앉아있네.' '응, 그러게. 신기하다.' '뭐가?' '아까 태형이가 하는 말 듣다가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친구할 수 있었던 거 그거 신기한 것 같아. 너랑 나랑 어릴 때는 매일 붙어 다니다가 고등학생 때는 따로 다니고, 지금 대학생활도 학교만 똑같지 과는 다르잖아. 근데 이렇게 매일 연락하고, 시간 생길 때마다 보니깐. 다 신기해.' 내 말에 윤기는 아무 말 없이 꿀물 차만 들이켰다. 누가 보면 소주라도 마시는 줄 알겠다. 그런 윤기를 보다가 우리는 또 아무 말 없이 그네에 몸을 맡겼다.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는 새벽 공기가 좋았다. 어렸을 때, 윤기가 그랬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하자고. 혹시나 누가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져도 혼자 간직하자고 그랬다. 우리가 다른 친구들처럼 뽀뽀하고 그런 사이가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윤기랑 친구가 하고 싶어서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지금은 윤기랑 사귄다는 건 상상도 안 한다. 사실 못하는 거지만.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약간 쌀쌀해진 공기에 윤기를 바라보는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시선을 돌렸고, 집으로 향했다. 술 마셨으니깐 일어나서 해장 잘하고, 잘 자라는 말을 끝으로 윤기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추신- 연애는 뭘까. [암호닉] 받습니다. 땅위, 찡긋, 설탕물, 달밤, 윤기야메리미, 핑쿠릿, 다솜, 너만보여, 사랑, 쿠크바사삭, 보보, 바다코끼리, 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