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B
- 열아홉 끝자락, 그곳엔 우리가 있었다.
“와, 김탄소 존나 느려 ”
점심시간에도 늦게 나오고 하교 시간도 늦게 나오고. 너 언제 빨리 나올래? 먼저 가지 그랬어? 아우씨, 말하는 뽄새봐. 태형을 향해 눈을 치켜뜨는 것도 잠시 급하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
김태형은 어쩌자고 지민이를 여기 데려 온거야, 안 그래도 아까 일 때문에 어색해 죽겠는데. 속으로 김태형을 잘게 씹으며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어어? 야 김탄소! 같이 가! 저 눈치 없는 자식이 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난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
“아쉽게도 난 여기까지, 나머진 너희 둘이 알아서 가”
뭐야, 김태형 너 집 이 근처 아니잖아. 나 알바- 태형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와 지민이와 단둘이 집에 보내려는 김태형의 속이 뻔히 보였다. 야, 김태형 너 머리 굴리는 거 다 들려.
그런 김태형을 잡으려 하는데 이미 저기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담? 내 옆에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지민이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이 어색한 분위기. 공기가 있는데 없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
“아까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죄책감도 갖지 말고. 넌 정말 몰랐잖아?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지민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눈은 핸드폰을 고정한 채 말을 하다 정말 몰랐잖아? 내게 되물을 때, 내 눈을 쳐다봤다. 지민의 얼굴 위에 떠오른 미소와 눈빛이 대조적이었다.
평소 내가 알던 지민이 모습이 아니었다. 아, 어, 당연하지- 몰랐던 건 사실이니까 급하게 대답을 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어서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챈 건지 지민이 오늘 아빠가 술을 사오라고 했다며 가던 길을 되돌아 가려 했다.
“내일 보자.”
인사를 하는 지민에게 살짝 손을 흔들고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욱신, 사고로 박살나버린, 안에 철심이 잔뜩 박혀있는 내 왼손이 아파왔다. 윤기가 보고 싶었다.
***
“윤기야!”
사고 이후 왼손이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나는 예술고에서 실업계로 전학을 갔다. 윤기는 다행히도 사고에서 두 손은 건질 수 있었다. 운이 좋았지. 여전히 피아노를 치는 윤기의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그 버스 사고만 아니었어도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예술고를 다니는 윤기는 곧 피아노 콩쿨 대회를 나간다고 했다. 윤기 정도의 실력이면 상이란 상을 모조리 휩쓸 텐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윤기와 나는 오후 5시쯤, 지금은 폐건물 예전엔 우리의 아지트였던 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지트를 가면 윤기는 언제부터 왔는지 거기 놓여있는 낡은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내 얼굴에서 티가 난 건지 단번에 내 기분을 알아차리는 윤기였다. 역시- 아지트에 놓인 낡은 소파에 앉아 오늘 윤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을 털어났다.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듯한 윤기의 얼굴에 희로애락이 펼쳐졌다. 실컷 윤기에게 하소연을 하고 속이 좀 가벼워졌다 싶어 윤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옆으로 좀 가봐, 아 여기 좁은데- 말로는 불평을 하지만 내 자리를 비워주는 윤기였다.
“너 곧 피아노 콩쿨이라며. 여기 있어도 돼?”
“난 여기서 더 연주가 잘 돼.”
선생님이 뭐라 말씀 안하셔? 응, 뭐라 안 하시던데- 뭐야.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톡톡 오른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다. 너 언제부터 여기 와있었어? 난 거의 여기 있어. 엥? 너 학교도 안 가? 갔다왔지 학교. 이렇게 빨리?
윤기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내가 이거 연주 해줄게. 윤기가 피아노 악보 화일철을 휙휙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한 곡을 골랐는지 악보를 펄쳐 보이며 악보대 위에 올려 놓았다
♪♬♩♪♬♩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 눈을 감고 감상했다. 예쁘다. 악보가 내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거 무슨 곡이야? 연주가 끝나고 윤기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물었다. 자작곡. 어? 자작곡? 와, 민윤기가 작곡도 할 줄 알아? 이게-
한동안 윤기와 장난을 치다 띠리링, 내 벨 소리가 울렸다. 엄마였다.
“아, 윤기야 나 가봐야 할 것 같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을 했다. 나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지는 윤기의 모습에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아까 그 곡 좋던데. 더 좋은 곡 써줘. 알겠지? 응, 내일 봐. 너 내일 학교 꼭 가라 어? 알겠어-
역시 오늘 학교를 안 가서 이렇게 빨리 온 거였어. 내가 모를 줄 알고? 어깨를 으쓱 거리며 가방을 챙겨들고 아지트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달아오른 내 뺨을 식혀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한 바람이었다.
***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타기엔 그날의 기억이 남아 꺼려졌고 택시를 타기엔 아슬한 금액이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몇 번이고 고민 하던 찰나 저 멀리 남자아이가 걸어왔다.
어? 저거 우리 학교 교복인데… 절뚝 거리며 위태롭게 걸어오던 남자애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가방끈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박지민?”
자신의 배를 감싸 안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지민에게 다가갔다. 야, 너 박지민 맞지? 누군가에게 맞은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지민은 괴로운 듯 끙끙 거렸다.
“뭐야, 너 왜 이래‥”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지민이는 아빠라는 작자에게 맞은 게 분명했다. 태형이, 김태형한테 문자를 보내려는데 날 막은 건 다름 아닌 지민이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지민이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냥 이렇게만 있어줘.”
애원하듯 내 허리를 붙잡은 지민이 눈물을 쏟아냈다.
서럽고, 서럽고, 서럽게.
[암호닉]
땅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