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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그래프꼭짓점 26화 |
"이제 거의 다 마무리되고 있네요."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불났을때만 해도 모든 게 끝난 것만 같았었는데…. 근데 호원아."
민망해진 호원이 얼른 손을 놓으며 바지춤에 손을 벅벅 닦았다. 그 모습에 푸하하 웃은 동우가 이번엔 먼저 호원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호원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동우의 옆모슾을 쳐다봤고, 동우는 여전히 간판이 달릴 자리만 보며 기분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원아."
영화보단 너가 보고 싶었거든.
"어머니 술 잘 하세요? 아, 장모님이라 해야하나."
모든 벽에 와인이 한가득 꽂혀있었고 천장엔 여러 종류의 와인잔들이 샹들리에처럼 빼곡히 매달려있었다. 조금 어두운 듯한 실내는 갈색 조명이 운치있게 빛났고 곳곳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싱싱한 포도들이 디피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없이 혼자 차근차근 와인을 고르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의 가슴이 잠시 두근거렸다.
"이 와인이랑, 이 와인이 좋겠네요."
우현이 집어든 검붉은 와인 두 병을 한번 살펴본 성규가 힐끗 벽장에 붙어있는 가격을 보고는 기겁했다.
"히익! 36만원, 20만원? 미쳤어요? 핸드폰 할부금보다 비싼 와인을 마시자구요?"
성규의 어깨를 감싸고 와인잔을 파는 코너로 향했다. 아직까지도 나무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와인병이 영 찜찜한 성규가 좀 더 싼 가격의 와인을 사자고 설득해봤지만 우현은 묵묵히 와인잔만 골랐다.
"그만 찡찡대고 제대로 좀 골라봐요. 이건 김성규씨한테 선물로 주는거니까."
성규가 심통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댓발 내밀자 검지로 입술을 살짝 툭 친 우현이 어쩔 수 없이 가장 싼 와인잔 3개를 골라 나무 바구니에 넣었다.
"김성규씨는 꼭 수 틀리면 반말쓰네요?"
쫄랑거리는 걸음으로 먼저 와인점을 나서는 성규의 뒷모습에 우현이 기분좋게 웃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
"거의 다 됐어."
도마위에서 가지런히 썬 대파를 보글보글끓는 김치찌개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예쁘게 밥까지 담아내자 근사한 저녁상이 완성됐다. 손을 씻고 온 호원이 동우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안 앉고 뭐해? 배고프지? 얼른 앉아."
와이셔츠 소매를 두어번 걷어올리며 호원이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완성된 김치찌개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 뚜껑을 열자 달큰한 향이 후욱 풍겨져올라온다. 와, 맛있겠다!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한 술을 떠먹은 호원이 환히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주방장갑을 벗어 식탁 한 쪽에 잘 얹어놓은 동우가 쑥쓰러워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때? 정말 괜찮아? 내 입맛엔 맞는데 호원이한테는 맞을 지 모르겠네."
똑같은 밥그릇, 똑같은 수저, 그리고 둘 다 신고 있는 똑같은 모양의 슬리퍼(예전에 성규가 발 시렵다며 사다놓았다)까지. 동우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호원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꼭 신혼같아요."
그 말에 동우가 당황하며 밥만 푹푹 떠먹었고 호원은 연신 '맛있다'하며 밥 두 그릇을 금세 비워냈다.
*
"일어나요, 다 왔어요."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집앞이다. 성규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서류가방을 집어들었다. 차시동을 끄고 와인 케이스를 챙겨 차에서 내린 우현이 잠에 취해 비틀거리는 성규를 얼른 붙잡아챙겼다.
"아무리 졸려도 눈은 뜨고 걸어요."
차분한 갈색머리를 쓰담쓰담한 우현이 성규의 엉덩이를 두어번 툭툭 치며 성규네 대문쪽으로 살짝 밀었다. 지,지금 내 엉덩이 만진거에요?! 성규의 표정은 당황과 놀람에 가득 차있었지만 우현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성규가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뒤이어 닫히는 소리가 나고 그제서야 우현이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재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 이런 행복함이 다시 찾아올 줄이야. 바라기는 커녕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는데…. 성규와 자신은 제법 연애중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드러운 버터냄새와 고소한 밀가루 냄새가 풍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방으로 가보니 순재가 커다란 스뎅에 열심히 반죽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성열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찰지게 치대지는 반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반죽이야?"
코르크 마개를 바닥으로 눕혀 주방 받침대에 얹어놓은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땐 순재가 다 치대진 반죽을 차게 식은 오븐에 넣어두고 있었다.
"휴우, 다 했다. 홍차 마실건데 너도 마실래?"
주방 찬장에서 홍차 티백을 꺼내 티팟에 넣고 끓는 물을 붓자 티백에서 붉은 색이 짙게 우러난다. 찻잔에 우유를 조금 따르고 잘 우러난 홍차물을 적당히 붓는 순재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우현이 말했다.
"순재야."
정말? 순재가 자신의 허리를 여러번 매만졌다. 왜 살이 빠지지. 요즘 쿠키나 초콜릿 만든다고 더 먹었으면 먹었지, 덜 먹는 일은 없는데….
"요즘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여기 홍차. 아,참. 우현아. 나 궁금한 거 있어."
찻잔을 든 우현이 잠시 성규에 대해 생각했다. 성규는….
"일단… 되게 엽기적이야."
뜻밖의 대답에 순재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이는 스물여덟살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다가 말도 안 되는 억지도 가끔 부려. 그리고 연애에 환상이 많은 사람이야. 이쁘냐고? 음… 내 눈엔 이쁜데 본인은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순재가 조금 놀란 눈치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현이 저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했었나? 순재의 표정을 눈치챈 우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이 뭐가 좋냐는 눈치인데?"
행복해. 마지막 우현의 말에 순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너한테 딱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소개시켜줄까?"
우현이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성규가 자신의 목을 조르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하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응. 다음주에 소개시켜줄게."
성규와의 관계를 순재와 성열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싶지않았다. 그리고 둘 다 잘 이해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봉신 씨는 두 아들들을 깨워 장에 다녀왔다. 삼겹살 거리와 싱싱한 나물과 해산물까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없다고 성규가 말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다시 침대로 향하는 두 아들의 뒷덜미를 질질 잡아챈 봉신 씨는 성규에겐 나물 손질을, 그리고 명수에겐 마당 청소를 시켰다. 주방 찬장을 열고 안 쓰던 새 그릇까지 꺼내는 봉신 씨의 모습에 거실에 앉아 졸린 눈으로 연신 숙주나물을 다듬던 성규가 오버한다며 혀를 찼다. 한참 나물을 다듬는데 문득 우현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뭘 쪼개."
빗자루를 들고 마루에 서있던 명수가 창문을 통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나물을 다듬다 혼자 실실 웃는 성규를 보며 말했다.
"신경끄셔. 마당 다 쓸었냐?"
힐끗 명수를 올려다본 성규가 칼 끝을 명수쪽으로 휙 디밀며 '정말 내가 해?'하고 묻자 명수가 얼른 걸레를 집어들고 마당 수돗가로 향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해물탕 준비는 다 끝냈고. 잡채랑 전도 좀 부쳐야하는데 어머, 벌써 2시네? 어쩜 좋아."
저녁 초대는 6시에 해놓은 상태라 아직 4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봉신 씨는 호들갑을 떨며 전을 부칠 준비를 했다. 성규는 손질을 다 마친 나물 바구니를 식탁에 턱 얹어놓고 명수가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캬아, 날씨 죽이네."
9월 중순. 가을치고는 꽤 더운 날씨에 긴 소매를 접어올린 성규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평상을 박박 닦고 있는 명수에게 향했다.
"옳지 내 동생. 잘 하네."
성규, 마당 구석에 놓인 커다란 바베큐 그릴을 두 손으로 간신히 들어올려 수돗가로 옮긴다. 기름때와 숯때를 씻어내자 금세 새 그릴처럼 반짝반짝해졌다. 평상을 다 닦은 명수가 손가락을 접어 인원수를 셌다. 나,형,엄마,팀장형님,성열이,성열이네누나. 흠, 여섯명이면 충분하겠네. 조금 삐뚤어져있는 평상을 곧게 맞춰놓고 걸레를 수돗가로 홱 집어던진 명수는 집안으로 쏙 들어갔고 뒤이어 손에 묻은 숯때를 닦은 성규도 얼른 집안으로 들어갔다.
인생그래프꼭짓점
"조금 더 옆으로요! 네, 거기!"
드디어 '장동牛 고깃집'의 간판이 달렸다. 연락하지않았는데도 알바생인 영민이와 은정이가 일찍부터 나와 가게 정리를 도왔다. 두 대의 탑차로 배달되어온 새 냉장고와 주방 시설의 시트지를 벗겨내고 가게 로고가 새겨진 테이블과 메뉴판, 앞치마를 정리하는 등, 세 명이서 하기엔 조금 빠듯했지만 나름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이에요?"
은정이 화사하게 웃으며 테이블을 닦고 그 위에 수저통과 냅킨통을 얹어놓았다. 그래. 더 대박나야지. 밝게 웃은 동우가 커다란 선반을 끙끙거리며 들고 옮기려할때, 누군가가 그 선반을 휙 빼앗아들었다.
"나한테 미리 전화하지. 그럼 와서 도와줬을 거 아니에요."
호원이 커다란 선반을 번쩍 들어 옮겼다. 호원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은정과 영민도 얼른 꾸벅 인사를 한다.
"다들 배고프죠?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뭐든지."
그 말에 영민과 은정이 '정말요?'하며 치킨을 운운했다. 치킨이라는 말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든 호원이 곧바로 치킨 2마리를 주문하자 동우가 먼저 '계산은 내가 할게!'하고 말했다.
"내가 할게요, 형. 형은 좀 쉬세요."
동우의 노란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는 호원의 손길에 은정과 영민이 그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둘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야, 영민아. 원래 남자들끼리 머리 쓰다듬으면서 웃고 그러냐?"
오븐을 열고 알맞게 구워진 반죽을 꺼냈다. 첫번째 시트에 얇게 썬 딸기를 얹고 붓으로 시럽을 촉촉히 바른 뒤 다시 시트를 얹어 분홍 생크림을 전체적으로 곱게 펴바른다. 그리고 장식으로 딸기를 얹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40분. 직접 만든 상자에 케이크를 넣은 순재가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며 성열의 방으로 향했다.
"옷 다 입었어?"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늘색 체크남방을 입은 성열이 어색하게 웃으며 거실로 나가려는걸 순재가 '잠깐만'하며 성열을 불러세웠다.
"너 주머니가 왜 그렇게 불룩해?"
성열은 흠칫 놀라며 뒷주머니가 안 보이게 손으로 가렸다. 뭐야, 뭔데 그래? 순재가 힐끗 뒷주머니를 확인하려고하자 재빠르게 몸을 피한 성열이 '아,아무것도 아냐!'하며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뭔데 저러지?
"준비 다 했어?"
우현의 방문이 열리고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깔끔한 차림의 우현이 와인 케이스를 들고 나왔다.
"옷만 갈아입으면 돼. 성열이 마당에 나갔으니까 가봐."
와인케이스와 와인잔 케이스를 든 우현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왔다. 성규네에서 톡 쏘는 숯불향이 넘실넘실 이 쪽 마당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여기 집에서 만든 케잌인데요, 설탕을 조금 덜 넣어서 맛있을지 모르겠네요."
봉신 씨가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며 우현과 순재,그리고 성열을 평상으로 안내했다. 성열이 제일 먼저 평상 위로 올라가 명수의 앞자리에 얼른 엉덩이를 붙히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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