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을 수놓은 수억개의 별을 다 헤아려도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은 밤이 있다.
밤이 선사하는 어둠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 한치 앞도 들여다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 탓에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의식 어딘가를 깊이 관통해오는 누군가의 손길 하나에 자꾸만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밤의 찬 기운과 달빛을 배경삼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직면한다.
열아홉의 순정, 청춘 따위의 모든 뉘앙스를 잃어버린 무채색의 소녀를 직면한다.
거울을 통해 드러나는 눈빛이 몸서리치도록 표독스러워 눈을 가린 채 주저앉아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 어떤 소리도, 그 어떤 장면도 내게 가까워지지 못하게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감으며 내가 아는 가장 순결한 것을 생각한다.
참으로 불쌍한 버릇이 생겼다.
현실의 역겨움이 내 폐부를 뚫고 들어올 때마다 김동영을 생각하는,
그런 불쌍한 버릇이 생겼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지한 순수를 가득하니 담고 있는 그 옅은 눈동자에 몸을 적시다, 내게 다정함을 쏟아부어주겠다는 약속으로 부푼 동그란 입술에 내 입술을 가만히 부비며 나의 모든 죄악과 악랄함이 씻겨나가는 성스러움에 취해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다보면, 여지껏 상상만 하던 구원에 다다른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부스스한 차림새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들이켰다. 목울대를 타고 흐르는 냉기에 몸을 가만히 떨다 시선이 향한대로 굳게 닫힌 태용의 방을 한참동안이나 응시했다. 지금 그의 방으로 향하는 건 위험한 짓일까. 느리게 걸음을 걸으며 얼음을 머금은 양 차가웠던 물이 따뜻해질 때까지 입안에서 굴리다 삼켜낸다. 달이 저문 새벽의 끝자락은 태용에게도 꽤나 늦은 시각이었는지, 좀처럼 잠에 쉽게 들지 않는 그조차 넓직한 침대 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옅은 숨을 몰아쉰다. 제 몸을 감싼 이불을 걷어내고 옆에 웅크리고 누울 때까지도 태용은 미동도 없이 무의식을 헤메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들썩이는 그의 가슴팍을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지다 이내 그의 귓가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마. 잠도 안오는데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온거야." 그러니까 나 어떻게 해보려고, 막 그러지 말라고. 분명 잠에 든건 맞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그의 얼굴 가까이에 내 얼굴을 맞대어 표정을 살핀다. 그의 풍성한 속눈썹이 새벽녘의 푸르른 섬광에 비추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습이 문득,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켜 경외감이 깃든 한숨을 내쉰다. 신기해, 참. 그렇게나 날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가며 사랑을 갈구할 때의 네 눈매는 너무 시려서 고통스러울 정돈데, 이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걸 보자니 너무 무방비해 보여서 웃음까지 나오는걸. 태용의 감은 눈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손가락 끝을 세워 그의 입술 외곽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 차라리 그 입술로 날 물어뜯지 말고 보듬어주지. 그랬더라면 외로움과 허탈함에 가득 찬 내 껍데기를 네가 채워줬을지 누가 알아? 목 아래에서부터 뜨겁게 차오르는 원망감에 태용의 목을 두 손으로 그러쥐며 눈을 감는다. 네 방에서 잠이 들 때면 넌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내 목을 연신 움켜쥐었다 놓아주곤 했었지. 그때마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사실 난 매 순간 깨어 있었어. 대답해봐.
왜 내 목을 졸랐어? 날 죽이고 싶어? 아니면 정말로,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악에 받친 내 상념이 끝나기도 전에 태용은 시간의 흐름보다 더 빠른 손놀림으로 내 두 손을 단번에 한 손으로 제압한 채 몸을 굴려 제 몸이 내 위로 올라오게 한 뒤 어깨를 아래서부터 짓누른다.
"나처럼 적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세상 모르게 잘 거란 착각은 진작에 접었어야지, 공주님."
잠에서 방금 깨어 평소보다 더 짙어진 눈꺼풀을 한 태용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맹렬히 타오른다. 여전히 옴짝달싹도 못하게 내 어깨를 단단히 쥔 태용이 제 목을 한손으로 느리게 쓸어낸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는 그 누구의 숨통도 끊어놓을 수 없어." 태연한 목소리의 태용이 손을 느리게 들어올리더니 이내 맹수의 몸짓으로 목 언저리의 여린 살을 쥔 채 손에 힘을 가한다. 순식간에 막혀오는 기도에 헉, 소리를 내다 터져나오는 기침을 애써 삼켜내며 눈을 감는다.
그래, 차라리 날 죽여줘.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갈등 속에서 나를 구원해줘.
"대체 요즘 우리 공주님에게 무슨 이변이 생긴걸까." 손에서 힘을 온연히 푸른 채 쓰러지듯 맥없이 내 품 안에 안기며 태용이 제 머리칼을 쇄골 위로 부빈다. 처연히 목을 끌어안은 손 마디를 세우며 경직된 나의 등 뒤를 따라 선을 그리는 행동을 이어가던 태용이 이내 눈을 감고 스치듯 속삭인다.
"네가 사랑할 수 있게 허락된 사람은 오직 나 뿐이야."
그렇다면 제발, 내가 그 애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이 미칠듯한 감정의 온기를 잠재워줘.
제발 이게 사랑이 아니게 해줘.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
"간만에 밤 중에 조용하길래 아무일도 없는 줄 알았건만, 이게 뭐야 도대체."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재현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며 체육창고로 향한다. "앉아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푸른빛의 매트더미 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재현이 얼른 앉으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재촉해온다. 어쩔 수 없이 못이기는 척 매트 위에 앉아 걱정으로 겹겹이 싸여 두터워진 재현의 시선을 우스갯소리로 넘기려든다. "폭풍전야 몰라? 원래 조용할 때 더 걱정해야 하는거야." 내 말에 한숨을 쉬고선 고개를 내저어보이는 재현이 가방에서 검은색 목티를 꺼내든다. "뭐야. 그런것까지 가방에 넣어다녀?" 혀를 차며 감탄하는 모습에 재현은 목티를 던져주며 창고의 습기 탓에 눅눅하게 가라앉은 제 머리를 탈탈 털어낸다. "당연하지. 이거 김여주 전용 구급상자잖아. 허구한 날 목에 그런거 말고도 뭐 많이 달고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재현의 말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동그란 붉은 자국들에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몰라, 그런거. 공연히 모르는 척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내 모습을 한심스레 내려다보던 재현이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는 듯 손짓을 해보이며 내게서 등을 돌린다. 새하얗게 세탁된 교복 와이셔츠 너머로 붉은 상처들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며 조금은 헐렁하게 떨어지는 목티의 끝부분을 잡아뜯는다. "나 궁금한거 하나 물어봐도 돼?" 입안에서 꽤나 오랫동안 굴리다 뱉은 말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뭔데, 물어봐봐. 대답과 함께 몸을 내쪽으로 돌리려는 듯 움직이는 재현의 모습에 성급히 말을 던진다. "뒤돌아보지마. 아직 옷 다 안 갈아입었어." 빨리 좀 입어라. 그거 하나 입는데 무슨...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며 재현이 다시 등을 돌린다. "만약에 내가 이태용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 넌 어떨 것 같아?" 내 물음에 재현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게 눈에 여실히 드러난다. 나의 물음이 공기를 관통한 그 순간, 네 낯빛은 어땠을까. 불안정하게 떨리는 그 위태로운 감정이 네 얼굴 위로 드러나는 꼴을 볼 수 없어 비겁하게도 네가 등을 돌린 그 순간을 노려 이야기하는 내 이기심을 욕하지 않았으면.
"진심이야?"
재현의 아슬아슬한 물음 사이로 나의 대답이 희미하게 흩날린다.
"진심이야."
힘없이 고개를 땅을 향해 꺾으며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고개 들어." 단호한 재현의 명령조에 고개를 살짝 들어 그 경멸의 눈초리를 받아낼 각오를 한다. 그래, 어서 날 욕해. 무슨 비난이든 간에 다 받아낼 준비가 되어있어-
"이해할꺼야. 그리고 딱 한번만 눈감아줄꺼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뜬 채 재현을 올려다본다. "딱 한번만 모른척 할꺼야."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너답지 않게. 다시 원래의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재현이 긴장감에 잔뜩 움츠러든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친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내 손목을 잡아채며 평소보다 더 과장되게 활발한 모습으로 창고를 나가려는 재현의 뒤로 일전부터 머릿속을 헤엄치던 의문을 토해낸다.
"왜 하필, 딱 한번만이야?"
나의 물음에 잠시 걷는 걸 멈춘 채 문고리를 잡은 모습 그대로 한동안 서있던 재현이 제 머리칼을 성글게 털어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너 보스 밑으로 들어온 뒤로 한번도 진심으로 행복해서 웃어본 적 없잖아.
진심으로 행복할 때 너 웃는 모습, 딱 한번만 보면 미련 없겠다 싶어서."
재현의 입가에 걸린 빳빳한 미소가 유하게 풀어지며 이내 그의 눈이 살갑게 휘어진다.
단 한번도 재현이 그렇게 해사하게 웃는 걸 본적이 없다.
내가 저를 몰래 보고있는 줄도 모르고 홀로 음악실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벅차도록 경이로운 선율을 손끝으로 만들어내던 그 때를 마지막으로.
"여주야!"
운동장 끄트머리에서부터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뛰어오는 김동영의 주위로 공기가 부드럽게 굽이친다. 언제부터인가, 김동영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목 아래에서부터 뜨겁게 무언가 달아오르는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꽤나 야무지게 내달렸던건지, 어느샌가 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김동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면 무언가 숨기고 싶은 감정을 무심코 내뱉고 말까 두려운 마음에, 그렇게 한참이나 햇살 아래에 빛을 머금은 동영의 모습을 잔상이 남을 때까지 시야에 담았다. "애들이랑 같이 축구하지, 왜 여기까지 왔어." 속도 없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뻥뻥 차기에 열중한 재현의 모습에 한심한 눈길을 보내며 동영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여주 심심하잖아. 재현이 경기 끝날 때까지 같이 있어줄께." 결심에 찬 모습으로 당당히 말하는 동영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재현의 이름을 말할 때 니은 발음을 뭉근히 뭉개며 발음하는 꼴이, 퍽 귀엽다. "맘대로 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방이라도 꽃이 만개할 것만 같은 낯으로 바싹 당겨 내 옆에 앉은 동영이 가만히 위를 쳐다보다 허공을 향해 제 손을 펼친다. 뭐해? 내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않은 채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동영이 이내 무언가를 잡아채는 듯한 손동작을 해보인다.
"봐, 예쁘지."
해사하게 웃으며 동영이 내게 손을 펴보임과 동시에 녀석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인 분홍빛 벚꽃잎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고운 선을 그대로 드러내며 곱게 펼쳐진 흰 손, 그 위에 봄날의 추억을 회상하 듯 예쁜 분홍빛으로 물든 작은 벚꽃잎. 그 모든 가슴뛰는 것들 너머로 시야를 가득 채우는 벚꽃잎의 색을 한 네 말간 얼굴.
너와, 나.
둘만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달큰하게 달아오른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찾아온다고 했다.
내 침체된 일상 속 갑작스레 온화한 봄바람을 일으키며
부드러이,
네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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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좀 길어서 읽으실 때 더딘 감이 없잖아 있으실 듯 싶네요... 이게 다 분량조절을 못한 저의 탓...ㅁ7ㅁ8 이번 회차인 느와르 7화를 기점으로 앞으로는 독자님들 눈에 띌 만큼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전개가 급하게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7화 분량이 어마어마한 이유...) 끊어서 올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독자님들의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탓에... 그냥 한번에 업로드 했습니다!
암호닉은 10화 쯤에서 마감할 생각입니다!
항상 느와르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