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파의 증거
W.청설
4-1
너 아직 사랑하는구나
그놈이 그놈이 그렇게
아직도 목구멍 안 쪽에 늘러 붙어
아직도 그놈의 그놈의
이야기를
응.
너 아직
덜 잊었구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4-2
느즈막한 오후였다. 엄마와 아빠는 데이트를 즐긴다며 아침부터 나갔고 외동인 탄소는 할 일 없이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 다였다. 고립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런 의도치 않게 찾아오는 외로움은 반갑지 않았다. 외면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외면하고 싶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추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냈다. 잠금을 풀어 카톡에 들어가자 옥탑에 세들어 사는 대학생 오빠가 그 카톡의 주인공이었다.
공주 뭐하나? 오후 3시 09분
그냥 집에 있어요.
오후 3시 10분 왜요?
1이 사라진지 얼마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그럼 오늘 공주는 오빠랑 놀까? 또 시작이네. 분명 자기가 심심해서 부르는 것일테다. 물론 집에 혼자 있다 다치거나, 혹은 다른 부수적인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걱정하는 엄마의 부탁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닮은 이모티콘 여러 개를 보내온 카톡을 보며 피식 웃고는 입고 있던 후드집업의 지퍼를 잠궜다. 나이차도 얼마 안 나면서 생색은 더럽게 잘 낸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슬리퍼를 직직 끌며 몸을 틀었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철문을 열었다. 턱이 높은 계단이 눈 앞에서 아찔하게 느껴졌다. 고꾸라지지 않으려 옆의 난간을 짚었다.
"왔어?"
갈색의 철문에 체중을 실어 밀자, 문 바로 앞에서 윤기가 귀를 막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 그는 철문의 소리가 너무 소름이 끼친다며 팔을 문지를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외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끔 탄소를 부러워할 때도 있었다. 소리가 안 들리면 불편하겠지만서도, 이 각박한 세상은 좋은 소리보다 싫은 소리가 더 많다며. 차라리 귀를 닫느니만 못하다며. 그럴 때마다 탄소는 고개를 저었다. 옥탑은 그의 성적만큼이나 단촐했다. 클리셰 넘치는 평상과 그 옆으로 작은 화분들이, 그리고 그 앞에는 다시 흰색의 단단한 문을 시작으로 집이 얹혀 있었다. 종종 화분들에서 자란 방울토마토나 상추 따위는 탄소의 집으로 오기도 했다. 그것이 영 부족해 가끔 윤기 몰래 훔쳐먹을 때도 있었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였다. 후드집업을 반쯤 벗으며 평상에 앉아 윤기를 쳐다봤다. 뭐할거예요? 라는 무음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기만 하는 그도 탄소 옆으로 와 앉았다. 딱히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이 없는 것을 보니 엄마의 걱정으로 나를 부른 모양이었다. 인생 상담이라도 해줄까. 그의 입모양은 또박또박 움직여 읽기 수월했다.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날이면 내가 헐벗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날카롭고 여린 곳을 잘 후벼팠다. 괜찮아요. 그렇게 답했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는 머리칼처럼 탄소의 기분도 일렁였다.
04. 동정[同情]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4-3
월세로 이곳에 들어살고부터 수화 영상을 틈틈히 보며 익히던 윤기가 어제 외운 수화라며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는 잠에 들려는 듯 눈이 미세히 떨리면서도 얌전히 감겨있는 탄소를 일으켜 세워 제 쪽으로 돌려 앉혔다. 비몽사몽한 손으로 후드집업 모자를 벗었다. 그는 무엇이 되었던 간에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수화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탄소는 그를 타박하기 바빴다. 안 그래도 충분히 그의 입모양에서 배려 받는 까닭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고마운 이질적 감정이 탄소를 지배했다.
"그런 걸 왜 해요."
"일단 봐봐."
그는 탄소의 말투가 어눌하다는 것을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군더더기 없는 발음이라 그럴지 몰라도.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 탄소의 말은 깔끔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잘 분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후천적 장애라 그런 듯 싶었다.
윤기는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는 아이를 타이르더니 이내 버벅거리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흰 손이 햇빛을 받아 곧이라도 부서질 듯 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손이 길고 예쁘다. 남준도 수화를 배우면 이런 느낌이 날까. 아냐, 오히려 더 뻣뻣할지도 모른다.
"잘하지? 어?"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 유순했다. 네, 잘해요. 원하는 답이 나오자 입동굴을 자랑하던 윤기가 다시 평상 위로 뻗었다. 그래, 제 앞의 사람은 이런 이유로 엄마에게 두둑한 신임을 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외동으로 길러짐과 동시에 해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엄마의 치마폭에 갇힌 탄소를 꺼내준 것도, 학교를 제외한 모든 장소에는 잘 나가지 못하는 탄소를 외출시킨 것도 다 다름아닌 윤기였으니. 오죽하면 아빠는 나중에 정 결혼 할 사람이 없다면 윤기도 생각해 보라는 농담도 종종 날리곤 했다.
진짜 고민 없어? 수화는 버거운지 평상에 누워 하늘만 쳐다보던 윤기가 탄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의 입이 이내 다물어졌다. 한숨을 쉰 탄소가 고개를 젖혔다. 맑은 하늘색 사이로 구름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목이 메었다. 뜨거움을 삼키려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아래로 당겼다. 시야가 가려지자 찾아오는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나만 남았다. 그렇게 새학기 전 날 기도를 올렸을 때도 오지 않던 적막이. 이럴 때 찾아왔다. 거부할 수도 없게. 감정이 목구멍을 치며 올라왔다. 어지럽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 했을까. 옷깃을 잡아당기던 손길이 사라졌다. 아마 답을 기다리고 있을테다. 말을 할 수 있을 기분으로 추슬릴 때까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자랑 영화를 보러 가요."
"근데 무서워요. 날 동정할까봐."
"내가 소리를 못 듣는 걸 몰라요."
입술을 물고 있는 잇새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꾹꾹 눌러 부피를 줄였던 슬픔이 제 본질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퍼져 나갔다. 눈 앞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닦으면 닦을수록 눈가가 따가웠으나 멈출 수 없었다. 오랜만에 틀어진 수도꼭지가 세게 물줄기를 뿜었다. 아, 정말로. 나는. 좀처럼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사회적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이성이 닳고 닳아 감정만 남은 그런 사람. 그것이 탄소가 정의하는 자신이었다.
4-4
한 시간을 넘기고 울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여주며 윤기가 말했다. 그렇게 울면 머리 안 아프냐? 그의 말마따나 띵한 머리에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는지 낮의 더웠던 바람이 식어 저녁의 바람이 불었다. 훌쩍거림이 멎었다. 따가운 목구멍을 찬 물로 식혔다. 등을 토닥이던 손이 머리를 헝클인다. 휴대폰 액정이 알람으로 깜박이다 다시 꺼졌다.
"그래도 공주는 보러 갈거잖아, 아니야?"
"몰라요."
남준과 약속한 날짜가 바로 다다음 날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려면 지금이라도 연락을 취해야 한다. 남준의 실망한 표정이 눈 앞에 선했다. 탄소는 그것을 외면할 정도로 매정한 성격이 못 되었다. 지금도 영화가 기대된다며 자꾸만 오는 연락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되지 못한다. 윤기는 가만 주머니를 뒤적이다 탄소를 흘끗 쳐다보고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낸다. 후각까지 괴롭힐 순 없다,가 이유였다. 손은 무릎을 두들기다 그의 머리를 매만지기를 반복했다. 정신 사납다. 주름진 미간을 도로 폈다. 가기 싫어? 윤기의 질문이 다시 머리를 헤집었다. 가기 싫어? 탄소는 저에게 물었다. 아니. 자신이 내린 답을 쉽사리 뱉을 수 없었다. 공주야, 윤기가 장난스레 뒷목을 잡았다.
"그 남준인지 뭔지가 그렇게 좋아?"
그래? 되물어오는 윤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또 시작이다. 날카로운 곳이 예상치도 못한 곳을 파고들었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질문은 머리를 울렸다. 뒷목을 주무르던 손이 내려졌다. 어느 샌가 장초를 입에 문 그는 라이터만 만지작거렸다. 아마, 탄소가 내려가면 바로 뻑뻑 골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탄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되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네. 입 안을 돌기만 하는 대답을 삼켰다. 기지개를 켠 윤기가 담배를 빼 중지와 검지 사이에 걸쳤다. 라이터는 반대 손에 있었다. 갈색의 필터에 입술 자국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좋으면, 가야 해요?"
"가야지."
"…."
"가서 걔가 널 동정하면, 그거 밖에 안되는 새낀거지. 뭔 말인지 알지?"
반쯤 내렸던 지퍼를 올리며 모자를 뒤집어 썼다. 네, 알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하는 말이었다. 평상에서 일어난 그가 터덜터덜 걸어 갈색의 문고리를 잡았다. 한쪽 귀를 막고서. 그냥 들어가라는 말에도 공주를 혼자 보낼 순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다. 도대체 저 '공주'라는 호칭은 언제가 되어야 익숙해질런지. 그럼에도 주책스럽게 올라가려는 입가를 겨우 내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남준의 연락이 쌓여 뜨거웠다. 갈게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문을 어깨로 밀었다. 뻑뻑한 것을 보니 슬슬 기름칠을 해야할 것 같다. 노란 등이 탄소의 움직임에 희미하게 켜졌다. 계단을 내려가며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 한 윤기가 하품을 쩍, 해보인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서 문을 반쯤 닫는다. 이제 저 닫은 문 사이에선 회색의 연기가 흘러나올 것이다. 괜히 알싸해지는 코를 막으며 열어 놓고 올라왔던 철문을 단단히 닫았다.
사담입니다. |
오늘 글은 갱쟝히 두서가 없네요.끊는 것도 음... 사실 옥탑방에 사는 대학생은 누구로 할지 고민이 많았었어요. 석진이를 할지 윤기를 할지 결정이 어려워서 독방에 물었었는데 압도적으로 윤기가 많더군요. 허허. 하지만 윤기와의 삼각구도는 없어요. 남준이랑 엮이기도 힘들다구욧...흡 아무쪼록 좋은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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