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ERADO
02
자, 시작해. 이 회의는 지훈이 불시에 소집하는 것으로, 각 영역마다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즉, 중간 점검이라고 하면 되겠다. 언제, 어떻게 지훈이 부를지 모르기에 간부들은 제 영역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 회의에서 아무 말도 못한다는 건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지훈이 말을 하자마자 왼쪽 세 번째 자리에 앉아있던 세운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APEX에 잠임해있던 스파이 본거지가 모두 소탕당했습니다."
…뭐? 처음부터 좋지 못한 소식에 지훈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다.
"APEX에 잠임해있던 3개의 본거지 중 마지막 하나가 불과 몇 분 전에 소탕, 모두 사살당했습니다."
"…이 멍청한 새끼들."
"그래도 마냥 손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그간 '그'가 보내온 1차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조사하여, APEX 주요 인물들의 프로필을 정리해봤습니다."
세운이 리모컨으로 프로젝트를 틀자 미리 준비해둔 파일이 화면에 뜨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진부터 시작해서 이름, 생년월일, 포지션, 그리고 특이사항 등 빼곡히도 적혀 있는 정보에 선호는 엄지를 치켜들며 말한다. 오오, W 짱 멋있다! 라고.
"여기서 제일 주의해야 할 인물은 바로…."
세운이 레이저로 어떤 이를 탁, 지목했다.
"K, 강다니엘입니다."
"…강다니엘?"
"네. 보시다시피 I 군사 학교 수석으로 이번 스파이 본거지를 소탕하는 데에도 빠짐없이 참여한 인물입니다. CCTV로 그의 행동이나 공격 패턴을 파악한 결과, 굉장히 민첩하고 빠른 공격으로 상대를 처리를 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다소 허술한 면이 없지 않아 있어 그 틈을 공략한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음…."
"그리고 다음은 APEX의 힐러, S입니다."
헐…? 나 저 사람 아는데? 세운이 두 번째로 여주를& 지목하자 형섭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nbsp;여주는의 제가 I 료 기관 당시에 있었을 때 지나가다 몇 번씩 본 사람이었다. 형섭은 여주를.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B등급에서 아등바등하며 겨우 버티고 있을 때 여주는등 항상 A급, 그것도….
"S는 I 의료 기관 차석으로, 김종현의 '최측근'입니다."
수석인 종현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었으니까. 지나가다 몇 번 본 게 끝이었지만 여주는. 자신의 우상이었다 일단 이 험난한 세상에서 웬만한 남자들을 제치고 그 자리에 있을 만큼 여주는 굉장히 당차고, 또 똑부러지는 성격으로 이곳에서 평판이 자자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너무 천재적인 종현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수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다고. 형섭은 그런 그녀가 참 부러웠다. 자신은 피도 제대로 못 보고 벌벌 떨기에 바빴으니까, 언제나 답답한 캐릭터였으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배울 점이 참 많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역시 APEX에 있었구나. 종현이 그쪽에 있었으니 저쪽에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 아,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도 APEX에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살고 있진 않을 텐데…. 형섭이 혼자서 시무룩해하고 있을 때, 세운의 말을 들은 지훈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굳어져갔다.
"…최측근?"
"네. 김종현과 황민현, 그 둘과 굉장히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한 번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종현. 아직도 그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그런데 그의 최측근이라…. 갑자기 지끈대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진영이 괜찮냐며 옆에서 물어왔다. 참 귀신같이도 알아채지, 너는. 내 기분을.
"…괜찮아."
미약하게나마 웃어 보이며 지훈은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진영이 자신을 걱정할 게 뻔했으니까, 그것도 무척이나.
"다음."
세운의 차례가 끝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선호가 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지금 굉장히 어마무시한 약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꽤 자신 있나 봐? 지훈의 말에 선호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형섭은 선호가 저렇게 자신 있을 때마다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자신은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아, 망했다. 난 뭐라고 하지…? 형섭이 혼자 초조해하고 있을 때, 선호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주머니에서 어떤 액체가 담긴 조그마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어 보였다. 색깔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검붉은색이었다.
"일단 이건 샘플인데 아직 미완성본이라 정확히 어떤 용도로, 어떤 효과를 내는지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난 확신할 수 있습니다."
"……."
"APEX에게 아주 심각한 치명타를 입히는, 그런 약이라는걸요."
……그래, 유선호는 믿을만하지. 저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며 지훈은 다시금 떠올렸다. 제가 선호를 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ZENITH의 간부를 뽑을 때 프로필을 하나하나 훑던 지훈은 마땅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빠르게 그것들을 넘기다가 선호의 프로필을 보고는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Ⅻ의 의료 기관 수석, 이것만으로도 제 관심을 끌었지만 확실하게 제 이목을 끌었던 그의 특이사항.
힐러임에도 불구하고 오백여 명의 사람들을 살해.
"다음, A는?"
"…네?"
결국 우려하던 현실이 오고야 말았다. …어떡하지, 나 뭐라고 얘기해야 돼? 선호와 같이 약을 개발하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뭘 해야 될지도 몰랐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치료해줬다고 하기엔 자신이 너무 미안할 정도로 못해줘서 나머지 뒤처리를 한 것도 선호였다. 결론은 자신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였다. 여태까진 어떻게든 뻘소리를 해대며 버텨왔지만 이번에는 정말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형섭을 매섭게 노려보던 진영이 말했다.
"…지금 뭐 했냐는 말 안 들려?"
저… 그게…. 형섭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제 바짓자락만 꽉 쥐었다. 나 진짜 여기 왜 있는 거야. 나 보스한테 미운 털이라도 박힌 걸까? 대충 들어본 것에 의하면 유선호를 비롯해 다들 각 나라에서 못해도 A등급에 있었던 것 같은데, B등급에도 간신히 있던 내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이제는 억울한 마음이 더 커져 형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자. 이렇게 회의를 할 때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또 별 쓸모도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냥 속 시원하게 얘기하자. 도저히 못하겠다고. 자신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진짜 인생에서 제일 잘못한 게 있다면 멋모르고 사람들에게 밀려 ZENITH의 이동 수단에 올라탄 것이겠지. 애초에 여기 올 생각이 하나도 없었는데….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쉰 형섭은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다음."
……어? 제가 무슨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지훈은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야, 이게 끝이야…?
"일주일 전, 탈출을 시도하려고 한 반역자들을 잡았습니다."
아… 그 새끼들. 간혹 이 세계의 룰을 견디지 못하고 APEX 쪽으로 탈출을 하려는 군사들이 몇 있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쪽에 남아있을 것이지, 대체 여긴 뭣하러 온 건지. 지훈이 계속 말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진은 말을 이어갔다.
"반역자는 Ⅶ B등급 2명, Ⅺ C등급 3명, 총 5명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다가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 나머지 2명은 생포를 해온 상태입니다."
"L이랑 B랑 같이?"
"네."
"고생 많았네."
우진과 함께 고생했을 진영과 관린에게 지훈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보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은 지훈에게 저렇게 칭찬을 받을 때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에게 더 충성을 하는 것일 수도.
"그래. 다들 그동안 수고 많았다."
그럼 해산. 지훈이 해산을 명하고, 드디어 이 소름 끼치도록 숨 막히는 시간이 끝났다는 것에 형섭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얼른 방으로 뛰어가야지. 오늘은 방에서 절대 안 나올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빠르게 의자를 집어넣으며 회의실을 나가려던 형섭은,
"A. 잠깐 나 좀 볼까?"
……아. 지훈의 말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
"……."
터벅터벅. 지훈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던 형섭은 머릿속에 들던 별의별 생각에 미칠 지경이었다. 지훈이 자신을 이렇게 따로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나만 따로 부르는 걸까. 아까 회의 때 아무 말도 못해버린,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그러는 걸까? 그런데 그 책임을 어떻게….
…아, 설마 지금 나를 죽이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제일 최악의 생각에 다다르자 형섭은 아까 지훈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아까 그렇게 넘겼던 거구나. 어차피 나는 살려 둘 가치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극도로 불안해진 형섭은 손톱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힐끔 그를 쳐다보지만, 굳건한 그의 뒷모습에선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나 죽기 싫은데…!
끼이익-. 지훈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 창고였다. 장소까지 확인하니 형섭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더욱 확실해진 것만 같아 그곳에 들어간다면 얼른 무릎을 꿇고 지훈에게 싹싹 빌 생각이었다.
그런데,
"……!!!"
형섭은 창고 안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안에는 어떤 남자 두 명이 온몸에는 밧줄이 묶인 채로,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고 입에는 무슨 재갈을 물고 있었다. 이들이 누군지 설명을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아까 P가 말한 그 반역자들이겠지.
자켓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던 지훈은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철컥. 그 소리에 두 명의 사내들은 눈이 안 보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한 건지 울부짖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웅얼거리는 그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살기 위해 발악하는 그 소리가 너무 애처롭게 들려왔다. 형섭에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너무나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마음 약한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냉철했다. 지훈은 애써 고개를 돌리던 형섭의 턱을 거세게 잡고는, 그 둘에게 시선을 고정하게 하고선 말했다.
"잘 봐."
그 말을 끝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훈은 그들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요란한 총성이 두 번 들리고, 피와 함께 터진 뇌수가 온 사방에 흩뿌려진다. 그들은 언제 울부짖었냐는 듯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여기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거친 호흡을 내뱉는 형섭의 숨소리뿐이었다. 형섭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머리에서 줄줄 흐르는 피와 터진 머릿 조각들을 보며 결국에는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욱…!"
컥컥대며 속을 게워내는 형섭을 보던 지훈은 그의 앞에 쭈그려 앉고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에 피가 튀어 붉은색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아주 이질적이게도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있나 싶지."
"……."
"하루에도 몇 번씩 APEX로 가고 싶단 생각하지."
……그걸 어떻게. 형섭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떨렸다.
"네가 티를 낸 게 한두 번이어야지. 맨날 죽상에 의욕은 하나도 없고, 병신같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나는 왜 여기에 있나 혼자 전전긍긍."
"……."
"근데 어떡해, 여기에 온 건 넌데. 자발적으로 왔든, 남한테 떠밀려서 왔든 어쨌든 여기에 온 건 너라고, 알아?"
"……."
"네가 얘네처럼 탈출을 시도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넌 겁이 많은 놈이니까."
"……."
"그래도 만에 하나… 날 배신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
"잘 알아두라고, 이 새끼야."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싹 굳히던 지훈은 소매로 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이건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정말 죽을 것 같이 극한 공포감은 자신을 조여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던 형섭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싸늘하게 죽어있는 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처참하게도 죽어있는 그들의 모습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 회의 시간 때 솔직하게 얘기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저 자리에 있는 건 바로 나였겠지….
"……컥!"
형섭은 다시 한 번 올라오던 구역질에 토사물을 내뱉어야만 했다.
*
APEX
"아, 아!"
"아프긴 한가 봐요?"
무릎도 무릎이지만 손바닥은 또 왜 이렇게 쓸려왔는지. 소독을 하는데 따끔한 건지 앓는 소리를 내는 다니엘이 괜히 얄미워 여주는 솜으로 그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진짜 아파…! 몸집은 큰 게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아프다고 울상을 짓는 걸 보자니 여주는 또 마음이 약해진다.
"제발 몸 좀 아껴요, 제발. 왜 쓸데없이 넘어져서 이렇게 다치고 그래요, 가뜩이나 손쓰는 사람이…."
"…미안해."
"이러면 K만 고생하잖아요. 진짜 속상하게…."
종현과 민현이 만난 것처럼, 다음 달에 실습 과정을 하러 군사 학교에 갔을 때 자신이 담당하게 된 사람이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그쪽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백발백중, 항상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도 이렇게 자주 다쳐오곤 했었다. 매일 한두 군데씩 다쳐와놓고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더 다쳐오는 거라며 능글맞게도 말하는 다니엘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여주가 보기에는 그냥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때는 다니엘이 아무리 다쳐와도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뭐 정말 고의든, 아니든 그 덕분에 실기 평가 때 자신의 능력을 많이 보여줄 수 있었으니.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일 줄 알았는데… APEX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에는 정말 놀라웠다. 다니엘도 자신을 보고는 눈이 동그래진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니엘은 아주 수줍게도 웃으며 말했다.
'이야. 못 본 새에 더 예뻐졌네요, 쌤.'
APEX에서 만났을 때에도 그는 여전했다. 이젠 같은 팀 사람이니까 왜 그렇게 그가 다치는 건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의 행동 패턴을 파악해보는데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 다친다는 걸 알았을 때, 여주는 그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어쩔 때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기도 했다. 으이구, 내가 진짜 못 살아…! 그때부터 아마 다니엘의 전용 주치의가 된 것 같다. 여주는 다른 사람들보다 다니엘은 더욱 신경 써서 치료를 해주곤 했다. 좀 더 손길이 많이 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해야 될까.
그러나 종현의 죽음 이후, 여주에게는 트라우마가 하나 생겼다. 바로 자잘한 상처 하나에도 엄청난 신경을 쏟는다는 것. 붉은색만 보면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다. 그래서 자신의 소지품에는 붉은색이 없다. 그게 그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맨날 그 색을 강다니엘이 만들어 온다. 그걸 볼 때마다 종현이 생각나서 죽을 것만 같은데, 정말 힘들어 미치겠는데. 사실 그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 트라우마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이지. 그러나 여주는 날이 가면 갈수록 다니엘이 야속해져만 갔다. 이제 그만 좀 다쳐서 왔으면 좋으련만….
"…되도록이면 손쓰는 일은 좀 줄이도록 하세요. 상처 덧나면 안 되니까 훈련 같은 것도 좀 삼가고."
오늘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던 민현 때문이었을까. 그의 모습과 그때의 트라우마가 오버랩되면서 여주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사람 앞에서 티 내면 안 되는데. 이건 절대 들키면 안 되는데…. 혹시라도 이런 자신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여주는 얼른 구급상자를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상함을 다니엘이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다니엘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지만, 여주는 그런 다니엘을 모른 척하며 급하게 그것을 챙겨들고는 방을 나왔다. 그렇게 자신의 연구실로 걸어가려고 코너를 도는데,
"……아."
계속해서 떠오르는 종현의 얼굴에 결국 여주는 얼마 못 가 자리에 주저앉고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야만 했다. 어떡하지…? 계속 종현이 생각난다. 종현이 죽던 날, 미친 듯이 피를 토해내던 그날. 아무리 손으로 막아보아도, 급하게 다친 부분을 막아보아도 피는 울컥울컥 자신을 잠식할 만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했지만 무능한 자신은 도저히 살릴 수 없었던 그 사람.
"다니엘 치료는 잘 했…."
"……."
"…왜 그래, 여주야."
무슨 일이야. 오늘도 어김없이 다니엘을 혼냈을 여주의 후기를 듣기 위해 그의 연구실로 가던 영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여주를 보곤 얼른 그녀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왜 울고 있어. 영민의 목소리에 여주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보지만 자신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너무 따뜻하기만 한 영민의 행동에 여주는 결국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흐으, 흑!"
민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자신이 이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괜히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영민이나 다니엘, 성우 같은 경우에는 전장에서 싸우고 다치는 일이 태반인데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부담을 가질까 봐, 그래서 괜히 신경 쓸까 봐. 그리고 다친 그들을 치료하는 게 자신의 명분이고, 또 소임인데 그들이 안 다쳐서 오기를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주는 절대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냥… 민현도 그렇고 여태까지 참고 참았던 게 터진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던 여주는 진솔하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영민은 자신의 말을 묵묵히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냥 그렇게 들어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여주는 어쩌면 더 편안하게 그에게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더라고요. K나, M, 그리고 O가 다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또다시 살려내지 못할까 봐, 그래서 또 잃을까 봐."
"……."
"M 같은 경우는 사실 워낙 완벽하고 그러니까 별로 걱정은 안 돼요. O 같은 경우에도 뭐 평소에는 보면 허당인 것 같아도 실전에서는 꽤 강한 타입이니까…."
"……."
"…그런데 K는 너무 걱정이 돼요. K가 다쳐서 올 때마다 나는 미칠 것 같아요.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다칠 일이 없을 텐데. 그러면 K도 아프지 않을 텐데. 솔직히 K라고 좋겠어요, 맨날 상처 만들어 오는 게. 조금만 조심한다면 K한테도 좋을 텐데…."
"……."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요."
K도, 그 누구도. 이야기를 다 들은 영민은 그저 여주를 안아주었다. 이 어린 게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까…. 딱한 마음에 영민은 토닥…토닥… 여주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그 말에 여주는 또다시 울컥하여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그래도 M한테 들켜서 다행이야. 민현은 자신을 걱정한다고 날밤을 샐 거고, 대휘랑 성우, 재환은 어쩔 줄 몰라 했겠지. 그리고 다니엘은… 엄청난 죄책감을 가졌을 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여주야."
영민이 자신을 달래주는 소리를 들으며 여주는 눈을 감는다.
오늘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을 것 같다.
-
"……."
여주의 연구실을 찾아가려던 다니엘은, 코너를 돌기 전 들려오던 그 둘의 이야기를 듣고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