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내가 왜 친구야?
Writer. 저편
박우진이랑 시험공부 한답시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던 날, 그 날이 사귄 지 정확히 57일 되는 날이었다. 공부는 무슨, 책을 덮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박우진이 마치 '우리 시험범위 어디까지임?' 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로 대뜸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반대로 책은 펼쳐두고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난 그 말을 듣자 마자 고개를 슥 들어올렸다.
"야."
"어?"
"우리 그냥, 다시 친구로 지내자."
"…갑자기 왜?"
"친구가 편하니까."
"……."
"솔직히 니도 그렇잖아."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이어지는 말에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목이 콱 메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는 웃었다. 뭐냐, 존나 뜬금없네.
"……."
"그럼 그렇게 해. 그게 편하지, 그치."
내가 말을 하는데도 박우진은 내게 시선 한 번 넘기지 않은 채 여전히 휴대폰에 눈을 두고 고개만 끄덕인다. 불쌍한 나는, 대화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그런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아, 모르겠다. 네가 편하다는데 뭐. 그럼 된 거지.
"…야, 집에 갈까? 시간 너무 늦었다."
"딱 10분만 이따 나가자, 알겠제."
아, 그건 알까? 사실 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나도 그런 척 했다.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속으로는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네 앞에서. 나만 행복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나만 좋아한 것 같아서 슬펐다. 나만 슬픈 끝이라서, 그게 가장 슬펐다. 아니, 끝도 아니었다. 애초에 상대편은 시작한 적도 없으니까.
이내 고개를 다시 엎드린 팔 사이로 묻었다. 개새끼.
6월, 초여름. 차갑게 연애하고 차갑게 헤어졌다.
01 나는 늘 그랬는데.
박우진이랑 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쭉 같은 곳을 나왔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마저 같았다. 집도 바로 옆집이라 안 친할래야 그럴 수 없는 사이, 하도 붙어다니다 보니 부모님끼리도 친했다. 진짜 박우진이랑 둘이 쌓은 추억이 다른 동성 친구들이랑 쌓은 추억보다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녀석은 내 인생에서 아주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난 박우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뭐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좋았다. 물론 처음에는 단지 친한 친구에게 느끼는 각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지. 걔가 나랑 얼마나 친한데, 내가 걔를 왜? 나도 얼마나 부정했는데, 그 사실을.
하지만 올해 4월 중반에 접어들 때즈음엔 정말 내 마음을 숨기기 힘들어질 정도로, 내가 부정하기도 힘들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이 커져 버려서 결국엔 고백을 해 버렸고, 녀석은 살짝 놀라는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마음을 받았다. 그래, 사귀자.
"다녀왔습니다."
"어, 왔어? 거실에 우진이 와 있는데."
"…왜?"
방문을 닫자마자 가방을 벗어 침대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짜증나. 이래서 옆집에 사는 건 좋지 않다. 며칠 간 안 마주치려고 피해다닌 게 말짱 꽝이 되 버렸잖아. 솟아오르는 짜증을 풀 데가 없어 애꿎은 베개만 온 힘을 다해 쥐어짜냈다. 이게 뭐냐고 진짜.
"밥 먹으러. 오늘 엄마 집에 없어서 밥 줄 사람 없다."
"아, 라면을 끓여 먹던가 하지 왜 우리 집에 쳐 오고 지랄이냐고!"
"내한테 뭐 화난 거 있나."
"아오, 조용히 하고 티비나 계속 봐."
"니 설마 우리 깨진 거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제."
"……."
"괜히 어색해지게 혼자 뭐하는데."
…집에 가 씨발. 그냥 집으로 꺼져 버려. 옆에 있던 쿠션을 박우진에게 집어던지고 도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 돌았나! 날 향해 소릴 지르는 박우진을 뒤로 하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가 녀석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화풀이였다.
***
[ 헐, 싸움 그러면? ]
"아니, 내가 걍 일방적으로 화낸 거지. 아마 지금 존나 어이없어 하고 있을 걸."
[ 진짜 미치겠다. 거기서 화를 내면 어떡해? 걔가 그걸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
"몰라, 어차피 가망 없어."
늦은 새벽, 끝도 없이 밀려오는 짜증에 천유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박우진을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장 잘 알다보니 당연히 내 걱정도 가장 많이 하는, 그런 친구. 박우진이랑 헤어졌던 그 날도, 천유림에게 전화하자마자 눈물부터 쏟았던 나다. 아마 박우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지.
역시나 오늘 일을 말해 주니 바로 미쳤냐는 소리부터 하는 천유림에게, 어차피 접을 거라 상관없다는 지키지 못할 말을 또 하고. 내일은 또 녀석을 어떻게 피해 다닐까 열심히 토론을 펼치던 와중 귀에 바짝 갖다대고 있던 휴대폰에서 돌연 진동이 울린다.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지 하고 화면을 켰는데 보이는 이건 또 뭐래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박우진이다.
진짜 왜 그러는데 오전 1:20
나랑 얼굴 안 보고 살 거냐고 앞으로 오전 1:20
고작 그 몇 글자를 읽고도 난 지금까지 애써 붙들고 있던 모든 멘탈이 부스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나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거지. 한동안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던 건지 천유림이 날 재차 불러댔다. 야, 스트레스 존나 받는다더니 자냐? OOO? "…아, 미안. 딴 생각 하다가." [ 그럼 그렇지. ] "야, 나 이제 잠온다. 네 말대로 스트레스나 존나 받는데 더 깨 있어봤자지." [ 인정. 차라리 잠이라도 푹 좀 자라. ] "응, 내일 학교에서 보자. 빠이." 전화가 끊겼다. 그치만 잠이 오긴 개뿔. 박우진 때문에 다 깬 지 오래네요. 이거, 카톡 답장 뭐라고 해야 해? 그냥 확 대판 싸워버릴까. 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힘들 수는 없는 거잖아. 너도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면 진짜, 하다못해 나 때문에 짜증나는 감정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근데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무리 감정이 없었다 해도, 그래도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래- 도! 헤어진 거랑은 전혀 별개지. 아니야? 내 말 틀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라면 쟤는 날 갖고 놀았다는 거야 뭐야. 진짜 이게 뭐냐고… 아 요새 니 아는 척 안 하고 그래서 미안... 요즘 이래저래 심란해서 계속 기분 안 좋았던 거 같음 오전 1:30
오늘 짜증낸 건... 내가 그날이라서 그래... 이해좀 ㅎㅎ... 오전 1:31
결국엔 제자리. 박우진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게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어떻게라도 험난한 내 세상 안에서 녀석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게. 아 그런거였음? 내가 예민했네 오전 1:31 괜히 찔러서 미안 오전 1:32 컨디션 안 좋겠네 일찍 자 내일 또 아프다고 찡찡거리지 말고 오전 1:32 잘자 오전 1:32 화가 났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기자 문득 차오르는 눈물. 난 하루에도 너 때문에 이렇게 몇 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하는데 넌 보나마나 아무렇지도 않겠지. 이젠 슬슬 정리할 때도 됐는데, 왜 난 아직까지 너 때문에 이렇게 매일 밤마다 잠을 설쳐야 하는 건지. 정말 넌, 아직까지도 날 너무 모른다. 박우진. 좀 알아주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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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당. 표현 못하는 여주랑 우진이의 고구마 잔뜩 찌는 아련함이 갑자기 막 보고싶어서... 조심스레 싸질러놓고... 가요... (찐따미) 글잡 맨날 읽기만 하다가 직접 올려보는 건 첨인데, 좋아해주실지 모르겠어서 지금 너무너무 떨립니다 ㅠㅠ...! 그러니 전 이만 숨도록 하겠어요 총총... 언능 다음 편도 쪄 오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리며 (๑>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