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워크숍: 장기자랑의, 장기자랑에 의한, 장기자랑을 위한
KARD - Oh NaNa (Hidden. 허영지)
"야 지훈쓰, 누나 나간다."
"어어.. "
"친구 데려와도 돼."
"어어... 어.."
"잘 치워놓고."
"어어... 가... 누나... 잘 가.."
눈도 채 뜨지 못하고 웅얼대는 박지훈을 뒤로한 채 끙차, 짐을 들고 현관문을 걸어나왔다. 요즘 들어 하루에 12시간은 자는 것 같은 박지훈에게 아침 7시면 한밤중이다.
문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과장님이 내 짐을 받아주었다. 간만에 수트가 아닌 편한 옷을 입은 걸 보니 새롭다.
나도 놀러 가는 기분 좀 내려고 살랑살랑한 원피스를 입어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괜히 싱긋 웃으며 과장님을 쳐다봤다.
"피곤하지 않아?"
"조금? 근데 괜찮아요. 놀러 가는 거니까."
"...오늘 예쁘네."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심장이 쿵 해요, 안 해요. 갑작스럽게 들린 예쁘다는 말에 설레서 붕 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입꼬리를 비집고 슬금슬금 나오는 웃음을 참아보다가 차마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과장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 세워둔 차에 내 짐을 실었다. 이미 트렁크에는 과장님의 짐이 한 보따리다.
고작 1박2일 가는 건데 짐이 되게 많으시네... 옷을 많이 챙기셨나?
"나는 선발대야. 김과장이랑 황대리랑 같이 가."
"아- 나는 옹과장님이랑 후발대인데."
제주도에 다녀온 뒤 공항에서 인사를 할 때까지 옹과장님과는 엄청 어색하고, 또 분위기가 이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제는 출근을 하지 않아서 어색함을 느낄 틈이 없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처음 회사에 가는 거라 좀 걱정이 됐다.
물론 어색하다고 해도 어찌 할 방법은 없었다. 이래도 계속 봐야 하고, 저래도 계속 봐야 하는데 어려워하면 할수록 결국 서로에게 안 좋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또 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살짝 한숨이 나왔지만 강과장님에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저... 과장님."
"응."
"..장기자랑, 할 거죠?"
과장님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첫 워크숍이라 설레고 기대가 되는 것도 있긴 한데,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따로 있으니 물어보고 싶었던 거다.
과장님은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아, 하면 안 돼요? 하면서 보챘다. 과장님은 왜, 보고싶어? 하고 물었다.
나는 아 당연하죠- 다들 그렇게 막 짱이라고 해서 진짜 궁금하단 말이예요. 그리고 저한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잖아요- 하고 칭얼댔다.
"뭘 그렇게 짱이라고... 다들."
"그러니까 진짜 궁금하다고요- 나갈 거죠? 네?"
"봐서."
"아아, 진짜! 제가 몰래라도 신청서 낼래요."
말 없이 웃기만 하는 과장님이다. 확실하게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장기자랑에 나갈 건지는 저녁이 되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궁금해졌다.
춤 추는 과장님이라... 진짜 기대되는데. 꼭 나갔으면 좋겠다. 소녀팬의 마음으로 괜히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과장님의 차는 평소보다 빨리 회사에 닿았고, 나는 과장님보다 먼저 내려서 티나지 않게 혼자 출근했다. 과장님은 커피를 사들고 천천히 올라오셨다.
강과장님, 김과장님, 그리고 황대리님까지는 선발대였고 나와 옹과장님은 후발대였다. 선발대와 후발대를 나누는 기준이 딱히 뭔지는... 모르겠다.
여튼 선발대인 분들은 선발대 준비물을 분주하게 챙기셨다. 나는 그 틈에서 강과장님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손을 잡았다 놓았다.
과장님은 나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씨익 웃었고, 그 표정을 본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출발까지는 좀 시간이 있으니 잠깐이라도 일을 봐야겠다 싶었다.
-
"........"
"............"
후발대 버스를 타서 옹과장님과 나란히 앉아있는데, 이건 도저히 안 어색할래야 안 어색할 수가 없는 거다.
결국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가, 출발한지 한 10분만에 오늘 중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좀 쉬었어요?"
"아, 네. 과장님.. 잘 쉬었습니다. 죽은듯이 잤어요.
과장님은요?"
"저도.. 친구 만나서 술 한 잔 가볍게 하고 들어와서 잘 잤어요.
제주도 갔다와서 바로 강원도 가는 거니까 피곤할 것 같아서 내가 후발대로 넣어달라고 했어요."
아아. 과장님께서 후발대로 넣어달라고 하신 거구나... 그래도 확실히 선발대 분들보다는 덜 피곤한 것 같은 느낌이라 다행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더니 가볍게 웃어보이신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물론 이래저래 편할래야 편할 수가 없는 마음이긴 했지만, 불편하다고 해도 그걸 티내는 것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뭔가 내가 불편해 하면 과장님이 더 힘드실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내가 선한 역할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과장님을 편하게 만들어드리는 게 내 숙제였다.
"○사원은 워크숍 처음인데 어때요?"
"저 진짜 막 설레고, 엄청 기대돼요. 과장님.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응. 우리 회사 워크숍 재밌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무슨 행사든 안 재밌는 건 없지만."
그쵸... 체육대회도 재미라면 재미가 있었지요... 문득 체육대회를 떠올리니 자동으로 몸서리가 쳐지는 기분이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다시 떠올리기는 싫었다.
나도 승부욕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지만, 우리 회사는 모든 사람이 엄청난 승부욕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워크숍도 마찬가지. 팀을 나눠서 레크레이션 활동마다 점수를 매기는데 1등은 또 포상이 있단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덤빌 게 눈에 선했다.
"밤에 일찍 잠들긴 힘들 텐데 미리 눈 좀 붙여요.
도착하면 깨워줄게요."
"....네, 과장님."
나긋나긋한 과장님의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이나마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어색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분명 이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절대, 절대 어색한 티 내지 말아야지. 그래서 과장님 더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죄송한 마음을 가릴 수 있는 건 그런 노력밖에는 없었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다들 자유롭게 노시고 저녁에 모여주시면 됩니다!
저녁식사는 6시에 그랜드볼룸에서 뷔페식으로 진행 됩니다-
저녁시간에 늦지 않게 일찍들 나와서 씻고 오세요!"
워크숍 장소는 워터파크가 딸린 리조트였다. 포상 워크숍이다 보니 보통 워크숍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그냥 각자 알아서 끼리끼리 놀다가 저녁에만 모이면 된다고 했던 거다.
원래 같았으면 레크레이션도 여러 종목을 하면서 서로 점수를 따기 위해 경쟁할 텐데, 이번 포상 워크숍의 유일한 레크레이션은....
"아아, 아. 아아아-"
장기자랑이었다.
와... 김과장님 목 푸시는 모습이 아주 프로다, 프로. 옆에서 황대리님도 화음을 넣고 있는데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다. 가수인 줄...
옹과장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로 걸어가서 장난을 치셨고, 김과장님과 황대리님은 언제 그랬냐는듯 옹과장님과 농담을 주고 받으셨다.
웬만한 짐은 선발대가 들여다 놓았다고 했다. 후발대는 내일 끝나고 뒷정리를 맡아주면 된다고 그랬다.
옹과장님이 자연스럽게 김과장님과 황대리님 쪽으로 가시면서 나도 동기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버스를 같이 탄 후발대 중에 동기가 좀 있어서 말을 붙일 수 있었다.
놀 때만이라도 좀 마음 편하게 놀으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낮에는 물놀이 좀 하다가 저녁에 다시 모이면 된다던데요."
"와... 좋다. 이렇게 자유로운 워크숍 처음 봤어요."
"그러니까요. 친구들끼리 놀러 온 것 같은데 워크숍이라니... 우리 회사 진짜 좋네요."
마음이 맞는 동기들과 나까지 네 명 정도 어울려서 같이 물놀이를 했다. 강과장님은 어디 가신 건지 통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화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딘가에서 잘 계시겠지 생각하고 동기들과 노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 그 때까지는 몰랐던 거지... 하나둘씩 워터파크 밖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원인이.. 장기자랑이었다는 걸...
"와... 근데 낮에 레크레이션 하면 보여야 될 사람들이 안 보인다고 하더니 진짜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
"저희 회사 워크숍이요. 장기자랑이 꽃 중에 꽃이어서 그거 준비한답시고 무대 오르는 팀들은 일찍이 빠져 있는대요.
근데 그게... 진짜 살벌해서, 윗분들도 낮 활동에 빠지는 거 그냥 눈 감아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예.....? 처음 들어보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장기자랑이 그만큼 중요한 거야?
아침에 출근할 때 차 안에서 그저 웃으면서 대답을 피하던 과장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랬던 분이 지금 여기 안 계시다는 것도 생각났다.
화음을 맞춰보던 김과장님과 황대리님도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도 깨달았고... 옹과장님까지 없었다.
어쩐지 하나 둘 사라지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을 곧장 받아들이기는 좀 어려웠다.
파도풀에서 파도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유수풀에서 튜브를 타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기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다섯시였다.
얼른 씻고 빨리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어서 동기들과 함께 서둘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배가 슬금슬금 고파오는 게, 저녁이 뷔페라는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동기들이라고 해봤자 매번 식사할 때만 잠깐씩 보는 게 다였는데 이렇게 종일 어울려서 노니 또 기분이 색달랐다.
그러면서 진즉 동기들이랑도 좀 어울리고 할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오늘 워크숍을 와서 친해진 게 다행이기도 하고... 뭐 그래서, 좋았다는 거다.
"안녕하세요-"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인사를 해왔다. 누군가 해서 보니까 한사원이다.
어디에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사원도 있었구나... 하면서 예에, 안녕하세요. 했더니 빙긋 웃어보인다. 뭔가 웃는 것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어디서 있다가 지금 나온 거냐는 내 눈빛을 읽은 건지, 한사원이 아 저는... 장기자랑 연습하다가 왔어요. 했다. 나는 아... 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번에 다른 동기분들이랑 무대 준비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보니까 ○사원님 옹과장님이랑 같이 진행 보시는 것 같던데."
".....예?"
"아... 모르셨어요? 저는 큐시트 봤거든요. 아직 옹과장님이 말씀 안 하신 모양이네요."
.......? 뭐야, 지금 이 상황...? 내가 진행 보는 걸 왜 내가 모르고 있는 건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사원을 봤더니, 그럼 조금 이따가 봬요! 하면서 홀연히 사라진다.
대체... 왜 궁금하지도 않은 건 혼자 잔뜩 말해놓고 저렇게 가버리는 건데... 얼른 옹과장님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행동을 서둘렀다.
아직 머리를 말리지 못한 동기들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넘어와서 휴대폰을 꺼냈는데.
".....헐."
옹과장님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15건이다. 오 마이 갓. 얼른 과장님의 전화번호를 누르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뚜루루, 하는 통화연결음이 지리하게 이어졌다.
-
"......과장님!!!"
"어, ○사원- 여기요!"
망했어, 망했어,를 연발하며 옹과장님을 찾았다.
옹과장님은 이게 원래 계획에는 없던 거였는데, 팀장님이 옹과장님과 나를 MC로 추천하시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물놀이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휴대폰을 못 봤다고 설명했다.
과장님은 그럴 것 같았다고, 근데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서둘러야 한다며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셨다.
저... 저희 저녁 먹는 거 아닙니까..? 뷔페 먹는 거 아닙니까...? 저를 어디로 끌고 가시는 겁니까 과장님...? 저 배고픈데요..
"....흐익."
단발마의 탄성밖에 내뱉을 수 없었던 그곳은, 뷔페가 준비되어 있다는 그랜드볼룸 뒷편의 대기실이었다.
그랜드볼룸에는 케이터링 서비스에 의해서 음식이 세팅되고 있는데, 뒷편은....어... 마치 방송국 대기실을 방불케 하는 조급함이 존재했다.
저녁식사를 여기서 하고, 준비된 음식을 다 치운 다음에 장기자랑을 하는 모양이었다. 거의 200명은 족히 들어찰 것 같은 크기의 룸을 보니 괜히 내가 주눅이 들었다.
대기실은 좁은 크기의 벽이 군데군데에 쳐져 있어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는 잘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배고프지만 뷔페로 저녁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과,
"네- 여기는 2017년도 해원기획 여름 워크숍, 광란의 밤!
저희는 이번 광란의 밤 진행을 맡은 옹성우, ○○○입니다."
옹과장님과 함께 '광란의 밤'이라 불리는 장기자랑 세션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과,
[엔딩 - 댄스: 영업2팀 강다니엘 과장]
이라고 큐시트에 적혀 있는 문구였다.
적힌 문구 위로 허허, 하며 웃기만 하던 강과장의 얼굴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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