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전개 특성 상 회차마다 문체의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도 하나만 줘 봐.”
길고 좁은 동공의, 샛노란 눈동자가 내게 청한다. 은빛의 갈기 위로 길게 찢어진 주둥이가 주욱 벌어진다.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해….
어서 건네지 않으면 저 짐승이 나를 물어 갈기갈기 찢어 발길지도 모른다. 떨리는 손을 들어 눈금의 한 방울까지 정확히 채운 주사기를 그에게 건네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연한 맹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자의 이름은 정재현이다. 너무도 익숙한 나의 가족이자 형제인 정재현 말이다.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내 혈관에는 뱀독만큼이나 치명적인 독극물이 흐르고 있고, 그리고 자신을 위험에 노출한 채 맨바닥에 책임감 없이 누워 있는 내 주변을 뒤덮은 건 가식이 판치는 동물원의 풍경이다.
그 너머로 확대되는 세상은, 오로지 동물들만이 존재하는 냄새 나고 더러운 정글이다. 발빠르게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먹이사슬의 희생자가 되고야 만다. 귓가에 누군가의 목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사냥의 소리. 흠칫 놀라 돌아본 뒤편에는 큼지막한 곰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손에는… 비닐 포장을 채 다 제거하지 않은 주사기가 들려 있다. 눈을 꾹 감았다 뜨면 솥뚜껑만한 앞발이 비틀어 찢던 비닐 포장은 힘없이 축 늘어진 작은 토끼의 시체로 변한다. 토끼의 목을 가차없이 쥐어 잡은 손이 내 눈앞을 좌우로 횡단한다. 작은 동물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형 또 시작이네. 태용이 형, 이민형 좀 봐 봐요. 사람을 무슨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본다니까?”
“동혁아. 이민형이 뭐야, 형한테.”
“어쨌든.”
“민형아.”
내게 다가와 면밀히 살피는 얼굴은 마찬가지로 내게 겁을 줄 뿐이다. 이동혁의 손에 붙들린 토끼처럼, 목에서 피를 흘리며 맥이 전부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호랑이인지 사자인지 모를 얼굴이 야차와 같이 일그러진다. 그는 진짜로 표정을 일그러뜨린 걸까, 아니면 그저 내 눈에만?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림을 느낀다. 벽 끝까지 도망쳐 엉덩이를 붙였다. 허리를 굽혀 나를 들여다보던 맹수가 등을 돌렸다. 머릿속을 장악했던 극도의 공포감이 풀리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긴장감에서 비롯된 찌꺼기였다. 이동혁에게 다가가 내가 언제부터 이랬는지 따위를 묻는 이태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 도와 줘! 태용이 형, 도와 줘요…….”
나는 안다. 맹수의 얼굴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도, 그에게서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도 같은 이태용이라는 것, 그리고 이 두려움은 하등 의미 없는 시각적인 공포감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지금 나는 안전한 우리의 지하실 안에 있고 두려움에 빠져 정신을 잃을 듯이 우는 소리를 하면 항상 그렇듯 이태용이 나를 보호해 줄 것임을 안다. 나약해 빠진 작은 동물이 더러운 정글에서 생존하는 방법이란 이처럼 남들에게 기생충처럼 빌붙어 사는 방법 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그를 깨달은 나는 의미 없는 가식만을 이어간다.
동물원 철창 속의 공작새처럼 꼬리를 활짝 펼쳐 나약한 자신을 숨기는 흉내를 낸다. 정작 화려한 꼬리의 문양에 가려지고 있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나약한 연기를 하고 있는 야비한 자신임을 모두에게 숨긴 채.
철창 속 정글
- 이민형의 순간들 –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작은 방을 나서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판자촌이 있고,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으면 나오는 시장을 중심으로 가게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퍼져나간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이 구질구질한 동네의 지리는 눈앞에 펼쳐진 지도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별다를 것 없이 생긴 골목들은 전부 다른 길로 통한다. 복잡한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그건 내게는 굉장한 이점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한 대신 주의가 이리 저리로 분산되어 있으니까. 그런 자들만큼 손쉬운 먹잇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골목이 미로같이 얽혀 있다는 건 행운이지.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노란 가방을 멘 여자 애가 보였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을 하고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고개가 바쁘게 돌아갔다. 언뜻 보아도 멋모르는 관광객이었다. 부모를 잃은 건지, 혼자 여행하기로 한 건지는 몰라도 이런 골목을 어린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중앙 시장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죠?”
서투른 중국어로 물어오는 목소리가 앳되었다. 골목의 언덕배기를 내려가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그 애를 지켜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나한테 묻는 건가? 슬쩍 훑어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그 애뿐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 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발음을 들으며 아무래도 그 애가 한국인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끝이 어색한 발음은 형들의 것과 꽤나 닮아 있었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고개도 들지 않고 눈동자만 올려 쳐다보는 내가 무서울 법도 했는데, 그 애는 계속해서 내 앞에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혹시 내가 벙어리일 가능성을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이 쯤이면 대화할 의향이 없음을 눈치챌 법도 한데, 참 순진한 아이였다.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제 갈 길을 갔으면 좋았겠지만 그 애는 가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매 순간 선택의 기회가 있고 내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김여주는 그 때 내게서 도망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중앙 시장은 저 반대편인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두어 개 남은 계단을 내려왔다. 판판한 회색의 시멘트 바닥을 밟았다.
“어, 한국인이세요?”
“이 쪽이야.”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은 아니고 불법 체류에 가까웠지만 굳이 사실을 고할 필요는 없었다. 질문에 한국어로 대답하는 나를 보고 반신반의하던 얼굴이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계단에서 내려선 나는 그 애와 키가 비슷했다.
“언덕 아래에는 시장이 없었는데? 내가 못 찾았나?”
대답해 줄 필요도 없었다. 언덕 아래에 시장이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자기 혼자 의문을 해결하고 있는 것을 놔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골목은 점점 더 좁고 어두워졌다. 하늘이 남색 빛으로 물들었다. 하나 둘 씩 붉은 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골목의 풍경에도 그 애는 끊임없이 재잘대며 내 뒤를 따라왔다.
이름은 김여주다, 열세 살이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왔다가 시장에서 헤어졌는데 길을 잃었다, 등의 쓸 데 없는 정보들이었다. 어찌나 곱게 자라왔는지 의심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며 발걸음만 옮기던 내 팔뚝을 붙잡고 심통이 난 표정으로 너도 말 좀 하라는 그 애에게, 나는 다 왔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 애의 낯이 창백하게 변할 때까지도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해맑던 얼굴이 겁에 질려가는 것을 빠짐없이 쳐다보면서, 우리는 중앙 시장과는 한참 떨어진 완전히 다른 시장에 와 있었다. 홍등이 화려한 가게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길의 중심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한 여자 애는 돌아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지나온 길은 고작 일 분 전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영화 같은 타이밍이었다. 내 등 뒤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조명 빛은 도미노처럼 켜지기 시작해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쳐 그 애의 뒤로 주르르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제 퇴로는 없었다. 허리를 숙여 뒷걸음질치는 그 애의 귓가에 다가갔다.
“말을 못 하는 척을 하면 그냥 보내줄지도 몰라.”
“너, 무슨, 아니, 제발 데리고 가 줘. 놓고 가지 마. 돈 다 줄게!”
패닉에 빠진 아이가 마구 말을 더듬으며 손을 뻗어 나를 붙잡으려 했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에 발을 쑥 뒤로 빼며 말을 이었다.
“미안. 네 돈은 이미 내가 갖고 있는 걸 어떡해. 잘 지내.”
빠르게 뒷걸음질치며 작은 새가 그려져 있는 분홍색 지갑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이 안에 얼마나 들었겠냐마는, 여권이나 신분증 따위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면 저 애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니 지갑을 가져온 것은 일종의 배려 차원이기도 했다.
머리보다 훨씬 높은 담을 타 도망치려던 찰나 맞은 편의 화려한 대문이 열렸다. 후리와였다. 재수 없게 내 질 떨어지는 장난에 걸린 것은 불행이었지만 나름대로 운이 따르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때리고 약을 먹여서 벙어리를 만들기도 하는 다른 가게와 달리 후리와에서는 벙어리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의 아이라는 것에 묘하게 짜증이 나서 벌인 일이었지만, 내심 신기하기도 해서 선심 쓰듯 말해준 것이었는데 진짜로 그걸 써먹을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겁에 질려 잰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려던 아이에게 다가가 앞을 가로막은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그 애의 앞에 눈을 맞추고 앉았다. 이제 부모를 찾아 줄 것처럼 친절하게 굴면서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겠지.
쯧, 혀를 차며 담의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잠시 눈이 마주친 여자의 휘어진 눈매가 사나웠다. 언뜻 보아서는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닐 성 싶었다. 한낱 열네 살짜리 꼬맹이에 불과했던 내가 깜짝 놀라 담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을 때였다.
미미, 반짝이는 장식이 붙은 길다란 손톱이 팔락이며 누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그 어여쁘디 어여쁜 호칭에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걸어 나오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익숙한 옆모습. 이런 곳에서 보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여자에는 관심도 없던, 한창 돈을 버느라 바빠야 할 문태일이었다.
어린 김여주를 치마폭에 감싸 안은 여자는 그 애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문태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도망치거나 피하는 기색도 없이 너무나도 여유롭게 여자의 귓속말을 듣던 문태일은 귓가에서 입술을 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키스했다. 대문을 지나 김여주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여자와 달리 방 밖으로 이어져 있는 긴 마루 복도를 걸어 맨 끝 방으로 들어가는 문태일의 뒷모습이 전부 내려다 보였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문태일의 손에는 작은 병과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마치, 집에 있던 형들이 팔뚝에 마구 꽂아 넣던 ‘천국’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문태일은 유별나게도 작대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다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주사기에는 손도 대 보지 못한 내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도 해 보고 싶냐고 묻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 해도 내게는 놓지 않았는데. 내가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과연 문태일은 원하지도 않는 어린 여자애들에게 작대기를 주사해 온 걸까. 어떤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잊고 싶었다. 물론 나는 절대 잊을 수 없겠지만.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김여주가 아파트의 문 앞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때부터 나는 그 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기억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
한참이 지난 지금 별을 박은 듯이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가 맥 빠진 인형 눈처럼 변해 있음을 깨닫고는 조금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나는 그 애를 나처럼 부모 잃은 고아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그 맑은 인생을 구정물 속에 억지로 쑤셔 넣은 뒤였다. 문태일은 단순히 그 애가 버릇을 고치기 위해 잠깐 보내진 거라고 했지만 그 말도 거짓일지 몰랐다. 그는 자신이 후리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깜빡 속였으니. 어릴 적 잠깐 본 장면이었지만 단순한 손님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은 동네 꼬마도 알 수 있었다. 문태일은 그 술집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김여주가 다시 집에 돌아온 날부터 찰랑이는 작대기를 팔뚝에 꽂아 넣을 때마다 어린 김여주의 하얀 얼굴이 둥둥 떠 다녔다. 그건 절대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미미라는 두 음절을 내 귀로 다시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불쾌함은 쉽사리 가시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마주하기 힘든 그 애를 다시 돌려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여론을 만들었다. 성병이 있을 거다, 정신병이 있을 거다, 근본도 없는 맹비난을 쏟아 냈다. 그리고 모두를 내 걱정에 동조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단 한 사람, 김여주 본인을 제외하고.
가슴에 바윗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매일을 버텨야 했다. 된통 체한 것 같았다. 무신경하게 살아온 그 동안의 나날들은 전부 환상이라는 듯이 예민해졌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부러 평소보다 부지런하게 굴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날이 다 새도록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천국에도 손을 대지 못한 탓에 금단현상이 올 지경이었다. 최대한 늦게 들어가도 멀쩡히 깨어 있는 김여주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온 시간 개념 없이 사는 게 치가 떨리도록 짜증났다.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다 잊은 척 주사기만 퍽퍽 꽂아 넣었다. 잠시라도 천국에 몸을 맡기면 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이상한 건, 혈관을 타고 꿀렁이는 액체가 들어간 후에도 김여주의 얼굴만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짐승들 사이에 혼자 말끔하니 앉아 있었다. 씨발, 지겹기도 하지,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 얼굴을 어지간히도 생각해대는 모양이었다.
내가 재수 없게 굴어도, 친절하게 굴어도 김여주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나를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 아마도 김여주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묘하게 짜증이 났다. 병신 같은 게, 문태일은 얼핏 알아보는 모양새였는데. 물론 문태일은 죽어라고 모른 척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애가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주니까 자꾸 나도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다고 아무렇지 않아지는 게 아닌데,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도 점점 변해갔다. 처음에는 김여주와 눈만 마주쳐도 손이 떨렸는데 이제는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늑대들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모래를 끼얹는 것 같았다. 불안했다. 왜? 평소와는 다른 이유에서 손이 떨렸다. 그러니까, 불안해서. 또래의 여자를 많이 보지 못한 우리는 중력에 이끌리듯 본능적으로 김여주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자리에 누운 김도영에게 이동혁이 들러붙었다. 형, 우리 이제 어떡해요? 막 잠에 들려던 김도영이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헝클었다. 똑바로 누워 있던 이동혁이 데굴 굴러 김도영의 등에 얼굴을 붙였다.
이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형이랑 재현이 형은 일하기도 어려워질 거 아냐. 엄청 불안한 모양이었다. 이동혁은 가끔 저랬다.
어리긴 어려서 그런가 가끔 외로우면 형들에게 들러붙어서 푸념인지 어리광인지 모를 짓을 해 댔다. 김여주가 온 뒤로 한동안 안 저러다 왜 또 시작인가 했더니, 임시로 대충 달아 놓은 샤워 커튼 안에서 김여주가 몸을 씻는 중이었다. 곧 김도영이 짜증을 내겠지.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김도영은 조금만 시끄럽게 해도 까칠하게 화를 내곤 했다. 이동혁을 말리려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또 지랄, 씨발.”
선잠에서 깬 김도영이 새빨간 눈으로 이동혁을 노려보면서 욕을 해 댔다.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 하고 대충 뻗은 손이 가방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더니 이동혁이 있는 뒤편으로 던졌다. 주사기였다. 이거나 한 방 맞고 처 자라는 거지. 웃음이 났다. 보이는 건 뒤통수뿐인데 이동혁이 뾰로통하게 내민 입술이 보였다.
“닥치라는 거네. 진짜 너무 한다, 형. 동생이 우울해 하는데 위로는 못 해줄 망정.”
“자라. 불안하다며. 그거 맞으면 한결 낫다.”
김도영이 한숨을 폭 쉬며 귓가에 대고 징징대는 이동혁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얌전해진 이동혁이 김도영에게 대고 속삭였다.
“형도 이거 하지 마. 이거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새삼스럽게. 나 안 해 이제. 그럼 너도 그냥 누워서 자든지.”
“진짜? 형 끊었어? 왜 갑자기?”
“아 몰라. 시끄러워.”
얇은 이불을 끌어다가 얼굴 위로 덮는 김도영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서렸다. 뭐야 또. 아무래도 또 김여주인 모양이었다.
조그만 게, 우리에게 끔찍이도 영향을 주는 애였다. 아마 다들 여자 애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는 탓인 것 같았다. 뭐야 뭐야, 김도영을 쿡쿡 찌르다가 기어코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이동혁이 씩씩대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때 속옷 위로 흰 반팔 티 한 장과 반바지를 걸친 김여주가 커튼을 걷고 나왔다. 머리 끝이며 팔다리에 물기가 촉촉했다. 김도영을 노려보던 이동혁이 동그란 눈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가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그 애의 머리 끝에서부터 푹 덮어씌웠다.
“야! 안에 다 보이잖아!”
“야, 잠깐만. 앞이 안 보이잖아.”
“아, 미안.”
딱 그 또래다운 투닥거림이었다. 고작 한 살 더 먹은 나는 저렇게 하지 못하는데.
얼굴이 붉어진 이동혁이 김여주의 머리통 위로 이불을 이리저리 문질러 고리처럼 만든 구멍 밖으로 얼굴을 빼 냈다. 그냥 이불을 풀었다가 다시 덮어주면 될 텐데, 기어코 몸을 가리겠다는 집념이었다. 그 행동이 귀여워서 웃고 있던 나를 힐끔 쳐다본 이동혁이 무슨 충고라도 하듯 비장하게 김여주에게 속삭였다.
“저거 봐, 변태같이 쳐다보고 있잖아.”
할 말이 없었다. 김여주도 민망했는지 그런 거 아니잖아, 하면서 이동혁의 머리카락을 달래듯이 톡톡 쓰다듬었다.
황당한 마음을 내리누르고 다가가 이동혁의 등을 떠밀었다.
“너도 씻기나 해, 이동혁. 끈적끈적해.”
빨개진 얼굴로 김여주의 손이 닿은 앞머리를 매만지는 이동혁은 등까지 뜨거웠다. 아주 콩닥콩닥 심장 뛰는 것까지 다 느껴질 기세였다.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을 티 낼 수 있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순순히 들어가 상의를 벗은 이동혁이 갑자기 커튼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소리쳤다.
“야, 너 옷 다 마르기 전까지 이불에서 나오지 마. 알았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여주를 확인하고서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이동혁이었다. 둘이 벌써 사귀냐? 출근 준비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마리화나를 말아 피우던 정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니에요.”
동시에 터져 나온 대답은 김여주와 나의 것이었다. 당사자도 아닌 내가 왜 대답을 했을까 민망해하기도 전에, 이불 끄트머리를 쥐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던 김여주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였지만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당황할 일의 연속이었다. 아닌 척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다가 정재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가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웃고 있는 정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둘이 안 사귀어요. 괜히 한 번 더 뱉어냈다.
아, 그래? 웃으면서 대꾸한 정재현이 꼬고 있던 다리에 팔을 뻗어 바짓단을 툭툭 정리했다.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작대기를 한 방도 안 맞았는데도 정글 한복판이었다. 도처에 맹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