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바람이 되어
w. Jena
"우현아. 옷 입고 준비해."
"어디가?"
"외할머니 댁."
"정말로?"
멍한 표정으로 피아노 건반을 의미없이 두드리던 우현은 제 형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렇게 하면 다친다고 몇 번을 얘기해. 우현의 방에서 옷가지를 챙겨 나오던 누나가 화들짝 놀라며 잰걸음으로 달려오더니 우현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살짝 콩 쥐어박았다. 우현과 나이차이가 꽤 나는지라, 누나와 형에 비하면 콩알만 한 우현은 입술을 삐죽이며 누나가 뒤돌아선 새에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너희 빨리 안 내려오고 뭐하니! 1층에서 우현의 엄마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삼남매를 불렀다. 금방 가요! 우현의 팔을 잠바 주머니에 끼우며 누나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형은 하얀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우현의 머리에 폭 씌워주었다.
"형아, 눈, 눈!"
"어, 어? 미안해."
모자가 눈까지 가려버리자 답답해진 우현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형을 툭툭 쳐댔고, 형은 다시 우현의 모자를 바로 고쳐주었다. 준비 다 됐으면 얼른 내려가자. 우현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 주에 늦잠을 자서 지각할 것 같아 급하게 서두르다가 제대로 미끄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대소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현을 뒤에서 지켜보던 형은 답답했는지, 우현을 번쩍 들어 안고 계단을 두 칸씩 밟아 내려갔다. 일층에 내려가자 기사 아저씨가 차 앞 유리를 광택 나게 닦고 있었고,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삼남매를 왼손에 찬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빨리 타렴. 늦겠다."
"엄마, 아빠는?"
뒷좌석에 탄 우현이 창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차에 타지 않고 아리송한 표정으로 시계만 보고 있던 어머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회사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 우리 먼저 출발하자. 아이들에겐 보이지 않게 얕은 한숨을 쉰 엄마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차는 조용한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우현의 집을 빠져나갔다. 형과 누나와 함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우현은 어느 순간부터 색색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우현은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외할머니 댁은 우현의 집인 서울에서 한참을 가야했지만, 우현은 항상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손꼽아 기다렸다. 전혀 외할머니 댁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 보이는 바다를 보면 왠지 모르게 들뜨곤 했다. 투명한 바다와 새파란 하늘, 그리고 새하얀 구름. 삭막한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는 서울과 다르게 이곳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예쁜 공주님이 사는 성이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이자 우현은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저녁밥도 좋았지만 외할머니 댁에 오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아이.
우현은 차에서 내려 외할머니에게 배꼽인사를 한 후, 형의 손에 이끌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인다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인지라 더 반가웠던 형은 이미 친구들과의 놀이에 빠져 우현을 잊은 지 오래였다. 형의 손아귀에서 드디어 우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한 우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뛰어놀아 새까만 아이들이 유독 많은 이 동네에서, 유달리 피부가 새하얀 한 아이가 있었다. 가운데 그네. 항상 저 그네에 앉아 우현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라고 하기에는 사연이 많아 보이는 눈동자를 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그네를 타고 있었다.
"안녕!"
"…."
오늘도 여기 있었네? 우현은 소년의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쓱 들었다가 우현의 얼굴을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소년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현은 굴하지 않았다. 소년의 옆자리 그네를 차지하고 앉아 쉴 새 없이 입을 조잘거렸다. 서울에서 출발할 땐 해가 쨍쨍했는데, 여기 오니까 벌써 밤인 거 있지. 근데 진짜 웃긴 거 알려줄까? 우리 누나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는데, 도착할 때 쯤 되니까 눈을 딱! 뜨더라. 완전 깜짝 놀랐어. 아, 내 이름 얘기 안했지? 내 이름은 우현이야. 남우현. 이제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열 살! 아니, 열한 살!
그런데, 넌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우현이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대답이 없는 소년은 그네에서 내려 저벅저벅 우현에게서 멀어져갔다. 내가 싫은가…. 우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발을 굴렀다. 그네에서 나는 끼익 거리는 마찰음이 듣기 싫었다. 우현은 귀를 틀어막고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저 멀리 사라져갔던 소년이 다시 나타나 우현의 손에 작은 쪽지를 쥐어주고 입을 벙긋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토도도 달려가 버렸다. 이 쪽지는 내일 봐야지. 혼자 실실거리던 우현은 바지 주머니에 쪽지를 넣고 다시 그네에 걸터앉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보이는 바다. 그 수평선 너머로 빨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마을은 참 예쁘다. 빨갛고, 파랗고, 하얗고. 그 애도….
남우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형이 우현을 버리고 먼저 간 모양이었다. 같이 좀 가면 어디 덧나나! 우현은 툴툴거리며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 * *
"형아는 맨날 혼자 가고!"
"에이, 미안해."
"나빠!"
"너 자꾸 그러면 집에 돌려보낼 거야."
"으응?"
안 돼, 안 돼! 우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형의 가슴팍을 콩콩 때렸다. 형은 큭큭거리며 우현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있기다? 우현은 입을 삐죽였다. 형은 악마가 틀림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바다는 낮에 본 예쁜 바다와는 다소 느낌이 달랐다. 빨려들 것만 같은 어두움에 우현은 흠칫 작은 몸을 떨며 형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모래사장에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운동장에서 뛰놀던 형의 친구들이었다. 우현 형제를 발견한 소년들은 손을 흔들며 우우거리며 시끄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제 시작해?"
"지금!"
형의 대답에 형보다 나이가 배는 많아 보이는 형이 씩 웃으면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우현의 손에 쥐어진 막대기의 끝에선 눈부신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우현은 입을 헤 벌리고 막대기를 흔들어댔다. 이윽고 쾅, 쾅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까만 밤하늘에 금빛 실들이 수를 놓기 시작했다. 우현은 넋을 잃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고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이 세상엔 예쁜 것들이 이렇게나 많아….
"악!"
"어? 우현아, 왜 그래?"'
"형아, 눈, 눈이 아파. 눈이…."
양 눈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우현을 보며 형은 적잖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두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빛을 잃은 우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까만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연중 공지 내자마자 새로운 픽을 들고와서
밉상은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옵니다
예전부터 구상해 온 픽이긴 한데....어..그게..
연재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어요
연재 여부는 좀 더 고심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한데
근데....막 또 저번 연중 공지에도 사랑을 외쳐주신 독자분들 계셔서
난 그냥 여기 뼈를 묻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은 새벽입니다 다들 잘 주무시고 계시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