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Grazioso
"나 왔어."
"으응."
"비 오고 나더니 날이 엄청 좋아졌어."
"그래?"
"응."
난 잘 모르겠는데. 우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성규는 창가로 터벅터벅 걸어가 두껍게 쳐진 커튼을 걷어냈다. 커튼을 걷자 그 안에 드리워져 있는 블라인드를 보자 성규는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한창 낮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병실이 어두컴컴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규는 커튼 끝을 붙잡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커튼 끝이 성규의 손아귀 안에서 꾸깃하게 구겨졌다. 그에 반해 우현은 커튼을 걷어내는 소리만 들리고 그 이후의 성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으니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매만지고 있었다. 성규가 신경질적으로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따사로운 햇빛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 이제 좀 따뜻한 것 같아. 축 늘어져있던 우현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성규는 그런 우현을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우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남우현."
"어어."
"나가자. 밖으로."
그대로 나가기엔 추우니까 겉옷 입고 나가자. 일어나. 얼른. 꼭 쥔 주먹으로 우현의 등을 콩콩 두드리던 성규는 우현에게 어서 빨리 일어나라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햇살을 마음껏 만끽하던 우현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밖을 나가본지가 언제더라. 우현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병원에 온 뒤로는 병실 밖 복도조차 제대로 나선 적이 없었다. 그 때, 옷장을 뒤적거리며 겉옷을 찾아내 꺼낸 성규가 우현의 뒤로 다가와 옷을 입히면서 말을 걸었다.
"원래 밖에 잘 안 나가?"
"집에 있을 땐 가끔 산책도 나갔는데."
"그런데?"
"백구를 병원에 데려올 수 없잖아."
걔가 얼마나 똑똑한데. 누나 말로는 그냥 새하얗다는데 뭐가 보여야 알 수 있지. 여튼 되게 예쁘대. 그러고 보니 눈 뜨면 우리 백구도 봐야겠어. 옷을 다 입은 우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고나서 활짝 웃어보였다. 어때? 우현이 기대에 잔뜩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통에 성규는 우현의 얼굴을 살짝 밀어내곤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예뻐."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은 실례야."
"멋있어."
"그렇지?"
역시 난 멋있어. 우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에 설치된 안전 바를 잡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성규가 재빠르게 다가가 우현의 손을 잡았다. 병실을 나서자 우현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성규는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굳은 우현의 귀에 귓속말을 하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
"하늘이 새파래."
"그래?"
병원 근처 공원까지 나온 성규와 우현은 벤치에 앉아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병실을 나선 이후 우현은 단 한 번도 성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안한 듯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현이 성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만 여기에 있어 봐. 성규는 우현의 손을 풀고 벌떡 일어났다. 우현이 뒤늦게 성규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성규는 저만치 달아나고 없었다. 우현의 표정은 점점 울 것 같이 변해갔다. 우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규의 이름을 불러댔다.
"…김성규!"
"잠깐만."
계속해서 잠깐만, 을 외치던 성규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우현의 표정은 점점 풀리는 듯 했지만 불안함은 아직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우현의 옆에 성규가 다시 걸터앉자 우현은 손을 더듬거리며 성규의 허벅지께를 붙잡았다. 완전 애기네, 애기. 성규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우현은 머리를 성규의 어깨에 기대었다. 우현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입술을 삐쭉였다.
"형이 눈멀어 봐라."
"넌 이제 뜰 거잖아. 됐고, 손 좀 줘 봐."
"손?"
응. 손. 성규의 단호한 대답에 우현은 툴툴대면서도 왼손을 내밀었다. 성규는 우현의 손을 붙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뭘 묶는 것 같기도 하고…. 우현이 손을 움찔거리자 성규는 낮은 목소리로 움직이지 마,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뭐 하는 건데? 말 좀 해 봐. 하지만 우현의 물음은 대답 없이 허공에 맴돌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성규는 다 됐다! 라는 탄성을 내질렀다.
"뭔데. 뭐냐고."
"꽃반지!"
웃음기 가득한 성규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성규는 우현의 왼손을 들어 우현의 코 근처에 갖다 대었다. 진하진 않지만 좋은 향이 맴돌았다. 우현은 오른손으로 왼손 약지에 매어진 꽃을 매만졌다. 어릴 적 누나가 자주 해줬던 꽃반지를 생각하자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우현의 표정이 완전히 풀리자 성규는 좀 더 편하게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그 꽃은 노란색이야. 들풀인데 향도 나네."
"이거 해주려고 그렇게 끙끙댄 거야?"
"응. 머리에도 달아줄까?"
"아니. 그건 됐어."
우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성규는 그게 뭐가 어떠냐면서 툴툴댔다. 그렇게 예쁘면 형이 해, 라는 우현의 말에는 싫어, 라고 단칼에 자르고 말았지만. 한참을 꽃을 머리에 다느니 마느니로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편히 기대어 평온함을 만끽했다. 한참이 흐른 후, 성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아."
"응."
"우리 맞은 편 벤치에는 커플이 도시락을 까먹고 있어."
둘이 목도리 색이 똑같은 거 보니까 커플 목도리인가 봐. 나도 저런 거해보고 싶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식수대가 있는데, 애들이 막 물장난을 치고 있어. 이 날씨에 춥지도 않은가봐. 우리는 완전 무장하고 왔는데. 우리 앉아있는 여기에서 왼쪽에는 놀이터가 있어. 애들이 되게 조그맣다. 유치원 애들 같은데. 흙장난 하면서 논다. 저 나이땐 옷 입는 스타일이 고만고만한 것 같아. 아, 스타일이 아니라 색인가? 여자애들은 분홍색, 남자애들은 파란색. 뭐 그런 거. 그리고 더 왼쪽으로 가면 정자가 있는데. 하나에는 애기엄마들이 수다 떨고 계시고, 그 왼쪽엔 할아버지 두 분이 장기를 두고 계신 것 같아.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가 있어. 김성규와 남우현이 있어.
흡사 한 편의 동화책을 읽어주듯, 성규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리자 우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성규는 성규만의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우현에게,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세상을 묘사해주는 재주. 성규는 슬며시 우현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어."
"…나도."
"세상은 반짝반짝 빛이 나. 지금 당장 네 앞이 어두워도, 넌 누구보다 빛나. 내가 본 어떤 사람들보다."
난 네가 가장 밝은 곳에서 눈부시게 빛났으면 좋겠어. 말을 끝낸 성규는 부끄러운 듯 손을 살짝 비틀어 빼내었다. 우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나 빨리 눈 떠야겠다. 이 세상엔 그 무엇보다, 반짝반짝 빛이 날 김성규가 있을 테니까. 우현은 마지막 말은 가슴속으로 삼킨 채 성규의 손을 다시, 더 세게 잡았다.
-
"오늘 좋았지?"
"응. 근데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아아."
"왜?"
"호 쌤 왔다 갔을까봐…."
"아직 시간 안됐어."
다행이다. 우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때, 성규와 정신없이 말을 하며 걸어가던 우현의 앞에 작은 여자아이가 튀어나온 것은 한 찰나였다. 성규도 뒤늦게 우현의 팔을 붙잡고 뒤로 내빼었지만 우현과 아이는 서로 부딪힌 후 바닥에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다.
"아이고, 머리야."
우현이 인상을 쓰며 머리를 매만지고, 넘어진 아이는 이윽고 숨이 넘어갈 듯이 꺽꺽대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누굴 먼저 달래줘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성규는 우현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그 후 아이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울지 마. 울지 마아. 우현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높이에 맞게 쭈그려 앉은 후 울지 마, 라는 말만을 고장 난 인형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성규는 우현의 옆에 쭈그려 앉아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그래. 착하다, 착하다."
"…."
아이의 울음소리가 줄어들자 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하며 내가 잘못했어, 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아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설마, 많이 화났나…. 우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 때, 우현의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이, 거기서 뭐해?"
"호 쌤!"
검은 정장 차림의 호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규와 우현, 그리고 성규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놀이라도 하니? 성규는 호원의 대책 없는 드립을 깔끔하게 날려버리고 어느새 달려온 아이의 엄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저희가 미처 앞을 못 봐서."
"우리 애가 잘못이죠."
서로 잘못했다며 허리를 숙이는 두 사람을 보며 호원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멍하니 바닥에 앉아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고 있는 우현을 일으켜 세운 호원은 아이의 엄마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소라 어머님 아니세요?"
"아, 이 선생님."
"많이 좋아졌네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주고받는 아이엄마와 호원을 두고, 성규와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형, 그 꼬마 많이 화났어? 나 때문에? 왜 아무 말이 없지. 우현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성규는 우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때, 호원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득 생각난 듯이 성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성규, 수화 할 줄 알더라? 소라 귀 안 들리는 거 어떻게 알고."
"넘어졌는데 울음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안 들리 길래."
"그래도. 언제 배웠어? 수화."
"예전에요."
수화? 우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성규는 응, 이라고 짤막한 대답을 날려주었다. 앞도 안 보이는 우현에게 수화는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다. 흡사 다른 나라의 언어 같은. 그럼 이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에 빠진 우현이 내린 결론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였다.
"미안합니다, 수화 알려줘."
"어?"
"사과해야지."
성규는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의 우현을 보고 말과 행동을 더해서 '미안하다'라는 뜻의 수화를 만들어주었다. 성규의 지도하에 우현은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이마에 댄 후, 원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동작을 완벽히 소화해 내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현란하게 손짓을 해대었다.
"괜찮대."
"정말?"
"응."
다음부턴 조심하래. 다치지 않게.
-
"나, 수화 더 배울래!"
"나중에 배워."
"간단한 것만 알려주면 안 돼?"
새로운 거 배우는 거 좋단 말이야. 병실에 돌아온 뒤 찡찡대는 우현을 견디다 못한 성규가 결국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을 알려주자, 우현은 서툰 동작으로 나름 열심히 성규를 따라했다. 쟨 지금 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텐데. 수화를 알려주면 알려줄수록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오히려 성규 쪽이었다. 우현은 그저 즐거워보였다.
"어? 방금 건 무슨 뜻인데?"
"안 알려줘."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나중에 네가 찾아봐. 방금 한 거랑…."
왼손을 주먹 쥐어봐. 그리고 그 위에 오른손을 펴서 올려. 그리고 원을 그려.
"이건 뭔데?"
"이것도 비밀."
* * *
안녕하세요 그대들^~^
이제 한 주만 버티면 빵노예 탈출이다...!!!!ㅠㅠㅠ
연재주기는 대략 일주일을 맞추려고 노력중이에요ㅠ0ㅠ
그런데..내 암호닉 그대들 다 어디갔담......흡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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